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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배 전도자
마 7:1~5 2018-08-12
비판 받지 않으려면 비판하지 말라.  
사랑의 하나님께서 가장 미워하시는 것이 무엇일까! 우상숭배, 죄, 특히 자기 백성중에서 싫어하시는 것은 이중적인 삶이다. 시간마다 사람마다 장소마다 달라지는 행동이 이중(二重, 다중-多重)적인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선택된 백성이나 지도자를 막론하고 [하나의 얼굴]로만 살기를 기대하신다. 하나님께서 유일하신 분이시라는 것은 오직 한 분 뿐이라는 의미도 있지만 역시 불변하시는 분이시라는 의미도 가지고 있다. 재주 부리는 것 요령 피우는 것도 싫어하신다.

이런 지탄의 대상들은 마태복음 23장을 볼 때도 일반 백성들이 아니라 백성들에게 율법을 가르치고 지도하는 지도자들이었다. 주로 바리새인들이나 서기관들은 물론이고 성전을 자신들의 이익의 수단으로 마음대로 사용하는 사두개인들도 주님께 책망 받기는 마찬가지였다.

오늘의 말씀은 어쩌면 일차적으로는 하나님의 진리를 가르치고 선포하며 증거하는 나 같은 신앙적 지도자들에게 주시는 교훈일 것이다. 그렇다고 여러분 모두는 이 말씀에서 자유 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오늘날은 모두에게 하나님의 진리가 열려있고 가까이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에서 야고보는 “내 형제들아 너희는 선생된 우리가 더 큰 심판을 받을 줄 알고 선생이 많이 되지 말라”(약3:1)고 경계했던 것 같다. 가르치고 지도하는 사람들이 사실에 있어서는 가장 잘 안다고 하면서 실천에는 등한한 것이 사실이다.

실제로 하나님의 말씀을 가장 첫째로 순종해야하는 사람은 그 말씀을 읽고 깨닫는 자신임을 성경은 늘 가르친다. 어쩌면 성경을 가장 많이 읽고 썼던 서기관들이나 바리새인들은 그 말씀을 자신에게는 전혀 적용하려 하지 않았던 것 때문에 우리 주님께 가장 큰 책망을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주님께서 바리새인들을 책망하시면서 이를 강조하고 계시다. “또 무거운 짐을 묶어 사람의 어깨에 지우되 자기는 이것을 한 손가락으로도 움직이려 하지 아니하며”(마23:4) 하나님의 말씀은 사실 무거운 짐과 같이 이 세상에서 그 교훈과 명령을 순종하고 이행하는 것이 결코 쉽지 않다. 그런 교훈들을 백성들에게만 가르치면서 자신들은 그 계명들을 왜곡시켜서 미꾸라지처럼 빠져나오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주님께서 무서운 책망을 하셨다.

하나님과 사람들 사이에서 가장 진리에 충실하셨던 예수 그리스도야말로 이부분에서도 모범이셨다고 히브리서 기자는 증거한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히4:15) 오늘 우리가 그 주님을 순종하고 따르려 한다면 그러한 주님을 본받아야만 할 것이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언제나 말씀과 세상 사이에서 우리와 다름이 없는 도전을 받으셨지만 언제나 말씀을 순종하고 실천하는 것으로 일생 동안 사셨기 때문에 이러한 부분에서도 모범을 보이셨음을 확인할 수 있다.

주님은 말씀을 안다고 하는 지도자들은 책망하셨지만 알지 못해서 어기는 연약한 사람들에게는 언제나 한없이 너그러우셨다. 범죄하여 정죄를 당하고 주님께 왔던 모든 사람들은 한결같이 당시의 종교지도자들과 달랐던 주님 때문에 삶에 변화를 경험했음도 성경은 우리에게 잘 전달해 주고 있다.



Ⅰ. 비판과 헤아림은 우리 것이 아니다.(1~2)

“비판을 받지 아니 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너희가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

사람들이 가장 하기 쉬운 것이 무엇일까! 정치적으로 도덕적으로 비판이다. 그럼에서도 우리 주님께서는 그 쉬운 것을 하지 말라고 하신다. 왜냐하면 그것은 쉬운 것이지만 자신에게 돌아오는 가장 치명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비판하지 않는 사람은 비판 받을 염려도 적다. 어디서든지 비판으로 한번 마음이 상한 사람은 자신을 비판했던 사람을 좋게 말해주지 않는다. 이런 악순환을 우리는 정치하는 사람들에게서 가장 쉽게 볼 수 있다.

이러한 논리를 오히려 거꾸로 이해하면 누구에게든지 못한 것 보다는 잘하는 것에 칭찬을 자주 하다 보면 오히려 상대방의 입에서도 칭찬이 나오게 되는 사실적인 경험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주님께서는 이러한 원리를 가르치셨는데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마7:12)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눅6:31) 가르치셨다.

무슨 분야나 일이든지 비판을 해놓고 보면 되돌아 오는 것 역시 비판일 뿐이다. 그런 이유에서 이것 또한 그대로 삶의 지혜이다. “비판을 받지 아니 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1) 우리의 관계나 모임도 마찬가지이다. 부정적인 부분을 고친답시고 계속 지적만 하다 보면 개선되거나 돌이켜지는 것이 아니라 뒤따라 오는 결과는 역시 부정적인 원망이나 비판 뿐임을 경험하게 된다.

하나님의 능력으로 의기양양하게 이집트를 빠져나온 사람들은 어려움을 만날 때마다 불평과 함께 ‘하나님이 왜 우리를 이 광야로 끌어 내어서 이 모양으로 살게 하느냐!’고 불평하다가 사실 다 죽었다. ‘우리 하나님 아버지께서 오죽(비민이) 하실가!’ 만은 계속 자신들에게 주어진 지도자들인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고 대항하다가 광야에서 다 죽었다. 바울은 이런 사실들을 환기시키면서 “그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이 원망하다가 멸망시키는 자에게 멸망하였나니 너희는 그들과 같이 원망하지 말라”(고전10:10) 경계를 주고 있다.

이런 입장에서 비판이나 원망보다는 감사하는 자가 되라고 하는 것은 사실 하나님을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 자신들을 위해서도 필요하다. “그리스도의 평강이 너희 마음을 주장하게 하라 너희는 평강을 위하여 한 몸으로 부르심을 받았나니 너희는 또한 감사하는 자가 되라”(골3:15) 사실 비판하는 사람의 마음에는 평강이 없다.

비판과 원망을 일삼는 것은 절대로 은혜를 입은 자의 자세가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육신의 혈육이었던 야고보는 “형제들아 서로 원망하지 말라 그리하여야 심판을 면하리라 보라 심판주가 문 밖에 서 계시니라”(약5:9)

무엇보다도 우리는 하나님처럼 전후 좌우를, 보이는 곳과 보이지 않는 곳을 다 볼 수 없기 때문에 비판하는 것은 늦출수록 좋다. 육체를 가지고 죄의 속성을 가진 사람들은 사실 좋은 일에 용감한 것이 아니라 이렇게 비판하는데 용감하고 불평하는데 용감할 뿐이다. 그러나 비판은 사랑의 하나님 아버지의 성품이 아니라 어둠의 세상주관자들의 전유물이다.

무엇보다도 “너희가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2)는 두려운 경계를 들어야만 한다. 우리의 가장 흔한 모습이 바로 우리 자신의 가장 사실적인 모습이고 나중에 사랑의 주님으로부터 비판을 받지 않기 위해서는 비판하지 말아야하고 하나님의 은혜나 사랑을 저울질하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말아야 한다.

마태복음 20:1~16은 천국을 ‘포도밭에 일꾼을 들여보내는 것’으로 비유를 하는데 아침 일찍 품꾼들과 하루 한 데나리온을 약속하고 9, 12, 3, 5시 계속해서 놀고있는 사람들을 포도원에 들여 보내서 일하게 한다. 마침내 저녁 6시가 되어 주인은 일을 마친 후에 5시에 들어 와서 한시간 일한 사람에게 품삯으로 한 데나리온을 준다.

10절부터 보면 아침부터 일을 시작한 사람들이 더 받을 것으로 생각했지만 역시 한 데나리온을 주기 때문에 주인을 원망한다. “나중 온 이 사람들은 한 시간밖에 일하지 아니하였거늘 그들을 종일 수고하며 더위를 견딘 우리와 같게 하였나이다”(12)

물론 이 비유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희생의 은혜를 믿는 자들에게 주시는 구원이 신앙의 길이에 관계없고 오히려 신앙은 나중 시작한 사람이 더 잘할 수도 있다는 비유이기는 하지만 비유의 주인은 약속을 분명히 지킴에도 불구하고 지래 짐작하여 자신이 더 수고하였기 때문에 더 좋은 대우를 해 주리라고 헤아리고 자신의 헤아림에 어긋난다는 것 때문에 원망하는 모습은 부정적이기는 하지만 중요한 신앙의 경계가 된다. 나중 천국에서도 이런 일이 있을 것이다.

누가는 좀더 적극적으로 여기에 병행되는 황금률을 제시하고 있다. “비판하지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비판을 받지 않을 것이요 정죄하지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정죄를 받지 않을 것이요 용서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용서를 받을 것이요,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도 헤아림을 도로 받을 것이니라”(눅6:37~38)

여기서 ‘하지 말라!’고 하는 것은 모두 우리의 영역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역이다. 다만 ‘하라!’는 부분만이 우리가 감당해야할 부분이다. ‘헤아리지 말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저울질하고 사람의 수지타산으로 계산하려 하지 말라는 당부의 말씀이다.

우리가 죄사함 받은 것은 사람의 수지타산으로 헤아릴 수 없는 엄청난 것이다. 이것을 생각한다면 비판하고 헤아리는 일은 하나님의 영역으로 남겨드려야 할 것이다. 그렇지 못하고 비판하고 헤아리는 자세는 역시 엄청난 속죄의 은혜 받은 것과 어울리지 않는 외식이 될 것이다.



Ⅱ. 항상 자신의 영안을 깨끗케 해야한다.(3~4)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보라 네 눈 속에 들보가 있는데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하겠느냐”

이 두번째 부분도 역시 앞의 비판과 헤아림에 연결되는 내용이다. 항상 잘못된 판단은 잘 못 본 시각에 의해서 생길 수 있는 내용들이 많다. 그런 이유에서 눈이 밝아야 한다고 하는 것은 육체적이든지 영적이든지 중요한 이유이다. “눈은 몸의 등불이니 그러므로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마6:22)

우리의 영적인 눈은 대부분 세상의 보고 듣는 것들에 의존해서 비판하고 헤아리게 되는데 하나님은 우리 사람이 볼 수 없는 곳까지 보시지만 우리는 육체 속에 있는 이상 영안이 하나님과 같을 수 없다. 이런 제한된 영안을 가졌기 때문에 하나님처럼 판단할 수 없다는 데서 항상 조심해야만 한다.

그런 이유에서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3)는 말씀은 남을 비판할 것을 보았다면 나에게는 더 큰 비판을 받아야할 부분이 있을 것이라는 말씀이다. 사실 눈에 티가 들어 있다고 하는 것은 견디기 힘드는 일이다. 그런 이유 때문에 우리는 형제의 눈에 티를 뽑아 주겠다고 생각해 줄 수 있다. 그러나 형제의 눈 속에 티를 보게 되었다면 나의 눈에는 눈을 완전히 가리고도 남을 들보 같은 것이 막고 있다고 생각하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보시는 눈은 어떤 경우도 다르지 않을 뿐만 아니라 바뀌지 않으신다. 최초의 에덴에서 범죄한 아담과 하와를 긍휼로 보셨던 그 눈은 역시 오늘도 죄에 신음하는 우리와 인류를 긍휼로 보신다. 이런 긍휼과 사랑의 연민 때문에 죄를 묻기보다는 죄의 형벌을 자신이 지시기 위해서 이 우주 속에 하나밖에 없는 가장 귀한 홀로 한 분이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죽게 하신 것이다.

그러한 하나님께서 “보라 네 눈 속에 들보가 있는데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하겠느냐”(4) 말씀하시는 것은 사람의 판단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보시는 그대로를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지금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은 비판하는 그 사람의 안타까운 영적 상태를 안타깝게 보시는 것이다. 어떤 경우 성경이 아닐지라도 사람은 스스로를 볼 수 없는 것이 사실이고 그런 이유에서 자신을 보는 것보다는 항상 상대를 보고 비판하고 판단하기 쉽다.

“너희에게나 다른 사람에게나 판단 받는 것이 내게는 매우 작은 일이라 나도 나를 판단하지 아니하노니, 내가 자책할 아무 것도 깨닫지 못하나 이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지 못하노라 다만 나를 심판하실 이는 주시니라, 그러므로 때가 이르기 전 곧 주께서 오시기까지 아무 것도 판단하지 말라 그가 어둠에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고 마음의 뜻을 나타내시리니 그 때에 각 사람에게 하나님으로부터 칭찬이 있으리라”(고전4:3~5)

그런 다음 이 말씀 바로 뒤에 유명한 말을 하고 있다. “형제들아 내가 너희를 위하여 이 일에 나와 아볼로를 들어서 본을 보였으니 이는 너희로 하여금 기록된 말씀 밖으로 넘어가지 말라 한 것을 우리에게서 배워 서로 대적하여 교만한 마음을 가지지 말게 하려 함이라”(고전4:6)

우리 사람은 아무리 맡겨주신 사명을 다 행했다고 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는 것은 죄로 말미암아 당연히 영원한 저주와 슬픔을 당해야만 할 운명이었는데 영광의 하나님의 도구로 역할 할 수 있고 죽이는 일이 아니라 생명을 살리는 일을 할 수 있게 된 것 자체가 우리의 본래적으로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에서 할 일을 다 했다고 할지라도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 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가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 할지니라”(눅17:10)신 주님의 자세를 본받아야 할 존재들이다.

이런 겸손 속에서 밖으로 다른 사람의 티 묻은 것을 보기보다는 안으로 자신의 영안이 어두워서 주님의 뜻을 바로 보지 못하고 있지는 않는가 명령하신 것을 잘 행하고 있지 못하는 것은 아닌가 안타까운 마음으로 스스로를 늘 살필 때 바울을 통한 가르침이 자신의 것이 될 수 있을 것이다.

“형제들아 사람이 만일 무슨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 신령한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잡고 너 자신을 살펴보아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 만일 누가 아무 것도 되지 못하고 된 줄로 생각하면 스스로 속임이라, 각각 자기의 일을 살피라 그리하면 자랑할 것이 자기에게는 있어도 남에게는 있지 아니하리니”(갈6:1~4)

비록 형제의 범죄가 드러날 때에도 그것이 자신을 돌아보는 계기가 되고 그런 형제의 부족한 부분까지도 오히려 같이 짊어지는 것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범을 이루는 것이며 이런 자세로 믿음의 삶을 살 때 나중 주님 앞에 자랑할 것이 있을 것이라는 귀중한 교훈이다.



Ⅲ. 영적인 눈이 어두워 외식을 하게 된다.(5)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빼리라”

이런 사람을 향하여 주님은 조금은 단호한 표현을 사용하고 계시다. 다만 비판과 헤아림에 대한 경계를 주시면서 이러한 사람을 향하여 “외식하는 자여!”라는 표현은 지나친 감이 있어 보이지만 육신의 기준에서 헤아릴 문제가 아니다.

주님께서 기도를 가르치시면서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마6:12) 라고 말씀하셨고 예물을 제단에 들릴 때조차도 거리끼는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먼저임을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려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마5:23~24)

이 모두가 신앙의 기본이라고 하는 산상보훈을 통해서 말씀하신 교훈이라는 데 무게가 있고 이 제단의 예물 드림의 문제를 말씀하시기 전에 그토록 책망하시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마5:20) 증거하신 것에 더욱 경계로 삼아야할 교훈이다.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3) 말씀하시고 이들을 향하여 “외식하는 자여!” 라고 말씀하신 사실을 두려움으로 받아 들여야 할 것이다.

우리가 본래는 죄를 밥 먹듯 하던 죄의 종이었는데 자격 없는 죄인들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공로로 거룩하신 하나님 아버지의 자녀가 되었다면 그 은혜와 사랑에 가장 분명하고 합당하게 응답하는 삶을 사는 것이다.

그것은 죄의 속성을 회개한 사람답게 과거의 죄의 모습, 세상의 모습으로 비판하고 헤아리는 모습이 아니라 죽어 영원히 형벌 받아 마땅했던 우리를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으로 죄를 대신 해결하시고 부족됨에도 온전을 향한 변화를 기대하시면서 우리를 받아 주시고 용서하시는 그 아버지 하나님을 본 받아 사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이제 인내와 위로의 하나님이 너희로 그리스도 예수를 본받아 서로 뜻이 같게 하여 주사, 한마음과 한 입으로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하노라, 이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받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심과 같이 너희도 서로 받으라”(롬15:5~7)고 권면하고 있다.

각자가 신앙에 매진하겠지만 주님 다시 오실 때까지 우리는 온전치 못할 뿐이고 이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아버지는 앞으로 ‘되어 질 완전한 나(우리)’를 기대하시면서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변함없이 은혜를 베풀고 계시는데 이런 분의 자녀가 된 우리가 그 아버지를 대하는 것과 서로간의 지체를 대하는 것이 다르다면 그것이 바로 외식하는 것이라는 말씀이다.

바울은 어떤 음식을 먹을 수 있는 것과 먹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까지 “네가 어찌하여 네 형제를 비판하느냐 어찌하여 네 형제를 업신여기느냐 우리가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리라”(롬14:10) 경고하고 오히려 13절에서 “그런즉 우리가 다시는 서로 비판하지 말고 도리어 부딪칠 것이나 거칠 것을 형제 앞에 두지 아니하도록 주의하라”고 권면한다.

비판이나 헤아리는 것은 우리 일상에 가장 쉬운 것이고 흔한 것이다. 그러나 하늘에 속한 백성이라면 이렇게 육체에 속한 삶에서 거듭난 사람들이기 때문에 당연히 이러한 세상적인 모습을 버리고 하나님을 대하는 그 경건과 두려움으로 그의 백성들과 세상 사람들을 동일하게 대하는 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일관된 신앙의 삶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