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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배 전도자
요일 5:9~13 2018-06-10
또 증거는 이것이니…  
세상 모든 종교들과 다르게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가장 다른 것은 많은 증거를 갖고 있다는 것이다. 많은 종교들의 기대나 바램은 ‘이렇게 하면 그럴 것이다, 이렇게 하면 그렇게 될 것이다.’라는 막연한 가정으로 출발하지만 우리 하나님의 백성들은 수많은 증거들을 가지고 확신으로 간다는 것이 저들과 크게 다른 것이다.

오늘 본문에서 가장 빈번하게 사용된 말은 “증거, μαρτυρία (법정적으로 혹은 일반적으로)주어진 확증, 기록, 보고, 증거, 증명, (9~11, 6회)”라는 단어이다. “나 요한은 너희 형제요 예수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는 자라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를 증언하였음으로 말미암아 밧모라 하는 섬에 있었더니”(계1:9) “증언하신, μαρτυρέω, 증인이 되다, 깨우치다, 증명하다, 입증하다, 확증하다.(9~10, 2회)”

어떤 일을 시작할 때나 계획을 할 때에도 통계 즉, 검증된 증거를 가지고 시작할 때 그 일은 실패가 적다. 하나님은 여러 모양과 여러 형태로 믿음의 조상들에게 증거를 주셨다고 성경은 증언하고 있다. “옛적에 선지자들을 통하여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이 모든 날 마지막에는 아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히1:1~2)

심지어는 이 삼라만상의 피조물을 통해서 증거를 주셨기 때문에 핑계할 수 없다고까지 증거하고 있다.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 그러므로 그들이 핑계하지 못할지니라”(롬1:20) 결코 증거가 부족해서가 아니다.

무엇보다도 최종적으로는 하나님께서 직접 이 역사 속에 내려오셔서 믿을만한 증거를 주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타나는 비극을 옆에서 증거를 봤어도 의심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요14:9)

오늘 증거가 있어야 증언자가 되고 진실된 증거를 할 수 있는 증인이 될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어떤 종파의 표현이 아닐지라도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어야 한다.

어떤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일거수일투족(一擧手一投足)을 목격한 사도들만이 증인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나의 삶 속에 들어오셔서 나의 삶을 생각할 수 없는 놀라움으로 바꿔 놓으신 말씀과 성령님의 역사를 나 외에는 증언할 사람이 없다. 하나님은 죽은 하나님이 아니라 살아계셔서 그를 순종하는 사람들에게 계속 역사하시기 때문에 지속적으로 증거를 보게 되는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이다.

오늘 본문의 요한은 다소 충격적인 증거를 주고 있는 데 그것은 이 ‘증거’는 바로 하나님의 아들에 대한 증거이고 이 아들은 다시 생명과 관련이 되어있다는 증언이다.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12)

“과연 여러분들의 삶 속에 하나님의 아들이 살아 계시는가! 당신은 진정 하나님의 아들의 증인입니까?” 확실한 증거가 없는 막연한 것들에 생명을 바치는 어리석은 사람은 없다. 우리 모두에게도 각자 확실한 증거를 가진 자라야 주님의 제자들처럼 기쁘게 모든 것을 드릴 수 있을 것이다.



Ⅰ. 가장 확실한 증거는 아들에 관한 것이다.(9~10)

“만일 우리가 사람들의 증언을 받을진대 하나님의 증거는 더욱 크도다 하나님의 증거는 이것이니 그의 아들에 대하여 증언하신 것이니라,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자는 자기 안에 증거가 있고 하나님을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자로 만드나니 이는 하나님께서 그 아들에 대하여 증언하신 증거를 믿지 아니하였음이라”

‘이 성경이 쓰여진 1세기 사람들은 지금보다는 진실했을까!’ 라는 생각을 해보게 되는데 부분적인 지역을 거론하고 있기는 하지만 바울의 평가를 듣는다면 오늘과 별로 다르지 않은 것으로 여겨진다.

“그레데인 중의 어떤 선지자가 말하되 그레데인들은 항상 거짓말쟁이며 악한 짐승이며 배만 위하는 게으름뱅이라 하니”(딛1:12) 일반적으로도 “… 사람은 다 거짓되되 오직 하나님은 참되시다 할지어다 …”(롬3:4f)는 참되고 진실하신 하나님과 상대적으로 모든 사람이 거짓됨을 성경은 자주 증언한다.

그럼에도 “만일 우리가 사람들의 증언을 받을진대 하나님의 증거는 더욱 크도다 …”(9f)하셨는데 모든 말은 참이든 거짓이든 둘 중에 하나일 것이다. 그럼에도 하나님을 경외하는,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 아는, 하나님을 의식하는 사람이라면 그의 증언을 역시 참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당시의 일반적인 사람들이 진실되지 못하였기 때문에 귀중한 영적인 진리를 말씀하시려 할 때마다 “진실로 진실로”를 반복하셨던 것 같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요3:3)

다시 이 진리를 이해하거나 받아들이지 못하는 니고데모에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5)고 말씀하신다.

그러나 우리 사람은 모든 것을 꿰뚫어 보시는 하나님 앞에 이 ‘진실로’나 ‘참으로’ ‘정말로’를 쓸 필요가 없다. 그러기 전에 하나님께서는 우리 모두의 진실을 알고 계시기 때문이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진실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우리는 그분의 말씀을 또한 함부로 바꿀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 하나님의 증거는 이것이니 그의 아들에 대하여 증언하신 것이니라”(9b) 하나님께서 인류에게 증거하고 싶으셨던 증거는 바로 그의 아들에 대한 증언이라는 것이다. 우리 육신의 눈으로 뵐 수 없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아들을 세상에 보내셨고 그 아들이 이 인류를 위한 창조주 하나님의 가장 분명하고 유일한 절망의 해결책이심을 말씀하셨다.

이런 이유 때문에 서론에서 지적했던 대로 그의 모든 피조물들을 통해서 자신이 살아계심을 증거하셨지만 그 증거는 막연한 증언이 되기 때문에 역사의 마지막에 해결책으로 독생자 아들을 보내시고 그 아들을 증거하셨고 또 그 아들이 직접 증거하셨다.

사실 하나님의 선택 받은 백성들에게 성경을 통해서 수없이 증거하신 것도 바로 이 아들에 대한 증거였다.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요5:39)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자는 자기 안에 증거가 있고 하나님을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자로 만드나니 …”(10) 이 말씀은 당시의 건전하지 못한 영적인 상황 때문임을 이해해야만 하는데 바로 ‘영지주의’의 상황을 전제로 한 요한 사도의 증언이다.

그리스도의 교회는 이론과 철학의 종교가 아니라 증거의 신앙이다. 중요한 것은 그 ‘복음의 진실된 증거를 믿느냐 부정하느냐’가 관건이다. 믿음의 이치는 믿는 사람에게는 그 증거가 그 사람에게 다시 새롭고 지속적인 증거를 경험하게 하지만 부정하는 사람들에게 이 증거는 여전히 거짓증언이 되어 버리고 말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에서 바울은 귀중한 증거를 해주고 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롬1:17)

“… 이는 하나님께서 그 아들에 대하여 증언하신 증거를 믿지 아니하였음이라”(10b) 실제적으로 이 역사에 나타난 진리를 믿지 못한다면 그것을 이루신 하나님이 믿어질 리 없는 것은 당연한 이치이다.

이런 이유에서 사도 요한은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요일4:20)는 논리를 우리에게 증거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에 대한 증거를 받지 않는다면 영원히 혼란 속에 막연한 하나님을 상상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역으로 말하면 이 땅에 오신 아들의 증거를 받아 들인다면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사람들 속에서 또 다른 증거를 만들어 가실 것이다.



Ⅱ. 그 아들에 대한 증거는 바로 생명과 관련되어 있다.(11~12)

“또 증거는 이것이니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것과 이 생명이 그의 아들 안에 있는 그것이니라,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

이 내용 속에서의 증거가 중요한 이유는 그것이 사람들이 그토록 갈망하는 영원한 생명과 바로 연관되어 있다는 사실 때문이다.

바로 앞에서 “… 이는 하나님께서 그 아들에 대하여 증언하신 증거를 믿지 아니하였음이라”(10b)고 이 귀중한 증거를 사람들이 거절해 버렸지만 이 하나님 아버지의 증언이 사람들의 궁극적이고 최종적으로 갈망하는 영생의 원인이 된다고 가르친다.

“또 증거는 이것이니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것과 이 생명이 그의 아들 안에 있는 그것이니라”(11) 이 생명이 달린 증거가 다름아닌 창조주 하나님께서 죄의 저주로 비극에 죽어가는 인생들에게 영생을 허락하셨다는 증언이라는 확인이다.

이 약속 자체가 사람들의 노력이나 이치로는 이해조차 불가능한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증언하셨는데 그 생명은 다른 곳이 아닌 그의 아들 안에 있다고 말씀하신다. 당시 영지주의자들은 하나님께서 절대로 죄 된 육신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실 수 없다고 가르치고 있었기 때문에 이 선언이 결코 쉬운 것이 아니었다.

오늘도 영생과 생명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안에만 있다고 하는 것이 다른 종교인들에게는 독선처럼 들리고 일반인들에게도 이해가 어렵지만 그럼에도 이 증거가 사람의 증거가 아닌 이 일을 성취하신 하나님의 증거라는 사실에 무게를 가져야만 하고 이 우주를 있게 하신 하나님의 증거이기 때문에 거절한다면 다른 대안이 없다.

그런 이유에서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12)는 선언이 뒤따라 오는 것은 당연하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14:6)는 선언은 아버지의 만드신 이치요 사실이기 때문에 그렇게 말씀하시지 않는다면 오히려 거짓을 가르치는 것이다.

심지어는 하나님의 율법을 받고 메시야를 기다리던 이스라엘 종교지도자들에게 베드로는 이런 선언을 하고 있다.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행4:12)

창조주 하나님께서 인류에게 지속적으로 말씀해 오셨던 약속이 여럿이 아닌 하나뿐이었고 그 약속이 바로 메시야를 보내시겠다는 언약을 선택된 이스라엘에게 주셨고 마침내 이 약속이 이루어지면서 하나님의 약속은 이스라엘뿐이 아닌 온 인류를 대상하는 생명의 언약으로 확대되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택하심 에서부터 이미 약속된 것이었다.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창12:2~3)

이 역사 속에 죄인 된 사람 누구를 막론하고 하나님의 이 귀한 증거를 자신을 위한 계획이요 약속임을 믿고 그 증거가 바로 나(우리)를 위해 십자가를 지시고 죽으시고 부활하실 뿐만 아니라 이제 이 역사의 마지막에 다시 오실 주님이심을 인정하고 그분과 하나됨을 위해 세례로 거듭나고 주어진 말씀과 거듭난 사람들 속에 역사하시는 성령을 따라 행하고 산다면 하나님의 증거는 바로 이런 사람들을 위해 주어진 것이다.

최후의 성도들이 하나님께 찬양을 드림도 이것뿐임을 볼 수 있다. “큰 소리로 외쳐 가로되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있도다 하니”(계7:10) 이 하나밖에 없는 귀한 생명의 약속을 잃지 않는 여러분 모두 …



Ⅲ. 우리가 가진 생명은 바로 증인 됨이다.(13)

“내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너희에게 이것을 쓰는 것은 너희로 하여금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

믿음의 사람들의 증거는 자신 속에 영생이 있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다른 표현으로는 생명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믿음의 사람 속에 사시는 것이다. 이것이 저 유명한 바울의 고백인 갈라디아서2:20의 말씀이다.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내 안에서 사시는 것입니다. 지금 내가 살고 있는 것은 나를 사랑하시고 또 나를 위해서 당신의 몸을 내어 주신 하느님의 아들을 믿는 마음으로 사는 것입니다.”(공동)

이런 확신이 있을 때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빌1:21)는 담대하고 용기 있는 증언을 하게 되어 있다.

오늘도 안타까운 것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이 자신 안에 영생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거나 잊고 산다는 것이다. 어떤 형편이나 조건 속에서도 바울처럼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라는 의식을 할 수 있어야 한다.

요한 사도는 “내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너희에게 이것을 쓰는 것은 …”(13f)이라고 이 편지를 쓰는 이유를 우리가 읽은 마지막에 설명하고 있다. 결국 이 요한의 편지는 예수 그리스도와 관련이 없는 불신의 사람들에게 쓰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이 의식하고 알아야만 할 중요한 사실을 일깨워 주기 위해서라는 것이다.

“… 너희로 하여금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13b) 적어도 믿음의 사람이라면 이 사실을 늘 의식하며 살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을 의식하지 못하기 때문에 상황에 따라서는 다 죽어가는 세상 사람들처럼 절망하고 세상일이 좀 잘 풀리면 날아갈 듯 기뻐하고 교만해 지는 것을 본다.

결국 이 “내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너희에게 이것을 쓰는 것은 너희로 하여금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는 하나님의 증거의 절정이다. 사실 영어의 순교자[martyr(|mɑ:rtə(r)]라는 말도 μαρτυρία에서 나온 말이다. 바른 증거를 위해서는 생명 바칠 각오를 하여야 하고 주님께서 십자가를 지실 때까지도 두려워 떨던 제자들이 주님께서 부활하시고 성령이 임하신 다음에는 그야말로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의 증인으로 사는 것은 볼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이 확신을 갖는 이유도 바로 죽음을 무릅쓰는 사도들의 증거를 보기 때문이다. 바리새인들의 죽이겠다는 위협에도 불구하고 “베드로와 요한이 대답하여 이르되 하나님 앞에서 너희의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행4:19)는 증인으로서의 자세이다.

만약에 마태복음28:11~15에 돈에 매수된 군인들이 예수의 시체를 그들이 잠들었을 때 제자들이 훔쳐갔다고 거짓을 퍼뜨리던 증언이 사실이라면 절대로 목숨을 바칠 수 없을 것이다.

그리스도인이라는 또 다른 별명은 바로 그리스도의 증인이다. 사실적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희생과 부활이 그것을 믿음의 눈으로 보고 믿고 순종함으로 같은 생명의 역사가 자신 속에 일어나는 놀라운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약속은 완료형이면서 지속되는 특성을 가진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요5:24)

이 말씀에서 중요한 것은 마지막 부분에 있다.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우리의 삶의 토대가 바뀐 것이다. 세상에 무너지지 않을 영원한 바탕이나 토대는 없다.

그럼에도 우리는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다.”는 엄청난 약속을 누리고 있다. 쉽게 표현하면 ‘죽음에서 생명으로 이사를 했다’는 확신이다. OT 성경 민수기 16장에 모세와 레위 사람들에게 반감을 품고 대항하던 다단과 아비람이 섰던 곳이 땅이 그들을 삼키는 것을 보면서 “그 주위에 있는 온 이스라엘이 그들의 부르짖음을 듣고 도망하며 이르되 땅이 우리도 삼킬까 두렵다”(34)고 아우성을 친다.

진실과 믿음으로 하나님을 섬기고 순종하는 사람들의 토대는 이 세상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적어도 영혼의 씽크홀(sinkhole)있을 수 없다. 왜냐하면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나(우리)를 구원하시려고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셨다고 증언하고 계시다. 그렇기 때문에 이 하나님의 증언에는 생명이 관련되어 있고 오늘 이것을 확신하고 믿고 순종하는 자들 속에는 생명이 와 있음을 확신할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