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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배 전도자
딤전 6:3~6 2018-05-27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모든 사람은 예외 없이 죄인이고 그러나 복음을 듣고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을 자신의 것으로 믿고 순종하는 거듭남으로 죄는 해결되고 이제 새로운 피조물이 되어서 세상의 성품은 죽어가고 점점 하늘의 성품이 자라나서 신앙의 목표인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까지 자라 마침내 하늘에 새예루살렘에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그럼에도 사람마다 믿음의 성장이 다르고 심지어는 하늘의 백성으로 거듭났음에도 불구하고 영적인 성장이 되지 못하여 어린아이같이 여전히 단단한 식물을 소화할 수 없고 새로운 믿음의 자녀를 잉태하고 키우는 것은 전혀 불가능한 사람들도 있다.

이렇게 믿음으로 하늘을 향해 자라지 못하는 이유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고 성경에서도 이런 안타까움을 더러 언급하고 있다. “… 너희가 듣는 것이 둔하므로 설명하기 어려우니라, 때가 오래 되었으므로 너희가 마땅히 선생이 되었을 터인데 너희가 다시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에 대하여 누구에게서 가르침을 받아야 할 처지이니 단단한 음식은 못 먹고 젖이나 먹어야 할 자가 되었도다, 이는 젖을 먹는 자마다 어린 아이니 의의 말씀을 경험하지 못한 자요, 단단한 음식은 장성한 자의 것이니 그들은 지각을 사용함으로 연단을 받아 선악을 분별하는 자들이니라”(히5:11b~14)

히브리 즉, 이스라엘 사람들은 어려서부터 자라는 환경 속에서 성경을 배우고 접해 오면서도 절기를 지키는 것이나 예루살렘을 순례하는 것이나 회당의 모임에 참여하는 것으로 신앙적 자신의 역할을 다했다고 판단하는 데서 이런 책망을 듣는 것을 본다.

바울은 자신의 믿음의 아들인 디모데에게 “망령되고 허탄한 신화를 버리고 경건에 이르도록 네 자신을 연단하라”(딤전4:7)고 당부하면서 다음절에서 다시 “육체의 연단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느니라”(딤전4:8)는 확신을 주고 있다.

비록 연령은 어리지만 가르치는 자로서 먼저 성장하여 신앙의 이론적인 부분뿐만 아니라 실제적인 삶에서도 모범을 보이라고 당부한다. “누구든지 네 연소함을 업신여기지 못하게 하고 오직 말과 행실과 사랑과 믿음과 정절에 대하여 믿는 자에게 본이 되어”(딤전4:12)

오늘 날 대부분의 교회나 신앙인들이 교회만 출석하면 경건한 것으로 잘못 가르쳐지고 있다. 바울이 경계하는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니 이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딤후3:5)는 내용은 바로 이런 유형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경건’은 곧 ‘능력’이라고 말하고 있는데 하나님께서 우리 사람들에게 불가능한 것을 하도록 하시거나 무리한 명령을 주실 분이 절대로 아니시다. 이 말씀은 마치 고린도교회에게 하는 말씀과 다르지 않다.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능력에 있음이라”(고전4:20)

요한 사도는 이를 다르게 표현하고 있는데 “무릇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기는 승리는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자가 아니면 세상을 이기는 자가 누구냐”(요일5:4~5)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로 믿고 거듭난다고 하는 이치는 이제는 우리의 노력과 힘과 개인의 능력으로 사는 것이 아니다. 쉽게 말하면 우리의 경건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순종하고 따르는 자들에게 주신 세상을 이기는 능력이다.

오늘 우리는 우리 교회와 자신의 경건을 점검하고 우리에게 주신 경건을 얼마나 키워가고 그 경건이 우리 각자를 어떻게 하나님을 순종하게 하는가를 점검하면서 그렇지 못하다면 세상을 이길 경건을 갖춰 입도록 바른 신앙적 성장을 가질 수 있기는 기대하자.



Ⅰ.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교훈을 따르라,(3)

“누구든지 다른 교훈을 하며 바른 말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경건에 관한 교훈을 따르지 아니하면”

이것은 오늘 주제와 더불어 생각할 때 역시 경건에 이르도록 힘쓰라는 교훈으로 잘못된 가르침이 우리로 하여금 경건함으로 자라게 하는 것을 방해한다는 것이 첫 번째이다. 이 말씀을 다름 번역본으로 보면 “다른 교리를 가르치거나 ①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건전한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거나 ②경건한 생활 원칙을 따르지 않는 사람은- 공동]이를 거꾸로 말하면 주 예수 그리스도의 바른 교훈을 가르침 받으면 당연히 경건해 질 수밖에 없는데 경건해 지지 못한 것은 진리에 따른 바른 교훈으로 가르침 받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말씀이다.

우리가 교회에 예배와 모임으로 참여함에서 신앙이 완성되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성령의 교통은 세상이 줄 수 없는 전혀 다른 권능을 주님의 백성들에게 내려 주시는데 그것이 어둡고 죄악 된 세상을 이기는 능력이다.

그런 의미에서 예배는 예배당에서 시작하여 세상 속에서 완성되어야 한다. 이 세상에서 하나님께 지속적으로 드려지는 예배가 바로 로마서12:1의 산 제사 우리의 움직임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드리는 것이다.

이 첫 부분이 좀 부정적으로 쓰였지만 역시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들에게 주시는 생명의 교훈이다. “… 바른 말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경건에 관한 교훈을 따르지 아니하면”(3b) 앞에서도 말했지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경건에 관한 교훈”은 서로 상관관계이면서 같은 역할을 한다.

“경건[εὐσέβεια, 행3:12; 딤전2:2, 3:16, 4:7, 8, 6:3, 5, 6, 11; 딤후3:5; 딛1:1; 벧후1:3, 6, 7, 11, 모두15회 εὖ 좋은, 잘, 옳게, + σέβω예배하다, 경배하다, 숭배하다, 공경하다]” 함축적으로 하나님과 좋은 관계를 이루어 가는 것으로 하나님의 성품을 닮아 가는 것이다. 하나님의 품성과 인격을 닮은 삶이라고 할 수 있다. 하나님과 사람 양쪽에 대한 존경을 나타내는 말이다. 그러므로 어느 시간과 공간 속에서든지 하나님의 기쁘신 뜻을 우선으로 수용하는 것이다.

우리가 만약에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만큼 경건할 수 있다면 교회 안에서도 서로를 측은지심(惻隱之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경건의 깊이가 더할수록 영적인 삶은 만족할 것이고 더욱 그리스도의 심장에 가까운 마음이 될 것이다.

또 한가지 독특한 것은 이 경건이 사도행전과 같이 교회의 확장보다는 오늘 시작의 말씀처럼 문제 있는 교회들에 파견된 전도자들에게 많이 거론하고 있다는 점이다. 결국 교회들이나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 아버지의 성품을 잃어버리고 주님의 뜻을 잃어버렸을 때 역시 경건의 문제가 나타나는 것을 본다.

“경건[θρησκεία, (의식상)종교, 예배, 숭배함, 행26:5; 골2:18; 약1:26, 27 모두 4회]”

“누구든지 스스로 경건하다 생각하며 자기 혀를 재갈 물리지 아니하고 자기 마음을 속이면 이 사람의 경건은 헛것이라,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그것이니라”(약1:26~27)

경건은 하나님을 숭상하고 사람을 존경하며 자기 자신을 귀히 여기는 정신의 태도를 나타내는 말이다. 하나님에 대한 경외의 정신이 모든 삶의 행동의 바탕이 되고 다른 사람의 권리를 결코 잊지 않으며 자신의 귀중한 존재 가치를 결코 망각치 않는 삶의 모습인 것이다.

이러한 그리스도인의 순수한 경건은 개인적이면서 공동적이고, 현세적이면서 내세적일 뿐 아니라 우리 일상 생활의 여러 측면에서 표현되는 행위로 한마디로 말하면 하나님께 바쳐진 삶으로 구약의 나실인 같은 삶에 비길 수 있다.

더 이상 자기의 뜻이나 자기의 방식이나 세상 정신을 따라서 사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삶을 이끌어 가는,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을 생각하고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을 섬기고, 모든 일을 하나님의 이름으로 행함으로써 자기의 일상적인 삶의 모든 부분들을 다 하나님의 말씀과 명령으로 채워가는 사람, 바로 그러한 사람이 경건한 사람이다.

그러나 세상을 향하여는; 나약한 두려워하는 모습이거나, 얽매인 부자유한 모습이거나 초라하고 비굴한 모습이 아니며 현재에 충실하면서도 미래에 더 소망을 둠으로 자신 만만한 모습이다.

단순히 예배나 모임으로 표현되는 경건 즉 예배드림이 사실적인 삶을 주도해 가지 않으면 그것은 경건이라고 보기 어려운 것을 말하고 있다. 경건은 언제나 관념적인 것이 아니라 사실적인 모습의 표현이라는 데도 우리가 경성해야 할 두려움을 갖는다.



Ⅱ. 옳지 못한 신앙으로 나타나는 현상,(4~5)

“그는 교만하여 아무 것도 알지 못하고 변론과 언쟁을 좋아하는 자니 이로써 투기와 분쟁과 비방과 악한 생각이 나며, 마음이 부패하여지고 진리를 잃어 버려 경건을 이익의 방도로 생각하는 자들의 다툼이 일어나느니라”

“누구든지 다른 교훈을 하며 바른 말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경건에 관한 교훈을 따르지 아니하면”하는 앞에서 경계된 내용은 당연히 거기에 따르는 문제가 발생하게 되어 있다. 이것은 경건하지 못해서 나타나는 현상들이라는 것이다.

“저는 ㉮교만하여 아무것도 알지 못하고 ㉯변론과 언쟁을 좋아하는 자니 이로써 ㉰투기와 분쟁과 훼방과 악한 생각이 나며, ㉱마음이 부패하여지고 ㉲진리를 잃어버려 경건을 이익의 재료로 생각하는 자들의 다툼이 일어나느니라”(4~5) 이것은 불경건의 열매들이다.

여기에서는 부정적으로 표현되지만 되도록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내용으로 이해했으면 한다.

주님께서는 베드로 사도를 통하여 “그의 신기한 능력으로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으니 이는 자기의 영광과 덕으로써 우리를 부르신 이를 앎으로 말미암음이라”(벧후1:3)고 증거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하신 일들이 우리의 생각이나 판단으로는 헤아릴 수 없는 놀라운 방법이고 결과들이다.

“그의 신기한 능력으로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으니 …” 이것은 어떤 특정한 사람들에게만 주신 덕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으로 거듭난 모든 사람에게는 이미 주어졌다. 문제는 주어진 이 귀한 덕목들을 사용하지 않거나 못하는 것이다.

이 엄청난 은혜를 선물로 주신 이유도 함께 기록하고 있다. “… 이는 자기의 영광과 덕으로써 우리를 부르신 이를 앎으로 말미암음이라” 적어도 영원한 생명에 속한 모든 것과 성령의 임재로 말미암아 경건은 주님을 순종하는 모든 사람들의 것이 되었다. 그렇다면 왜 우리가 경건하지 못할까!

하나님의 성품을 가진 삶으로 산다면 육신적으로는 불이익이 따름도 경계해 주고 있다.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박해를 받으리라”(딤후3:12) 믿음을 가졌다는 대부분의 사람은 자신이 현재 거처하고 있는 곳에서 적어도 사람들과 상대하면서 되도록이면 그들과 부딪히지 않으려고 도사리는 경우가 많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그런 사람들과 함께 역사하고 그들을 사용하심을 역사 속에서 보게 된다. 그럼에도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지는 약속은 “주께서 경건한 자는 시험에서 건지실 줄 아시고 불의한 자는 형벌 아래에 두어 심판 날까지 지키시며”(벧후2:9) 경건하게 살려고 하려면 세상에서 핍박을 받지만 이런 사람들은 세상이 아니라 주님께서 그러한 상황에서 건지실 것을 확인해 주고 있다.

바울은 “또한 너는 청년의 정욕을 피하고 ‘주를 깨끗한 마음으로 부르는 자들’과 함께 의와 믿음과 사랑과 화평을 따르라”(딤후2:22) 여기 깨끗한 마음이란 세상의 반응이나 대적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주신 믿음으로 세상이 아니라 같은 경건을 위해 애쓰는 자들과 함께 “의와 믿음과 사랑과 화평을 따르라” 당부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단호한 것은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니 이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딤후3:5)는 당부도 주고 있다.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어쩌면 이것은 모든 믿음생활을 하는 사람들일 것이지만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자들에게서’는 경건을 부정하고 거절하는 타협적인 신앙의 사람들을 이름일 것이다. 그럼에도 조심스러운 것은 기대치에 미치지 못하는 사람들과 교제를 끊으라는 의미는 아니다.

이런 입장에서 오늘날에 있어서 경건을 정의한다면 (1)경건은 어떤 상황에서나 하나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는 것. (2)세상과 구별이며. (3)삶속에서 드려지는 예배다.(롬12:1)



Ⅲ. 경건의 큰 이익,(6)

“그러나 자족하는 마음이 있으면 경건은 큰 이익이 되느니라”

이 말씀은 특히 세상의 이권과 연결되어 말하여지고 있다. 돈이 권세를 가지는 시대, 돈이 모든 걸 다 해결한다고 생각되는 시대에 특히 이러한 현상이 있을 것이라는 경계라서 더욱 그렇다.

“자족[αὐτάρκεια, 자기만족, 재산, 풍족] 이것은 보이는 세계의 상황에 관계없이 스스로 만족을 누릴 수 있는 것을 의미한다. 믿음의 사람들은 “사람을 보며 세상을 볼 땐 만족함이 없었네 나의 하나님 한 분만으로 나는 만족하겠네” 세상에 상대적인 것들을 삶의 기준으로 본다면 변화무쌍한 상황에 마음을 둘 때 이런 상황을 가리켜 야고보는 “…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 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 두 마음을 품어 모든 일에 정함이 없는 자로다”(약1:6b~8)라고 평가하고 있다.

우리가 오해할 수 있는 표현이 바로 ‘자만’과 ‘자족’이다. 자만은 자신이 영적인 수준에 이르지 못했음에도 거기에 도달 한 것처럼 착각하는 거만한 사람 즉, 성경에서 가장 경계하고 있는 표현이다. 그러나 자족은 주어진 상황과 환경 속에서 주변의 평가에나 잘되고 못됨에 관계없이 감사하고 만족하는 것을 이름이다.

주님께 사랑 받는다는 감동이 우리의 마음 전체를 지배한다면 그러한 사랑의 확신이 이 세상에서의 모든 부족함도 넉넉히 채우고 남을 것이다. 죄인 된 나를 위하여 하나밖에 없는 독생자를 제물 삼아 주신 것을 제대로만 이해한다면 이 세상에서의 삶에 핍절함이 우리를 다시 세상으로 내몰지 못할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마음이 부패하여지고 진리를 잃어 버려 경건을 이익의 방도로 생각하는 자들의 다툼이 일어나느니라”(5) ‘마음이 부패하여지고’는 믿음의 사람들에게 가장 치명적인 모습이다. 믿음생활을 잘 못 생각하면 이것을 영원의 영광의 약속이 아니라 이 세상에서의 유익을 위한 도구로 사용할 수 있기 때문에 경계하는 바다. “그러나 자족하는 마음이 있으면 경건은 큰 이익이 되느니라”(6)는 말씀의 시작인 “그러나”는 그럴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전제로 한다.

다른 사람들이 신앙을 육신의 이익을 챙기는 기회로 삼더라도 하나님의 사랑 받음에 확신과 감격이 있다면 상황의 불리함과 손해에도 불구하고 얼마든지 만족하고 감사할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이다.

이러한 참된 경건의 규범은 인간에게서 나오지 않는다. 오직 움직임의 모든 이유도 방법도 목적도 하나님의 말씀에서 출발되어지는 그러한 삶의 방식이다[시1:2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오늘 우리가 세상과 사회에 영향을 끼치려고 한다면 그만큼 하나님께 높이 들려 올려진 경건이라야 성도로서 교회로서의 역할을 감당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세상에서 경건을 찾자 보기 어려운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우리는 어느 때만 경건한 것처럼 보이는, 성령이 함께 하지 않는 능력 없는 경건은 있으나 마나이다. 경건이 없는 종교행위는 야고보가 가르치는 것처럼(1:26~27) 헛것이다.

오늘날 믿음은 점점 퇴화되어 가고 있는 성경적 신앙의 위기를 느끼면서 어느 시대보다 절실한 것이 신앙 개개인과 교회의 경건성의 회복일 것이다. 교회가 힘이 있고 강한 결속력을 갖기 위해서 또 세상의 복음의 증거자 역할을 넉넉히 감당하기 위해서는 교회의 직분 자들과 성도들의 경건성의 강화야말로 하나님의 도구로서의 기초일 것이다.

디모데를 향한 바울의 권면 “망령되고 허탄한 신화를 버리고 경건에 이르도록 네 자신을 연단하라”(딤전4:7)는 말씀은 경건이 [훈련]에 의해서 이루어짐을 확신할 수 있다.

특히 하나님 즉, 성령의 능력보다 교회의 효율성과 과학화가 우선적으로 발달되어 가는 현실에서는 더욱 그러할 것이다. 바울 사도는 외치기를 “크도다 경건의 비밀이여, 그렇지 않다 하는 이 없도다”(딤전3:16)라고 찬양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