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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배 전도자
고후 5:14~19 2018-06-24
육신을 따라 알지 아니하노라,  
모든 사람들이 처음부터 거룩 하거나 영적인 사람은 없다. 본문에 보는 대로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신을 따라 알았으나”(16m)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그렇게 계속적으로 육신적인 수준에 머물러서는 안된다. 당연히 시간이 지나고 성경의 가르침을 배우고 익혔다면 반드시 영적인 사람으로 변화되어가야만 한다.

물론 사람마다 그 변화나 성장의 속도는 다를 것이다. 그러나 나고 자라는 이치는 우리의 육신의 삶 속에서도 당연한 것처럼 영적인 삶에서도 그래야만 한다. 분명히 초등학교공부를 끝냈으면 중학교 수준으로 자라야 하기 때문에 세상 교육도 반강제적으로 진학을 시키는 것이다.

그렇지 못한 자녀를 보는 부모는 그 마음이 안타까울 것이고 영적인 우리의 아버지이신 하나님께서도 아마 같은 심정일 것이라고 이해가 된다. 바울 같은 영적인 지도자가 헌신으로 세웠고 아볼로 같은 지식의 사람으로부터 가르침을 받은 고린도교회라면 과정을 거치고 배우면서 자라야 하는데 그러지 못한 모습에 바울은 안타까워 하고 있는 것을 보면 하나님은 어떠실까 하는 생각을 해보게 된다.

신앙의 사람들 중에도 상대를 괴롭히는 사람들은 언제냐 육신에 머무르는 사람들이다. 그런 이유에서 바울은 하나님의 약속으로 난 이삭과 육신적으로 난 에서를 인용하면서 이런 사실을 증거하고 있다.

“그러나 그 때에 육체를 따라 난 자가 성령을 따라 난 자를 박해한 것 같이 이제도 그러하도다, 그러나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냐 여종과 그 아들을 내쫓으라 여종의 아들이 자유 있는 여자의 아들과 더불어 유업을 얻지 못하리라 하였느니라”(갈4:29~30)

바울의 이 가르침의 요지 속에서 깨달아야 하는 것은 사람을 내쫓으라는 말이 아니라 우리 교회 속에서 육신적인 요소들을 내쫓으라는 의미이다. 영적인 것과 육적인 것이 절대로 조화로이 공존할 수 없다.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은 육체를 거스르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갈5:17)

이런 이유 때문에 영적인 요소가 자라든 성령을 소멸하면서 육신적인 요소가 주도하든 영적인 싸움은 지속될 수 밖에 없고 어느 요소가 강해가느냐 이기느냐 에 따라서 영적인 사람이거나 육적인 사람이 되어가는 것이다.

교회는 육신의 모임이 아니라 영적인 모임이고 영의 힘이 지배하는 기관이다. 그러나 사랑이 지나쳐서 영적인 것보다 육적인 배려를 많이 하다 보면 육적인 세상의 계모임과 비슷한 형태로 변할 수도 있다.



Ⅰ. 주님은 우리에게 의를 위해 살도록 죽으셨다.(14~15)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우리가 생각하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그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살아 있는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그들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그들을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이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라”

죄인이었던 우리에게 이보다 감격적인 이야기는 없다. 죄로 인하여 당연히 죽어야만 할 나(우리)를 위해 주께서 대신 죽으셨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에서 믿음의 사람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이 언제나 우리의 삶의 이유와 시작이다.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14,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15”

이런 이유에서도 매주 예배의 중심도 “너희가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그가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니라”(고전11:26) 하였다. 우리의 삶에 늘 의롭고 거룩한 삶을 도전하는 것은 바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이다. 이 놀라운 희생으로 인한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14f) 고백하고 있다.

오늘 첫 이 두절의 말씀과 가장 비슷한 내용을 데살로니가전서5:10 “예수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사 우리로 하여금 깨든지 자든지 자기와 함께 살게 하려 하셨느니라”는 말씀에서 볼 수 있다.

우리를 죄에서 자유 하게 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왕으로 고백하고 사는 사람들이다.[그리스도-왕, 선지자, 제사장] 이런 이유에서 바울은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 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롬6:6)라고 가르친다.

그런 근거로 “그러므로 너희는 죄로 너희 죽을 몸에 왕 노릇 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을 순종치 말고”(롬6:12) 이제 죄를 우리에게 왕으로 둘 수는 없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라”(롬14:8)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를 왕으로 모신 사람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14b) 한 것처럼 모두 죽은 사람들이다. 왜냐하면 우리 모두는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기 위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갈3:27) 한 것처럼 그 안에서 죽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은 주님께서 나를 위해 죽으심으로 영생을 소유한 사람이 되었으므로 이제는 늘 죽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바울도 “미쁘다 이 말이여 우리가 주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함께 살 것이요”(딤후2:11) 많은 사람들이 부활을 사모하면서 죽지 못하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 것이다. 늘 그리스도와 함께 기꺼이 죽고자 하면 부활은 그 죽은 사람에게 당연한 것이지만 죽지 못하는 사람은 아무리 부활을 원해도 불가능한 것이다.

우리를 위해 죽음의 모범을 보이신 주님께서도 당부는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막8:35) 약속하셨다. 우리 대부분의 욕심은 작은 것에도 죽지 못하면서 부활을 욕심 내는 독선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이어지는 말씀이 “그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살아 있는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그들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그들을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이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라”(15) 하여 앞 절의 내용을 반복하고 있다.

이제는 삶의 목표가 달라졌다. “…다시는 그들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모두가 인정하든 그렇지 않든 이것은 사실이다. “…오직 그들을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이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라” 나를 죽음의 저주에서 함께 살려 주시고 살게 하시는 주님을 위하여 살아야 한다.

오늘 우리가 같은 그리스도인이라면 당연히 그래야만 한다. 이것은 남이 권면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속에서 권면하시는 “강권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강권 때문이며 그것이 몇 번 정도가 아니라 “다시는 그들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라고 부정되고 있다.

이런 이유 때문에 그리스도인이란 이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사람들과 복음을 위해서 살아야 하는 사람들이다.



Ⅱ. 새로운 피조물은 무엇이든 영적으로 알아야 한다.(16~17)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어떤 사람도 육신을 따라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신을 따라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그같이 알지 아니하노라,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이 고백 앞에는 앞에서 상고한 대로 반드시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하여 죽으신 사랑의 역사가 전제가 되어 있다. ‘죽을 생명을 살려 놓았다면’이라는 전제가 그것이다. 죽을 목숨 살려 준 생명의 은인이 있다면 그 대상을 위하여 은혜에 합당한 대우와 감사를 드리는 것은 당연하다.

여기에는 제한이 없다. 다만 시작의 시기가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16ff) “이제부터는” 예수 그리스도의 나를 위한 희생이 구체적으로 나의 고백이 되고 난 그 다음부터를 말하고 있다. ‘나를 위해 십자가를 지신 주님 때문에’ 그것이 “이제부터는”이고 그 예수 그리스도의 나를 위한 대속의 죽음이 나의 가치를 바꿔 놓았다는 고백이다. 오늘 이 글을 읽는 나는 어떤가!

그러므로 이 고백은 바울의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빌3:7~9ff) 한 것처럼 가치의 변화를 의미한다.

“내 영혼이 은총 입어 중한 죄짐 벗고 보니, 슬픔 많은 이 세상도 천국으로 화하도다”(438:1) 주님의 희생으로 인한 삶의 가치 변화는 당연한 것이고 지극히 정상적인 것이다.

“어떤 사람도 육신을 따라 알지 아니하노라”(16fm) 그동안에 알아왔던 사람도 나의 유익을 위해서만 알아왔던 사람도 이제는 주님의 생명을 나눠야 할 불쌍한 한 사람으로 알게 되었다고 고백한다. 특히 여기 “어떤 사람도”라고 할 때 사람의 어떤 차이도 존재할 수 없음을 의미한다. 즉, 육신을 따라서만 관계하던 모든 사람도 이제는 영적인 이치를 따라 이해하겠다는 의미이다.

바울은 여전히 육체적으로만 신앙을 이해하려고 하는 고린도 교우들에게 “형제들아 내가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너희에게 말할 수 없어서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 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하노라”(고전3:1)고 안타까워 하는 내용도 볼 수 있다.

물론 과거에부터 영적이었던 것은 아님을 진실 되게 고백한다. 심지어는 예수 그리스도조차도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신을 따라 알았으나”라는 솔직한 진실을 털어 놓는다. 어쩌면 이 고백 이야말로 바울의 진실된 고백일 것이다. 다메섹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직접 만나기 전까지 ‘예수’는 전통 유대교를 망치는 거짓 선지자 정도로 생각했기 때문에 그를 따르는 사람들부터 잡아다가 감옥에 가두고 죽이는 일을 해왔던 바울이다.

여러분에게는 어땠는가! 마음으로나 물질적으로 가장 어려운 형편에서 그것을 해결할 방안이라고는 없을 때 친구가 소개해 준 예수, 동료가 소개하던 예수, 오로지 나의 육신의 삶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찾았던 예수가 그 문제보다도 영원한 저주로 가야할 운명을 바꿔주시기 위해서 십자가에 죽으셨다는 사실을 깨닫고 믿게 되었을 때 예수는 다른 존재로 나에게 다가오게 되어 있다.

그런 경험 때문에 또 다시 “이제부터는 그같이 알지 아니하노라”는 고백을 드리게 되는 것은 당연한 이치가 될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변한 사람은 누구든지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17f) 과거의 그런 판단이나 생각자체가 죽어 버리고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사는 경험을 하고 나니 더 이상 세상의 사람이 아닌 하늘의 사람이 되어 있는 것이다.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세상은 그대로이고 상대하던 사람들도 그대로이지만 그것을 대하는 자신이 바뀐 것이다. 세상의 사람들이나 유행은 가고 또 가지만, 나중 가야할 자신을 생각하면서 과거의 자신이 아님을 고백하는 표현이다.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나는 나이지만 이제는 과거의 자신은 아님을 고백하는 모두가 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누구든지 처음은 하나님도 예수 그리스도도 교회도 모두 육체를 위하여 찾을 수 있지만 계속 그래서는 안된다. 육체적으로 알았고 찾았어도 반드시 이런 변화의 고백이 지속적으로 있어져야만 할 것이다.

바로 앞9~10절에서 바울은 “그런즉 우리는 거하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 되기를 힘쓰노라,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하여 우리의 행위가 육체를 따른 것이든 성령을 따른 것이던 거기에 상응하는 대가를 주님으로부터 받을 것임을 말하고 있다.

그렇지 않고 바울의 안타까운 탄식처럼 “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갈3:3)라는 모습으로 가서는 안될 것이다. 믿음 생활의 모든 것을 처음에는 비록 육체를 인하여 알았고 시작하였다 할 찌라도 “이제부터는 그리스도도 교회도 어떤 사람도 육신을 따라 알지 아니하노라!” 찬양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Ⅲ. 주님과의 화목은 사람으로 확대된다.(18~19)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서 났으며 그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주셨으니, 곧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그들의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

육체로 살아 육체로 끝날 나(우리)를 위하여 죽어 주시고 그것이 나(우리)의 가치를 바꿔 놓았다면 그 변화된 인생의 삶이 어떠해야 할 것임을 마지막으로 일깨워주고 있다. 왜냐하면 무엇이든지 사실을 이끌어가지 못하고 이론으로 끝나고 만다면 그것은 유익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서 났으며…”(18ff) 우리의 변화와 새로운 삶의 원인이 하나님께서 마련하시고 이루신 것이라는 고백이다. 사람에게서는 절대로 진정으로 좋은 것은 특히 영원히 가치 있는 것은 나오지 않는다.

야고보가 말하는 것처럼 “온갖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부터 내려오나니 …”(약1:17f) 라고 선언하는 것처럼 모든 좋은 것들은 좋으신 하나님께로부터 만 나온다.

죄의 장벽으로 인하여 하나님과 불화할 수밖에 없던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18m) 하심으로써 화목의 출발을 가르친다. 이것이 복음이고 복음은 바로 화평의 복음이라고 증거한다. “만유의 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화평의 복음을 전하사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보내신 말씀”(행10:36)이라고 베드로는 최초로 구원받은 이방인인 고넬료의 가정에서 증거한다.

이제 그것이 나 개인에게서 끝나지 않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주셨으니”(18b)라 하여 나에게서 출발한 화목은 이제 나로 하여금 또 다른 하나님과 불화의 사람들을 중재해야 할 역할을 가르쳐 주고 있다.

“곧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19f) 하나님의 의도는 절대로 죄인들을 형벌하고 멸망시키시는 것이 아니다.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을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케 되기를 기뻐하심이라”(골1:20) 하셨다.

이 땅에 다시 오시는 재림의 시기를 늦추시는 이유도 “주의 약속은 어떤 이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주께서는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벧후3:9)고 말씀하고 있다.

그런 이유 때문에 이러한 귀중한 하나님 아버지의 의중과 계획이 먼저 하나님과 화목한 우리를 사용하시기를 원하신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된다.

“…그들의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19m) 죄 대로 처분하신다면 당연히 기대도 소망도 없겠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죄를 자신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로 하여금 십자가에서 감당하게 하시고 이제는 모든 죄인 된 사람들을 그 희생의 십자가 아래로 부르셨고 그의 피로 깨끗함을 받은 자들을 다시 세상에 파견하시는 것이다.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19b) 바로 앞에서 인용한 대로 “만유의 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화평의 복음을 전하사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보내신 말씀”(행10:36)이라고 한 것처럼 복음을 증거하는 말씀은 바로 화평의 복음이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의 중보자로서 복음을 전할 때 이런 자세를 가져야 한다.

베드로 사도 역시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준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벧전3:15) 라고 당부하는 이유이다. 어쩌면 우리의 복음을 전하는 자세의 여하에 따라 하나님을 두려운 형벌의 하나님으로도 전할 수 있고 형벌할 것만 찾는 예전의 ‘순사’로 왜곡시킬 수도 있다.

이렇게 하나님과 화목 된 화평의 사람이라면 사람들과의 관계에서도 반드시 화목의 복음에 합당한 삶이 되어야만 할 것이다.

우리 모두는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산 자들이다.(벧전2:24) 비록 그렇지 못할지라도 그렇게 여겨야 한다.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로 여길지어다”(롬6:11) 이것이 우리의 삶의 새로운 출발점이다.

이런 삶의 변화를 겪은 사람이라면 이제 예수 그리스도이든지 다른 사람조차도 육체 대로 알아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기 때문이다.

원수였던 우리가 그리스도의 피로 하나님과 화목 된 자들이라면 이제 그리스도안에 있는 사람이건 아직 육체 대로만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그리스도밖의 사람이든지 화목을 위해서 힘써야 한다. 하나님과 그리고 사람들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