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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배 전도자
히 6:9~12 2018-07-29
사랑, 소망, 믿음,  
바울 사도는 고린도교회를 향해 하나님께서 주신 온 갓 은사의 사용에 대하여 소개한 후에 증거하기를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 내가 또한 가장 좋은 길을 너희에게 보이리라”(고전12:31)고 말한 후에 사랑 장이라고 하는 고린도전서 13장을 소개한다.

오늘 본문에서는 신앙의 성장과 배교의 안타까움을 경계한 후에 비슷한 말투로 소개하는 내용이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이같이 말하나 너희에게는 이보다 더 좋은 것 곧 구원에 속한 것이 있음을 확신하노라”(9) 말한 다음에 고린도전서 13:13절의 믿음, 소망, 사랑을 역순(거꾸로)으로 신앙의 세 기둥을 소개하고 있는 점이 독특하다.

이렇게 신앙의 세 기둥이라고 할 수 있는 중요한 단어가 함께 나타나는 곳들은 NT성경에 자주 나타나지는 않지만 중요한 사안을 다룰 때마다 등장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된다. “우리가 너희 모두로 말미암아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며 기도할 때에 너희를 기억함은, 너희의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를 우리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끊임없이 기억함이니,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은 형제들아 너희를 택하심을 아노라”(살전1:2~4) 하여 독특한 것은 역사, 수고, 인내와 짝을 맞추어 나타내고 있다.

어쩌면 이 세 가지의 한 부분이라도 소홀해진다면 신앙을 부지해 나가는 것이 쉽지 않을 것이다.(삼 각 형태의 다리는 쉽게 넘어지지 않는다.) 믿음 소망 사랑이 순서를 달리하는 것도 분명히 의미는 있을 것이다. 데살로니가1:3의 내용은 믿음은 하나님의 인류를 사랑하신 역사에 그 사랑 받은 우리가 새로운 역사를 써가는 것이고 사랑은 반드시 자기 희생의 수고를 마다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주 예수 그리스도의 다시 오심에 대한 소망을 견지하는 믿음은 당연히 인내를 가지고 그 다시 오심을 기다리게 되는 것은 자연적인 수순이 될 것이다.

오늘의 제목과 같이 이해를 해도 역시 다르지는 않을 것이다. 사랑은 희생을 동반할 때 온전케 되고 소망은 과거보다 미래지향적이다. 그래서 다시 오실 주님의 약속에 대한 믿음으로 범사를 행하게 될 것이다.

고린도전서13장의 믿음 소망 사랑은 하나님의 영 즉, 성령의 모든 은사와 더불어 이해하게 된다.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4~7) 이 증거들 역시 사랑뿐만 아니라 믿음과 소망과 어울리는 해설들이다.

오래 참음이나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는 것은 소망을 가진 사람들에게 나타나고 “아니하며”로 반복되는 항목들은 믿음의 역사들이기 때문에 그것이 이 세상 속에서 가능한 것이다. 이렇게 보면 이 세가지 중에 한 가지가 없어도 둘이 온전케 될 수 없음을 짐작할 수 있게 한다.

어쨌거나 순서에 관계없이 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세개의 기둥을 튼튼히 가짐으로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크신 사랑을 인하여 더 많은 사람들을 사랑에 불러들이는 우리 모두가 되어야 할 것이다.



Ⅰ. 사랑은 하나님의 별명(10)

“하나님은 불의하지 아니하사 너희 행위와 그의 이름을 위하여 나타낸 사랑으로 이미 성도를 섬긴 것과 이제도 섬기고 있는 것을 잊어버리지 아니하시느니라”

사랑의 사도로 별명이 나 있는 요한은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요일4:7~8)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의 안에 거하시느니라”(요일4:16)고 하나님의 별명이 사랑 이심을 증거해주고 있다.

오늘 첫 부분에서 “하나님은 불의하지 아니하사 …”(10ff)라는 증언은 중요한 속성이면서 사랑의 하나님 만이 가질 수 있는 진실됨을 증거하고 있는 것이다. “사랑”의 독특성은 “불의”와 함께 할 수 없다는 확인이다.

사랑은 반드시 진리, 진실과만 이루어지고 나타나는 특징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므로 반대로 ‘거짓’은 ‘미움’과 관련되고 경우에 따라 사랑을 흉내 낼 뿐이지 절대로 사랑할 수 없는 것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의 속성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나중에 이들이 처해질 운명을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이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운 데로 내쫓으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리라 하니라”(마25:30, 8:12, 22:13)는 표현을 볼 수 있다.

요한 사도의 또 다른 증언은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요일4:9~10)

그러로 사랑은 단순히 자신이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그 대상을 위하여 자신을 기꺼이 주는 것임을 사랑의 정의에서 이해할 수가 있고 그래서 여기에 붙여지는 말씀이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요일4:11)라는 요한의 권면을 듣는다.

“…너희 행위와 그의 이름을 위하여 나타낸 사랑으로…”(10m) 하나님은 불의하지 않으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행한 의도나 이유조차도 알고 계시고 사랑한 것 조차가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 희생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하여 라는 진정한 사랑을 헤아릴 수 있으신 분이심을 증거하고 있다. 우리가 말하는 것이 다가 아니고 행동하는 것이 다가 아니라 그 이유까지도 아시는 사랑의 하나님이기다. 그것은 하나님 자신이 진정한 사랑을 하신 분이시기 아신다는 의미이다.

“…이미 성도를 섬긴 것과 이제도 섬기고 있는 것을 잊어버리지 아니하시느니라”(10b) 우리가 감사하고 또 소망을 가질 수 있는 이유이다. 사람들은 과거의 자신을 위해서 해 준 일을 잘도 잊어 버린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께서는 지금까지 “그의 이름을 위하여 나타낸 사랑으로 이미 성도를 섬긴 것” 즉, 과거의 사랑을 잊지 않으신다는 확신이다.

또다른 기대와 소망은 “이제도 섬기고 있는 것을 잊어버리지 아니하시느니라” 하신 것이다. 지금까지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희생 때문에 섬기지 못했다고 해도 지금부터라도 섬긴다면 절대로 잊지 않으시겠다는 약속이다.

“사랑으로 이미 성도를 섬긴 것”은 당연히 사랑의 표현이 수고를 동반하는 “사랑의 수고”(살전1:3)와 같은 표현임을 나타내고 있다.

무엇보다도 이 약속은 우리를 극진히 사랑하셔서 독생자를 내가 죽을 자리에 대신 죽게 하셔서 나를 살리신 하나님의 사랑의 주님께서 그 사랑의 바탕 위에서 주시는 약속이라는 데서 진실한 언약이며 거짓이 없으심을 바탕으로 약속하고 있기 때문이다.

결국 사랑이라는 나타나는 행위의 동기까지도 인정하시고 살피시는 사랑의 하나님이시다.



Ⅱ. 소망은 부지런함으로 표현된다(11)

“우리가 간절히 원하는 것은 너희 각 사람이 동일한 부지런함을 나타내어 끝까지 소망의 풍성함에 이르러”

기대하고 바랄 수 있는 것은 그 바라는 일을 위해서 많이 수고하고 애쓴 사람들만이 가질 수 있는 특권이다. 베짱이는 절대로 가을의 추수 때를 소망할 수 없다.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시되”(롬2:6) 말씀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히브리서를 기록하여 이스라엘사람 즉, 히브리인들뿐만 아니라 오늘 이 글을 일고 있는 우리들에게도 간절히 바라는 것은 시대를 지났을 지라도 다르지 않으며 바뀌지 않았다. 그것은 여전히 “우리가 간절히 원하는 것은…”(11ff) 이라고 우리게도 같은 도전을 주고 있다.

“…너희 각 사람이 동일한 부지런함을 나타내어…”(11m) 신앙에는 특별한 묘수가 절대로 없다. ‘부지런하지 못하면 절대로 신앙 할 수 없다.’고 말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에 동일한 부지런함이 요구되고 성경은 이를 지속적으로 주문하고 있는데 ‘부지런함’이 다른 표현으로는 무엇이라고 하는가?        그렇다, ‘열심’이다.

성경 마지막 책인 요한계시록에서조차 주님께서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계3:19) 명령하셨다. 바울도 자신의 동족들의 열심에 대해서는 인정을 하고 있다. “내가 증언하노니 그들이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올바른 지식을 따른 것이 아니니라”(롬10:2)

그럼에도 중요한 것은 무엇을 위한 부지런함 즉, 열심인가?는 대단히 중요하다. 많은 사람들은 어디에서나 자신이 원하는 것들을 실현하기위해서 열심들이다. 심지어는 교회에서까지도 그렇다. 그러나 믿음의 선진들이 보인 열심은 하나님의 뜻을 자신들의 삶 속에 실현하는데 어떤 난관 속에서도 열심이었다는 사실이다.

소망을 가질 수 있는 열심과 그렇지 못한 열심의 차이도 이 말씀은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다. “…너희 각 사람이 동일한 부지런함을 나타내어…”(11m) 여기서 ‘동일한 부지런함’이란 두 가지 정도의 이해를 가능하게 한다. 그것은 믿음의 조상들이 가졌던 동일한 부지런함이 첫째이고 둘째는 오늘 우리 모두가 다 이런 부지런함을 가지고 하나님을 섬겨야 한다는 도전이다.

또 하나는 “부지런함을 나타내어”라는 격려인데 마음에 머무르는 부지런함은 믿음에 있어서 호소력이 없다. 역시 삶으로서 나타내는, 들어내는 것이 의도적이 아닐지라도 자연스러워야 한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신앙의 삶을 원인이든, 결과적으로 든 간에 소망을 지속적으로 가지게 된다는 히브리서 기자의 신앙적 논리이다. “…끝까지 소망의 풍성함에 이르러”(11b) 우리가 이 세상에서 가지는 대부분의 소망은 끝까지 풍성할 수 없는 것이 사실이다. 어떤 바라고 기대하며 힘쓰던 일이 이루어지고 나면 소망은 지속되지 못하고 또 다른 소망을 필요로 한다.

그렇지만 믿음으로 인하여 가질 수 있는 소망은 우리를 위해 대속의 십자가를 지시고 죽으실 뿐만 아니라 부활하셔서 하나님의 우편으로 승천하시고 복음의 완성을 위하여 이 땅에 더시 오실 것을 약속하고 계시다.

우리 신앙의 사람들이 그 다시 오실 주님의 날에 이를 때까지 소망이 작아지지 아니하고 늘 풍성한 것은 물론이지만 상대적이고 사라질 이 세상의 소망과 다르게 주님께서 다시 오셨을 때에도 일한 대로(마16:27; 롬2:6:계22:12) 각 사람의 행위대로 갚으시겠다(계2:23)는 약속을 믿는 사람이라면 열심을 품고 주님을 섬긴 사람들마다 그 소망은 더욱 풍성할 것이다.

믿음의 활동량에 따라 소망의 크기는 다를 것이다. 믿음의 선진들과 같은 하나님 아버지와 그의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동일한 부지런함”이 주님의 다시 오심의 때까지 지속되는 큰 소망을 가질 수 있기를 …



Ⅲ. 믿음이 오래 참음을 가능하게 한다(12)

“게으르지 아니하고 믿음과 오래 참음으로 말미암아 약속들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을 본받는 자 되게 하려는 것이니라”

앞에서 “…너희 각 사람이 동일한 부지런함을 나타내어…”(11m) 라고 격려한 기자는 여기서는 이를 다시 부정적인 표현을 빌어 다시 한번 강하게 확인하여 “게으르지 아니하고”(12ff) 믿음의 선진들의 열심을 확인시키고 있다.

약속만 분명하다면 그것을 바라고 기대하기 때문에 그 약속을 믿고 시간이 오래 걸릴지라도 흔들림없이 변함없는 믿음을 지켜갈 수 있다. 때로 신앙의 사람들이 세상 사람의 약속을 하나님의 약속처럼 믿고 기대하다가 안타까움을 당하는 경우들이 더러 있는데(물론 서로간의 신뢰도 중요하지만) 그런 경우에는 하나님께 대한 믿음조차도 흔들리는 경우까지 생기는 것도 더러 본다.

우리는 믿음의 사람일찌라도 사람의 언약을 하나님의 약속처럼 맹신하지 말아야 한다. 사람은 결국 유한한 존재이기 때문에 때로는 진실하고 싶어도 그 어떤 약속은 지킬 수 없는 경우가 생기기도 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어떤 대상에게 조차도 심지어 자신을 신뢰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까지도 약속을 어기신 적이 없다.

그런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믿음과 오래 참음으로 말미암아 약속들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을 본받는 자 되게 하려는 것이니라”(12b)는 약속의 확실성을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누리도록하기 원하시는 말씀이다. 어쩌면 이 말씀은 그냥 건성으로 지나칠 수 있는 교훈이지만 중요한 신앙적 확신을 우리에게 확인시켜 주고 있다.

믿음의 선진들이 약속을 기업으로 받게 한 사람 측에서의 역할을 가르치고 있는데 그것이 바로 “믿음과 오래 참음”이라는 것이다. 이 두 낱말 자체가 자연적인 사람에게서는 불가능한 것들이다. “그럴 수 없느니라 사람은 다 거짓되되 오직 하나님은 참되시다 할지어다…”(롬3:4f) 성경에는 이런 표현들이 많지만 두 곳만 더 보면 “너희를 불러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와 더불어 교제하게 하시는 하나님은 미쁘시도다”(고전1:9) “너희를 부르시는 이는 미쁘시니 그가 또한 이루시리라”(살전5:24)는 표현들이다.

“오래 참음” 역시 하나님만큼 참고 기다리시는 분은 없다. 먼저는 하나님 우리 아버지의 오래 참으심을 “만일 하나님이 그의 진노를 보이시고 그의 능력을 알게 하고자 하사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을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시고”(롬9:22) 이보다 좀더 긍정적인 표현이 “주의 약속은 어떤 이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주께서는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벧후3:9) 하신 것이다.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인내를 디모데에게 증거하고 있다. “그러나 내가 긍휼을 입은 까닭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먼저 일체 오래 참으심을 보이사 후에 주를 믿어 영생 얻는 자들에게 본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딤전1:16)

이런 하나님은 약속을 따라 자신의 자녀가 된 백성들이 당연히 이러한 자신의 성품을 본받아 가지고 살기를 원하신다. 이런 ‘오래 참음’은 거듭난 자녀들 속에 성령께서 오셔서 나타나는 열매들 속에서도 당연히 거론이 되고 있는데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갈5:22~23)로 함께 묶여 있다.

본문에서 “믿음과 오래 참음으로 말미암아”라고 할 때는 믿음이 ‘오래 참음’과 함께 나타나는 것도 결코 우연은 아니다. 또 “믿음” 역시 하나님을 섬기는 은사로 바울은 나타내고 있다.

고린도전서12:8~10 하나님께서 교회들에 주신 은사들을 다루고 있는데 바로 다음절인 9f절에 “다른 사람에게는 같은 성령으로 믿음을…”이라고 함으로서 능력을 행하는 특별한 믿음을 말하고 있다고 함에도 불구하고 본문의 “믿음[πίστις]”과 꼭 같고 고린도전서13:13의 같은 낱말이 사용되고 있다.

우리 신앙하는 모든 사람들의 믿음은 세상의 어떤 변화에도 불구하고 변함이 없어야 한다. 우리는 이를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에게 서 이를 본다. “그가 백 세나 되어 자기 몸이 죽은 것 같고 사라의 태가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지 않고 믿음으로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롬4:19~20 어쩌면 사라는 조금 흔들림)

결국 하나님께서 이러한 믿음을 귀하게 보시며 이런 믿음으로 이삭을 받았고 그 계보를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까지 오셔서 우리 모두가 같은 약속 안에 거하게 되었고 이것이 마음에 두면서 “믿음과 오래 참음으로 말미암아 약속들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을 본받는 자 되게 하려는 것이니라”(12b) 하였을 것이다.

오늘 우리는 신앙의 가장 초보적이면서 근본적인 부분을 다시 다루었다. 일반적으로는 “믿음, 소망, 사랑”이라고 하지만 어쩌면 이를 거꾸로 생각하면서 또 다른 중요한 부분들을 생각할 수 있었을 것이다.

사랑은 진리이신 하나님의 속성의 하나로 그의 말씀과 뜻을 그대로 순종하고 죄를 회개하고 약속대로 거듭나서 자신의 자녀들이 된 사람들에게 함께 가지는 속성으로 거짓과는 나눌 수 없는 진리와 함께 나눠지는 거룩한 수고의 속성이다.

소망은 하나님께서 언약하신 그것을 자신의 것으로 누리고자 부지런함과 열심으로 주님께 속한 모든 것들을 위해서 최선을 다하는 사람들만이 가지는 특권이다.

믿음 역시 나의 죄와 형벌을 해결해 주시려고 사람으로 오셔서 거룩한 희생을 십자가에 이루신 대속을 믿고, 사람들의 시간으로는 헤아릴 수 없지만 복음의 완성으로 이 땅에 두번째 오실 때까지 세상에 변화에 상관없이 말씀과 약속이 반드시 이루어질 것을 확신하는 선진들의 모습을 본받는 확실한 하나님의 자녀 된 모습이다.

오늘도 내(우리) 신앙의 세 기둥을 확인하여 언약하시고 이루신 하나님 은혜의 역사에 부끄러움이 없는 주님의 재림 때까지 사랑과 소망과 믿음의 어느 부분도 모자람이 없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