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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배 전도자
행 19:1~7 2018-06-03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  
신앙의 삶에 진리이면서 우리에게 가장 가깝고 중요한 것이 기록된 말씀이지만 그것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은 우리의 믿음생활의 평생 우리와 함께하셔서[요14:16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신앙생활을 승리로 이끄시는 하나님의 성령이시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구속의 역사가 모든 인류에게 귀중한 전기를 마련하신 역사는 사죄의 은혜뿐만이 아니라 거듭난 하나님의 백성들마다 함께하시는 성령의 능력이다. “…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28:20b)

이것은 어떤 사람의 약속이 아니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분명한 약속이다.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요14:26)

주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전 제자들에게 보내실 성령께서 얼마나 귀중한 역할을 그의 제자들 속에 하실 것인가를 분명히 말씀하셨다. “그러하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자의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듣는 것을 말하시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요16:13)

기록된 말씀의 귀중성도 말하였지만 왜 유익한가 하면 “너희는 거룩하신 자에게서 기름 부음을 받고 모든 것을 아느니라”(요일2:20)고 요한 사도가 확인하고 연이어 v27에 다시 “너희는 주께 받은 바 기름 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그의 기름 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 또 참되고 거짓이 없으니 너희를 가르치신 그대로 주 안에 거하라”고 확인한다.

그럼에도 이런 비교될 수 없는 유익이나 약속을 모르고 “…우리는 성령이 있음도 듣지 못하였노라”(2b)는 어리석음 속에 신앙한다고 하면 얼마나 큰 비극인지 모를 일이다. 여러분 모두는 성령과 함께 믿음생활 하는가?

그리스도인이라고 할 때 여기에 대한 답변은 두 가지일 것임에 분명하다. 하나님의 약속대로 믿고 순종하여 참으로 성령께서 성전삼고 함께 계시는 사람이든지, 말씀을 기록된 대로 순종하지 못하면서 막연히 성령께서 자신과 함께 하신다고 착각하고 있는 사람도 본문의 상황처럼 분명히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부분에서도 회복이 중요한 것은 이것은 믿음 생활하는 사람들의 온 생애가 걸린 문제이면서 신앙의 성패(成敗)를 좌우할만한 과제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그의 백성으로 사는 사람들의 어리석음을 기뻐하지 않으시고(호6:3-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6-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 오히려 모든 분야에서 하나님의 창조와 역사를 포함한 모든 부분을 함께 알기를 원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더 두려운 문제는 성령의 사람 바울은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롬8:9)고 까지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무리 자신이 ‘그리스도인’이라고 큰 소리 칠 찌라도 성령께서 내주하지 않으시면 하나님께서 보실 때는 인정하실 수 없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복음을 확산시키시기 위해 성령께서 역동적으로 역사하시던 시대 속에도 이런 일이 있었다고 하는 것은 어찌 보면 모든 시대 속에 경계를 주시기 위한 지혜로우신 우리 하나님의 장치라고까지 보여진다.

이런 문제가 신앙의 초보적인 문제이기는 하지만 대단히 중요한 영적인 과제로 모두가 반드시 확인해야 하는 것은 열매로 그 나무를 안다(마7:15~23)고 말씀하신 비유와 함께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반드시 성령의 열매를 맺을 것이라고 말씀하시기 때문이다.

차제에 경계되는 것은 우리 대한민국이 성령의 은사운동이나 치유를 다루면서 방언이나 진동과 함께 너무 요란하고 무질서한 부분만을 강조해 왔기 때문에 성령에 관한 교훈을 다루려는데 상당히 조심성을 가지게 된다. 성령의 인격적이고 위로하시는 부분이 너무 위축된 부분이 없지 않기 때문에 대부분의 사람들이 ‘성령’만 이야기 하면 요란하고 시끄러운 상상부터 하기 때문에 갖는 경계이다. 이런 여러 분야에서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귀중한 부분들을 일깨워 주는 중요한 교훈이다.



Ⅰ. 신앙적 무지는 옳지 않다.(1~2)

“아볼로가 고린도에 있을 때에 바울이 윗지방으로 다녀 에베소에 와서 어떤 제자들을 만나, 가로되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 가로되 아니라 우리는 성령이 있음도 듣지 못하였노라”

바울이 아굴라-브리스길라 부부와 함께 고린도교회를 개척하고 구약성경에 능하고 말을 잘하는 아볼로로 하여금 고린도교회를 섬기게 하고 자신은 다시 마케도니아를 거쳐서 에베소에 왔을 때 있었던 일임을 기록하고 있다. “아볼로가 고린도에 있을 때에 바울이 윗지방으로 다녀 에베소에 와서 어떤 제자들을 만나”(1)

바울 일행이 만난 사람들을 “어떤 제자들”이라 기록되어서 정확한 신앙적 바탕이나 수준을 알 수는 없지만 이런 사람들은 어느 때나 있기 마련이다. 특히 당시는 바른 신앙적 지침인 신약성경이 아직 완성되기 전이었기 때문에 신앙적 기준이 정확하게 각 교회에나 사람들에게 주어지지 못한 상황아래의 형편에서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런 일은 오늘날에도 더러 있는 것으로 보인다. 전체적인 성경의 교훈이나 하나님의 구원진리가 고루 바르게 가르쳐지지 못하고 어떤 부분만이 강조적으로 익혀진 사람들의 성경이해의 한계가 이런 모습으로 나타날 수 있다.

이런 사람들에게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 …?”(2f) 묻는데 이 질문의 요지를 이해한다면 “믿을 때에 성령을 받게 되어 있다.”는 사실을 전제로 하는 질문이다. 물론 이 말씀은 이어지는 말씀과 함께 “믿을 때”가 언제부터인지부터 바른 이해가 필요하고 성령께서 믿음의 사람들 속에 함께 하심을 당연시 하는 말이다.

여기에 대한 안타까운 답변은 “… 아니라 우리는 성령이 있음도 듣지 못하였노라”(2b)는 것이었다. 왜, 바울 사도가 이런 질문을 하는가도 중요한데 사실 하나님의 약속으로 오시는 성령께서 계시지 않는 신앙생활이란 성공할 수도 없을뿐더러 더욱 힘겨운 의미 없는 투쟁일 뿐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성령이 있음도 듣지 못하였노라” 이 답변 자체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주신 구원의 은총을 누리지 못하고 있는 모습이다. 대표적인 예가 바로 나중에 브리스길라-아굴라 부부로 채워졌지만 아볼로 같은 경우이다. “알렉산드리아에서 난 아볼로라 하는 유대인이 에베소에 이르니 이 사람은 언변이 좋고 성경에 능통한 자라, 그가 일찍이 주의 도를 배워 열심으로 예수에 관한 것을 자세히 말하며 가르치나 요한의 세례만 알 따름이라”(행18:24~25)

세례가 오실 메시야를 맞을 회개를 초청하면서 침례자 요한이 베푼 것이 예수님보다 먼저였지만 그것은 구원이 약속된 세례가 되지 못하였다. 이것은 의미대로 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맞을 준비단계에 불과한 것이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구속의 역사가 완성되었음에도 여전히 이런 세례가 있었다는 것 자체가 아니러니 이고 이것을 비교한다면 복음시대에 아직 OT의 신앙을 그대로 하는 것과 같다고 말할 수 있다.

또 예수님의 공생애 기간에도 “예수께서 제자를 삼고 세례를 베푸시는 것이 요한보다 많다 하는 말을 바리새인들이 들은 줄을 주께서 아신지라, 예수께서 친히 세례를 베푸신 것이 아니요 제자들이 베푼 것이라”(요4:1~2)는 기록처럼 주님의 제자들이 사람들에게 베풀었던 세례도 기록되고 있지만 이것 역시 구원의 세례인지는 의문스럽다.

예수께서 직접 세례를 명령하신 것은 십자가를 지시기 이전에는 없으셨다. 죽음에서 부활하신 후에야 비로소 이 명령을 제자들에게 주고 계심을 우리는 성경에서 확인할 수 있다.(마28:18~20; 막16:15~16) 이런 이유에서 ‘주님이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주님을 고백한 우편강도를 왜 세례주지 않았느냐,’는 것은 사실 억지이다.



Ⅱ. 유효한 것은 어떤 세례냐?(3~4)

“바울이 가로되 그러면 너희가 무슨 세례를 받았느냐 대답하되 요한의 세례로라, 바울이 가로되 요한이 회개의 세례를 베풀며 백성에게 말하되 내 뒤에 오시는 이를 믿으라 하였으니 이는 곧 예수라 하거늘”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2f) 물었던 바울에게 “우리는 성령이 있음도 듣지 못하였노라.”(2b) 답변했고 여기에 대한 바울의 또 다른 질문이 “너희가 무슨 세례를 받았느냐?”(3f) 묻는 것을 보면 이 뒤의 질문이 앞의 질문을 설명하고 있음을 어렵지 않게 이해하게 된다.

또 “너희가 무슨 세례를 받았느냐?”(3f)하는 것은 세례가 성령을 받는 조건이며 어떤 세례가 성령을 받을 수 있는 세례인가도 알게 되는 교훈이다.

‘죄인이 하나님을 믿고 그리스도인이 되겠다고 할 때 과연 어느 때부터 믿음의 사람이 되며 성령이 내주하시게 되는가!’ 하는 바른 이해는 대단히 중요하다. 그리고 이러한 바울의 질문들이 여기에 대한 혼란을 정리해 주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절대로 혼란과 무질서에 있도록 허용하지 않기 때문에 이런 부분을 성경에 분명히 기록하고 있다.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2f)와 “너희가 무슨 세례를 받았느냐?”(3f)라는 두 질문은 다음과 같이 하나로 정리될 수 있다. ‘너희가 무슨 세례를 받고 믿음에 들어왔느냐?’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시기는 분명하다.

결국 악과 더러운 죄인인 사람 속에 거룩하신 성령께서는 절대로 함께 계실 수 없다. 이런 이유에서 하나님을 거스르는 좌와 악이 제거되고 깨끗하게 되었을 때 성령은 그런 사람의 마음을 성전삼고 그의 일생의 삶에 함께 하시게 된다.(고전3:16, 6:19)

이를 더 구체적으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희생이 죄인 된 사람에게 어떻게 유효하게 되는가!’ 즉, ‘예수님의 희생이 그 사람의 죄를 어떻게 씻는가?’ 하는 말이다.

성경에 분명히 나타난 대로는 물속에 장사 지내는 침례 외에는 볼 수 없다. “이제는 왜 주저하느냐 일어나 주의 이름을 불러 세례를 받고 너의 죄를 씻으라 하더라”(행22:16) 이런 이유에서 사도행전 속의 구원받은 사람들은 예외 없이 세례를 받는 것으로 나타난다.

앞에서 말한 대로 하나님이 즉, 성경이 지시하신 방법대로 죄를 해결하지 않은 사람 속에는 그 사람의 감정이나 의지, 기분에 상관없이 성령은 거하실 수 없음이 분명하다.

이런 이유에서 성령의 존재도 알지 못한다는 에베소 사람들에게 바울은 “너희가 무슨 세례를 받았느냐?”(3f)고 묻는 것이다. 여기에 대한 약속은 아직 이 땅에 교회가 세워지기 전 오순절날 이 땅에 성령께서 사도들에게 내려 오시고 베드로를 통해서 증거되었다.

“베드로가 이르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니, 이 약속은 너희와 너희 자녀와 모든 먼 데 사람 곧 주 우리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하신 것이라 하고”(행2:38~39)

이 약속은 베드로로부터 이 말씀을 듣는 사람들은 물론이고 그들에게서 난 대대의 자녀와 또 하나님께서 장래에 구원하실 모든 먼데 사람 즉, 미래에 이 약속을 누릴 모든 사람에게라고 분명히 선언하고 있다.

다시 바울은 보다 분명한 믿음 속에 들어오는 방법을 로마서에서 증언하고 있는데 이 이론은 사람이 그리스도인으로 거듭나는 분수령 같은 말씀이다.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냐,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도 되리라”(롬6:3~5)

이런 이유 때문에 갈라디아3:27에서도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기 위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는 같은 증거를 하고 있다. 안타깝게도 이 방법 외에는 다른 방법은 성경에서 찾아볼 수 없다.

이런 이유 때문에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1:12)라는 요한을 통한 약속도 다르지 않음을 이해할 수 있다.

무슨 세례를 받았느냐고 묻는 바울에게 그들이 한 답변은 “요한의 세례로라,”였다. 그런 이유에서 세례요한이 회개의 세례를 베푼 그 목적으로 바로 성령으로 세례를 주실 분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다시 확인시켜주고 있다.

“요한이 회개의 세례를 베풀며 백성에게 말하되 내 뒤에 오시는 이를 믿으라 하였으니 이는 곧 예수라 하거늘”(4) 그들이 성령을 받을 수 있는 분명한 방법을 제시하고 있고 거기에 반응하는 몫은 들은 사람의 차지이다.

오순절날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한 베드로의 메시지에 오순절을 지키러 예루살렘에 모여있던 사람들의 모두는 아니었지만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이르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거늘”(행2:37) 하였다.

말씀을 받는 자세는 이래서 중요하다. 지금까지 잘 못됨을 깨달았다면 즉시로 진리에 순종하는 것이 구원받을 믿음이요 하나님께 사랑 받을 자세이다. 오늘 말씀의 다음 단계에서도 이러한 자세를 보게 된다.



Ⅲ. 순종하여 이루어지는 구원과 은혜,(5~7)

“저희가 듣고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니, 바울이 그들에게 안수하매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시므로 방언도 하고 예언도 하니, 모두 열두 사람쯤 되니라”

세례요한의 세례만을 받고 배웠던 그들은 이제 성령으로 세례를 주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다시 세례를 받는 순종을 여기서 배운다. 중세 종교계혁이전에 요한 후스[John Huss]나 보헤미안 형제단을 비롯한 재세례파라고 하는 사람들도 자신들의 의지와 상관없는 유아세례는 성경 속에서 볼 때 바른 것이라고 할 수 없기 때문에 다시 침례를 받았다.

그러나 기존의 방법에 익숙해있고 그런 것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당시 기득권의 사람들에게 이것은 가히 혁명적인 반항이었기 때문에 이들을 핍박하고 죽이기까지 했던 것을 역사 속에서 볼 수 있다.

“저희가 듣고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니”(5) 이것은 자신들의 온전치 못함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이는 순종의 모습으로의 모범이다. 앞에서 거론한 거듭남으로 하나님의 새로운 피조물이 되고 믿음 속에 들어가는 것은 사실 이것으로 완벽한 약속이 이루어진다.

왜냐하면 초대교회의 시작에서 베드로 사도가 확인해 줬기 때문이다.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니”(행2:38) 라는 약속은 여기서 이미 완성되었기 때문에 구원의 인치심의 성령의 선물은 이미 약속대로 저들에게 오셨을 것이다.

그럼에도 오늘 마지막 부분은 우리가 소화해야만 할 내용이 첨가되고 있다. “바울이 그들에게 안수하매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시므로 …”(6f) 이런 논리나 약속이 확증되지 못한 NT성경이전의 성도들은 그것을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보이는 증거가 필요했고 그러한 증거가 “… 방언도 하고 예언도 하니, 모두 열두 사람쯤 되니라”(6b~7)는 것이었다. 요즘은 꼭 같은 하나님의 명령을 행해도 이런 모습은 보이지 않는 이유는 이미 NT성경을 통하여 확증되었기 때문이다.

이런 사건은 여기에서뿐 아니라 예루살렘에 박해로 인해 사마리아에 복음을 전했던 빌립의 사역에서도 나타났던 부분이다.(행8:5~8, 14~17)

이런 분명한 기준 속에서 하나님의 진리의 가르침도 하나님의 자녀가 된 이후라야 성령의 가르침과 지도를 확실히 받을 수 있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먼저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날 것을 말씀하시고 그 후에야 가르칠 것을 명령하시는데, 영적인 가르침을 베푼다고 하면서 이를 바로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거꾸로 시행하고 있음은 안타까운 일이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마28:19~20)

이 말씀은 모든 민족에 관계없이 주님의 제자로 삼기 위해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희생을 통해 거듭나기 위해 세례가 먼저이고 새로운 피조물 된 하늘로부터 거듭난 그들에게 비로소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는 명령이 순차적으로 주고 있다.

왜 그럴까! 거듭나지 못한 죄인 그 자체로의 사람은 하늘의 이치를 아무리 가르쳐봐도 영적인 이해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고전2:14,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들을 받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것들이 그에게는 어리석게 보임이요, 또 그는 그것들을 알 수도 없나니 그러한 일은 영적으로 분별되기 때문이라-(요3:3 니고데모-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이런 신앙적 초보적인 단계조차 바로서지 않는다면 신앙은 혼란할 수 밖에 없다.

오늘 우리의 삶 속에 성령께서 함께 하시고 우리가 성령을 따라 행한다면 반드시 육체의 열매가 아니라 성령의 열매를 맺게 될 것이다. 이러한 삶의 증거는 반드시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함에서 만 이루어 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