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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배 전도자
갈 4:21~26 2018-06-17
너희가 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고,  
우리는 화가 나면 쉽게 “그래 법대로 해봐!”라는 말을 한다. 그러나 법은 분명히 좋은 것은 아니고 따뜻한 것도 아닌 차갑고 냉정한 것이다. 하나님과 인간관계는 처음부터 법으로 이루어진 관계가 아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창2:17) 이 한마디를 법인가 생각해보면 이런 법은 사실 없다.

OT의 하나님과의 관계는 분명 법과 종의 관계였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 아버지 하나님의 근본적인 의도는 아니었음을 성경은 여러 곳에서 증거하고 있다. “그런즉 율법은 무엇이냐 범법하므로 더하여진 것이라 천사들을 통하여 한 중보자의 손으로 베푸신 것인데 약속하신 자손이 오시기까지 있을 것이라”(갈3:19)

아브람에게도 약속을 주시고 특별한 법을 주시지 않으셨다. 다만 언약을 확인하시면서 할례의 언약을 주셨을 뿐이다. “너희 중 남자는 다 할례를 받으라 이것이 나와 너희와 너희 후손 사이에 지킬 내 언약이니라, 너희는 포피를 베어라 이것이 나와 너희 사이의 언약의 표징이니라”(창17:10~11)

그러나 이집트에서 430년을 지낸 후 장정만 60만명으로 나라가 되었을 때 그들을 이끌어 내신 후에 시내산에서 비로소 율법을 공포 하시는데 그 법 조항도 처음은 10개에 불과하였다.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신 이유는 사람의 죄인 됨을 깨닫게 하여 사죄를 필요로 하게 하시려고 주셨다.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롬3:20)

그럼에도 이 율법을 무작정 모든 사람에게 적용하지 않으시고 이 땅에 다시 사랑의 법을 주시기 위한 메시야를 보내시기 위하여 선택하신 이스라엘이라는 나라에게 주셨다. 율법 아래의 역사에서도 이런 이치는 더러 볼 수가 있는데 그것은 법궤를 다룸에 있어서 나타나는 예가 그 대표적인 예가 될 것이다.

레위 자손 중에서 고핫 자손들만 어깨로 법궤를 메도록 명령되어있음을 이스라엘에게는 이미 명령 되어(민4:15) 있었고 이것을 어기면 형벌을 받게 되어 있었지만 그러한 원리를 배우지 않은 다른 나라나 민족들에게는 같은 형벌을 적용하지 않으셨음을 성경에서 읽어볼 수 있다.

다윗이 예루살렘으로 법궤를 모셔 드릴 때의 유명한 사건(삼하6장-베레스웃사)은 이러한 대조를 잘 이해할 수 있게 해준다. 그럼에도 한 때 이스라엘에게서 법궤를 빼앗아 이리저리 옮기고 심지어 벳세메스까지 젖먹이는 소에게 수레를 메워 이스라엘로 되돌릴 때도 그들이 하나님을 거역하고 대적하는 것 때문에 죽긴 했어도 법궤를 만졌기 때문에 죽었다는 기록은 적어도 성경에 없다.

결국 사죄를 위한 법궤를 아무나 만지지 못하고 또 메는 사람이 정해져 있는 법 자체가 법의 살벌함을 우리에게 보여주는 두려운 예가 된다.

결론부터 말한다면 법적으로 하나님 앞에 용서받고 죽지 않을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이 역사 속에 없었다.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롬3:10)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롬3:23) “죄의 삯은 사망이요…”(롬6:23f) 이 모든 말씀이 분명한 형벌의 법이고 이 법이 그대로 적용된다면 우리 모두는 예외없이 죽고 저주받아 멸망당해야만 마땅하다.

“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에 있게 하려 함이라,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롬3:19~20)

이러함에도 법을 좋아하겠는가! 그런 이유에서 법을 들먹이다가 오히려 법의 형벌을 받을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 성경의 주님께서 오셨음에도 여전히 법조문으로 정죄하기에 바쁜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나 서기관들 이었음을 확인해 볼 수 있다.

오늘 나(우리)는 사랑의 법 아래 있는지 냉정하고 무서운 진노의 형벌의 법 아래 있는지 점검할 필요가 있다.



Ⅰ. 법과 은혜의 차이.(22~25)

“기록된 바 아브라함에게 두 아들이 있으니 하나는 여종에게서, 하나는 자유 있는 여자에게서 났다 하였으며, 여종에게서는 육체를 따라 났고 자유 있는 여자에게서는 약속으로 말미암았느니라, 이것은 비유니 이 여자들은 두 언약이라 하나는 시내 산으로부터 종을 낳은 자니 곧 하갈이라, 이 하갈은 아라비아에 있는 시내 산으로서 지금 있는 예루살렘과 같은 곳이니 그가 그 자녀들과 더불어 종 노릇 하고”

우리 모든 사람들의 관계는 사실 약속의 관계이다. 이 언약이 지켜지고 신뢰가 되면 전혀 문제가 없이 화평과 감사와 기쁨과 사랑과 자유를 누릴 수 있다. 이런 관계는 하나님과 그의 백성들의 관계뿐 아니라 부모와 자식 부부(夫婦)의 관계와 더불어 이웃의 관계와 국가와 세계로 확대될 수 있다.

그럼에도 이 문서가 아닌 언약의 관계가 깨어지면 명문화된 법조문에 의해서 그 관계를 지켜가거나 끝내게 되는데 사실 이렇게 가는 것은 비극이다. 부모와 자식간에 법조문을 들고나오고 부부간에 법을 들먹이게 되면 벌써 그 관계는 행복하지 못한 것이고 자유 하지 못하는 것이다. 오늘 우리가 본 이 말씀은 그 비유를 잘 묘사하고 있다.

“아브라함에게 두 아들이 있으니 하나는 여종에게서, 하나는 자유 있는 여자에게서 났다”(22)하였고 “여종에게서는 육체를 따라 났고 자유 있는 여자에게서는 약속으로 말미암았느니라”(23) 하였다.

첫째로 여종에게서 난 것은 ‘육체’를 따라 난 것이라고 말하고 하나는 자유를 가진 여자에게서 ‘약속’으로 말미암아 났다고 말한다. 종의 관계는 계약서에 의해서 체결된 관계다. OT에 보는 대로 종은 주인의 재산[그는 상전의 재산임이라-출21:20~21]이었기 때문에 땅문서와 같이 노비 문서에 구분이 없었다. 그러므로 육체의 법과 자유의 법의 차이를 말하고 있다.

이 사건 자체가 상징으로 율법과 약속을 의미한다고 다시 확인하고 있다. “이것은 비유니 이 여자들은 두 언약이라 하나는 시내 산으로부터 종을 낳은 자니 곧 하갈이라”(24)

그리고 다시 비유하기를 종의 법은 시내 산에서 시작하여 예루살렘에서 완성된 것을 비유로 말하고 있다. “이 하갈은 아라비아에 있는 시내 산으로서 지금 있는 예루살렘과 같은 곳이니 그가 그 자녀들과 더불어 종 노릇 하고”(25)라고 증거하고 있다.

결국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셨음에도 불구하고 유대 종교지도자들은 이 종의 법의 기준으로 사랑과 은혜의 결정체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저울질 했고 종의 삶을 벗지못하고 그들의 삶을 살았다.

여기에 귀중한 또 하나의 확신을 바울이 로마서에서 증언하고 있다. “죄가 너희를 주장하지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에 있음이라, 그런즉 어찌하리요 우리가 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에 있으니 죄를 지으리요 그럴 수 없느니라”(롬6:14~15)

법은 돌에 새겨지거나 양피지에 쓰여진 것으로 온 인류의 완전한 구원의 언약을 위하여 이 역사 속에 내려오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시기 전의 OT성경을 말하고 돌이나 종이에 새긴 것이 아닌 언약은 보이지 않는 것으로 마음에 새기는 것임을 예레미야를 통한 새 언약의 예언에서도 증거하고 있다.

“… 보라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새 언약을 맺으리라, 이 언약은 내가 그들의 조상들의 손을 잡고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에 맺은 것과 같지 아니할 것은 내가 그들의 남편이 되었어도 그들이 내 언약을 깨뜨렸음이라…, 그러나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과 맺을 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들의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렘31:31~33)

사랑과 신뢰를 바탕 한 약속은 문서가 필요 없다. 그러나 그러한 관계에도 문제가 발생하면 다시 기록된 법에 의해서 해결을 볼 수밖에 없는 것이 인간관계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은 결국 율법에 의해서가 아니라 십자가의 희생을 통한 사랑 때문이다. OT에는 법의 기초요 중심인 십계명이 있었다면 이제 그 법은 폐기되고 아들의 십자가의 희생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증거하는 사랑의 법으로 각자의 마음에 세워져 있다.



Ⅱ. 사랑의 법으로 율법은 완성되었다.(롬8:1~4)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로 말미암아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육신을 따르지 않고 그 영을 따라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

이 말씀은 참으로 감격스러운 모든 믿음의 사람들의 고백이다. 바로 앞장인 로마서 7장에서는 정죄의 법 아래서 탄식하는 바울의 안타까운 고백을 듣는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7:24) 그러나 연이어 감사의 고백을 드리는데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25f) 그리고 약간의 안타까운 고백도 있지만 연이어 감사의 탄성을 듣게 되는 것이 이 로마서 8:1~의 감격이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롬8:1) 사실이 로마서의 축소판이라고 하는 갈라디아서에서 사랑의 법인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안에 들어왔다고 하면서도 여전히 율법으로 저울질하는 사람들에게 비슷한 안타까움을 증거하고 있다.

“믿음이 오기 전에 우리는 율법 아래에 매인 바 되고 계시될 믿음의 때까지 갇혔느니라”(갈3:23) 믿음의 언약 즉, 복음이 오기전까지는 기록된 율법아래 묶여 사는 처량한 종의 삶을 살수 밖에 없었다고 가르친다. 그럼에도 그들이 자유 할 수 있는 복음의 때까지 만이라고 분명한 기준을 제시하고 있다.

그런 다음에 세례로 거듭남의 원리를 증거하고 그것이 범죄 후에 언약 된 여자의 후손을 통하여 이 과거의 정죄의 법에서 해방하게 하셨다는 약속과 함께 “너희가 만일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가 되면 율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리라”(갈5:18)는 자유의 법을 확인한다. 사실 이 말씀이 중요한 이유는 육신의 법에 있던 사람이 죄사함을 받고 성령께서 임재 하시는 성령의 사람이 되었을 때 비로소 육신의 법, 정죄의 법인 율법에서 자유 하게 됨을 반대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이제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롬8:2) 말함으로써 문서에 기록된 율법 조문과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으로 완성하신 사랑과 은혜의 법을 비교해주고 있다. 우리가 누리고 있는 복음 즉,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의 법을 여기서는 ‘생명, 성령의 법’이라고 함으로서 역시 육신과 같이 보이는 것이 아닌 보이지 않는 언약 임을 확인한다.

반면에 이 새로운 생명의 법은 거기에 매여 있던 과거의 ‘죄와 사망의 법’에서 우리를 놓아주어 자유케 하였다고 가르친다. 사실 사랑 속에는 무한한 자유와 기쁨이 있지만 법 앞은 삭막하고 무섭기까지 하다. 이런 이유에서 우리는 세상의 법이라는 것에도 걸리는 삶을 살지 말아야 하고 그렇게 사는 것이 가능한 것이 복음이 주는 능력이다.

다음의 생명의 언약인 복음은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롬8:3f) 육체의 법인 율법은 이미 그 죄의 덫에 걸려있는 우리 스스로는 빠져나올 수 없기 때문에 우리 사랑의 하나님께서 거기에 빠져나올 수 있는 역사를 이루셨다고 확인한다.

그 방법은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것이면서 죄인 된 우리 측에서의 불가능함을 아시고 친히 방법을 마련하셨는데 그것이 “…곧 죄로 말미암아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롬8:3b) 자신의 희생을 통해서 였음을 증거한다.

분명히 과거의 율법도 선택된 사람들에게 주셨고 언약은 언약이고 상호간의 약속된 법이지만 그것은 영구한 약속이 아니며 사람이 이행할 수 있는 언약이 되지 못하기 때문에 완전히 양쪽에 약속을 지킬 수 있게 하실 중보자 이신 메시야께서 오시기가지만 한정적인 문서였다.

그 언약을 주신 하나님께 약속을 어긴 문제의 회복은 언제나 짐승들의 피를 통해서만 회복이 될 수 있었지만 그 짐승의 피는 완벽하게 죄를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을 갖지 못했다. 그럼에도 귀중한 약속은 언제나 희생을 통해서만 채워질 수 있다.

물론 범죄할 때마다 죄의 대가로 죽어야 하는 짐승들의 피 흘림을 보면서 사람들은 약속을 어기는 데는 생명이 희생되어야 됨을 보고 알게 되었다. 그럼에도 그것은 영원히 해결될 수 없는 것임도 알게 되었다. “율법을 따라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써 정결하게 되나니 피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히9:22)

또 과거 법조문의 모든 약속들도 근본정신은 사랑에서 출발하고 사랑으로만 완성된다. 문서를 남기지 않고 약속이 가능한 관계가 되기 위해서는 양쪽이 모두 희생하려는 의지가 있어야 하는데 희생이나 은혜는 반드시 사랑을 바탕으로 하고 사랑으로 채워진다.

그런 원리에서 저주의 법은 하나님의 사랑의 절정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희생으로 가능하게 되었고 그 사랑과 희생을 지속하는 것이 하나님의 사랑이다. 결국 완전한 약속은 하나님의 사랑으로 채워져서 율법을 완성시키신 것이다. 이런 이유에서 한번의 십자가 희생과 사랑의 역할은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에 들어가는 순간까지 유효하고 보증 될 것이다.



Ⅲ. 사랑의 법인 언약이 영원할 것이다.(26)

“오직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자니 곧 우리 어머니라” 이 시대에 이 말씀이 건전치 못한 신앙의 사람들에 의해 잘못 사용되고 있는 것은 안타까운 사실이다.

바울은 우리 주님의 성결을 표현하기를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고후5:21)고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 라고 묘사하고 있다. 하나님이신 그리스도께서 죄를 모른다고 하는 것을 액면 그대로 이해한다면 그분의 전지전능과 어울리지 않는 표현이지만 그만큼 죄로부터 떠나 계신 주님의 거룩성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앞에서 여종과 자유 하는 여인을 비유로 묘사하였는데 땅의 예루살렘과 대조적으로 육신적으로 보이지 않는 하늘의 신령한 예루살렘 즉,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희생으로 완성하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신 영원한 영광의 처소를 비유하는 내용이다. 결국 거기에 합당한 사람은 보이는 법조문에 의해서가 아니라 신령한 법 영적인 법, 영의 이치를 따라 사는 사람들이다.

히브리서기자는 그곳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하늘에 기록된 장자들의 모임과 교회와 만민의 심판자이신 하나님과 및 온전하게 된 의인의 영들과”(히12:23) 의문에 속한 육신적인 이스라엘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장자로 하나님의 새로운 언약 속에 사랑의 아들의 나라에 들어온 “온전하게 된 의인의 영들” 신령한 사람들의 거처이다.

결국 육신의 법이요 종의 법인 율법에 의해서는 하나님 아버지와 올바른 관계를 회복할 수 없지만 아들의 희생을 자신의 것으로 믿고 순종하는 모든 사람들은 “온전하게 된 의인의 영들”이기 때문에 이 거룩하고 신령한 곳에 주인으로 표현하고 있다.

“육신을 따르지 않고 그 영을 따라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롬8:4)한 것처럼 영적인 하나님과 관계가 단절되어 영적인 교통이 끊어져버린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순종하므로 영적인 피조물로 거듭나고 하나님의 관계가 회복되어 육신의 법을 넘어서서 모든 의의 요구가 채워지는 것을 증거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영의 이치를 깨닫지 못하는 유치한 사람들은 이 복된 복음의 시대에도 과거의 유치한 종의 법을 영의 법이요 생명의 법인 복음에 섞으려고 하는 것은 실로 어리석은 것으로 영적인 무지에서 비롯된 것이다.

최초의 하나님과 그의 형상을 가진 사람과의 관계는 돌이나 양피지나 종이에 기록된 법의 관계가 아니라 보이지 않는 사랑과 언약의 관계였다. 이 원리는 역시 모든 인간관계에서도 본질적으로 마찬가지였다.

범죄한 인류를 구원하기 위한 최초의 믿음의 사람을 세우면서도 하나님께서 문서화된 법을 주시지 않으셨다. 그러나 죄의 사람이 많아지면서 좀더 많은 언약을 어기는 반란이 있게 되었고 그들을 대상으로 하나님은 구원의 메시아를 보낼 때까지 돌에 세긴 법문을 그들에게 주어 지키게 하셨지만 역시 지켜지지 못했다.

결국 문서를 남기는 것은 서로를 믿지 못해서 있어지는 조금은 신뢰가 부족한 법이다. 그러나 새 언약을 주신 후에는 언약의 당사자들에게 문서보다는 하나님의 영을 그들 속에 두셔서 마음에 세긴 하나님과의 언약을 지킬 수 있게 하셨다.

오늘 우리 마음속에 두신 법은 육신의 법이 아닌 영과 생명의 법으로 남은 약속을 우리 속에 계신 성령께서 지키도록 하실 것이다. 오늘 우리가 점검해야 할 것은 이 분명한 약속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여전히 문서화된 율법아래 여전히 머물고 싶어하는 어리석음이다.

율법은 심판 아래 머물게 하고 은혜 아래 머무는 것은 생명에 거하는 것이다. “죄가 너희를 주장하지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에 있음이라”(롬6:14) 여기에 아멘이 되어야 하고 이러한 삶의 원리는 우리 모두의 삶의 영역에 확산되어야 한다.[하나님과, 부모와, 자녀와, 이웃과, 세상과, & 무엇보다도 성도들간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