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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배 전도자
엡 4:17~24 2018-08-19
오직 너희의 심령이 새롭게 되어,  
우리는 신앙의 삶을 지속하면서 ‘왜 우리는 이렇게 변화가 없고 부흥하지 못하는가!’ 탄식할 때가 더러 있다.(꼭 숫자가 부흥인가!) 환경도 이만하면 더 바랄 것이 없는 정도로 하나님께서 역사하셨는데 생각하는 것이나 삶의 모습은 변화가 없을까! 생각하곤 한다.

그러나 사람의 환경의 변화는 변화의 분기점이 될 수도 있고 도전의 기회도 되지만 그것을 바로 사용하지 못하면 변화는 기대하기 어렵다. 근본적인 변화는 환경의 변화가 아니라 심령의 변화이기 때문이다. 바울 사도는 지금 그것을 우리에게 당부하고 있는 것이다.

마치 최신 Intel 의 I7-8Gen. CPU 와 거기에 사양을 맞춘 컴퓨터에 보안 서비스가 끝나버린 Windows XP 버전을 사용하려는 것과 같다. 8세대의 컴퓨터에는 Microsoft Windows 10 Pro 정도의 소프트웨어로 구동을 해야 제 성능을 발휘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도 완전한 비유가 될 수 없는 것은 신앙의 부분에서의 성장은 세상의 진보나 발달과 전혀 다르기 때문에 이런 비유가 완전하지 못하다.

그럼에도 분명히 우리 교회의 건물은 우리 사람의 노력이나 힘으로 만들고 준비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주신 이 귀한 도구 안에서 하나님께서 거듭나게 하신 마음이나 영이 아닌 여전히 인간의 이성이나 감정과 사람이 좋아하는 것을 행하려고 하는 인간의 의지가 하나님의 뜻을 앞선다면 그것은 이런 기적을 일으키신 하나님의 뜻이나 계획에 거꾸로 가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거듭나게 하신 사람이라면 그 사람은 이 세상의 논리나 생각으로 살아가는 사람이 아니어야만 한다. 이것을 일반적으로 적용하면 여기 예배를 드리고 있는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말씀을 기뻐하고 하늘의 뜻을 우리의 현실보다 더 귀중하게 여기는 사람이어야 한다. 맞습니까!

바울은 영과 육의 논리를 말하면서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은 육체를 거스르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갈5:17)고 말하는데 예배에서는 물론이고 세상에서 조차도 항상 하나님의 성령과 말씀이 내 속에서 최종적으로 선택이 되고 이길 때 나는 비로소 바른 그리스도인이라고 할 수 있다. 맞습니까! 이것을 우리 육신적으로는 받아들이기 어려워도 이것이 바른 신앙적 논리이다.

그렇다면 내가 바른 신앙의 사람이요 그리스도인이라면 세상 이야기 보다, 더 직접적으로 세상에서 잘되는 원리보다 영혼이 잘되는 영에 속한 교훈이 현실보다 더 귀중하고 반가우며 즐거워야 한다. 그럼에도 우리가 아직 육신을 입고 있기 때문이라고는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전하는 데도 나의 생각과 판단에 반대되는 경우 오히려 그 말씀에 부정적인 반응을 보이고 있다면 나는 영의 사람 거듭난 사람이라고 할 수 없다.

우리는 이미 세상에 대하여 죽은 사람들이다. 그렇지 않다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다. 이제는 나의 육신적 생각과 감정과 이성이 다스리고 육체의 의지가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이 나를 온전히 다스려야만 한다.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롬8:9) 이 말씀이 의미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원리이다. 맞습니까! 그런 이유에서 우리의 심령이 세상에 익숙해지고 가까워 지는 것보다 늘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에 의해서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야 하고 이것은 우리 육신의 노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께 우리 모두를 늘 맞기는 삶이다.

“구워 드시든 볶아 드시든 그저 주님 원하시는 대로 하시옵소서!” 정도의 자세로 하나님의 뜻에 복종할 때 우리의 심령은 하나님의 성령의 다스리심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참으로 그렇게 하고 싶습니까!



Ⅰ. 이방인의 마음과 같이 행하지 말라!(17~19)

“그러므로 내가 이것을 말하며 주 안에서 증언하노니 이제부터 너희는 이방인이 그 마음의 허망한 것으로 행함 같이 행하지 말라, 그들의 총명이 어두워지고 그들 가운데 있는 무지함과 그들의 마음이 굳어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도다, 그들이 감각 없는 자가 되어 자신을 방탕에 방임하여 모든 더러운 것을 욕심으로 행하되”

신앙이 가장 안되고 방해를 받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거듭난 하늘의 사람이라고 하면서 여전히 과거 세상의 삶의 원리가 나를 지배하는 것이 문제이다.

바울은 이런 우리에게 이렇게 권면하고 있다.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의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졌음이라”(골3:1~3)

그렇지 못하는 것이 바로 사랑의 사람이 되지 못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 아이의 일을 버렸노라”(고전13:11) 왜, 바울이 사랑의 삶의 원리를 말씀하다가 이 말씀을 할까!

신앙에 있어서 아직도 어린아이라는 것은 ‘이방인이 그 마음의 허망한 것으로 행함 같이 행하’는 것이다. 여전히 과거 세상의 죽을 사람의 원리에 매여서 생각하고 판단하는 것이 신앙에 있어서 자라지 못한 어린아이의 상태이고 이것을 빨리 벗어 버리는 것이 신앙의 성장인데 그렇지 못한 사람들을 가르쳐 주님께서 “이와 같이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되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리라”(마20:16) 말씀하시는 것이다.

히브리서 기자도 같은 경계를 주고 있다. “때가 오래 되었으므로 너희가 마땅히 선생이 되었을 터인데 너희가 다시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에 대하여 누구에게서 가르침을 받아야 할 처지이니 단단한 음식은 못 먹고 젖이나 먹어야 할 자가 되었도다”(히5:12)

영적으로 성장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바울은 “…이제부터 너희는 이방인이 그 마음의 허망한 것으로 행함 같이 행하지 말라”(17b) 여기 ‘이방인’은 그리스도밖에 있는 세상의 원리와 육체의 법으로 사는 사람들이고 우리가 나를 위해 십자가에 못박히신 그리스도를 믿고 거듭난 삶을 사는 신앙인이라면 그들과 같은 원리로 살아서는 안된다는 경계의 가르침이다.

특히 이들의 심각성은 ⓐ‘그 마음의 허망한 것으로 행함’이 저들의 삶의 원리가 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들의 행하는 것은 모두가 약속이 있는 말씀을 따라 행한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한결같이 약속 없는 공허한 생각이나 판단이나 검증되지 않은 미신으로 행하는데 적어도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이라면 이런 허황된 삶을 사는 사람들이 아니다.

하나님의 생명 밖의 사람들의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도다’라는 안타까움이다. 그런 이유에서 그러한 가치 없는 삶을 본 받지 말아야 할 것을 당부하고 있다. “그들의 총명이 어두워지고 그들 가운데 있는 무지함과 그들의 마음이 굳어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도다”(18)

쉽게 말하면 생명 없는 삶을 살고 있는 것인데 그러한 상태를 역시 세가지 정도로 표현하고 있다. ①그들의 총명이 어두워지고, 아담과 하와가 뱀의 간교한 부추김을 듣게 되면서 하나님의 단순한 생명의 판단 조차도 흐려져서 생명을 잃게 되는 것을 볼 수 있다. 사람의 삶의 지혜는 성경 안에 있고 그런 이유에서 하나님게서는 자신의 백성들이 말씀을 알아야함을 지혜라고 가르친다.

“잠언과 비유와 지혜 있는 자의 말과 그 오묘한 말을 깨달으리라,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거늘 미련한 자는 지혜와 훈계를 멸시하느니라”(잠1:6~7)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요 거룩하신 자를 아는 것이 명철이니라”(잠9:10)

②그들 가운데 있는 무지함[ἄγνοια, 지식의 모자람, 신령한 것들의 모자람, 도덕적으로 어두운], 우리 시대에 육신적 삶의 지식의 부족함보다는 영적인 무지가 더 문제이다.[어린 아이들까지 스마트폰을 사용한다.] 하나님께서는 호세아선지자를 통하여 자신의 백성의 무지함을 탄식하신 바 있다.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6:6) 사실 하나님을 바로 알지 못하고 예배하는 것은 우상숭배와 다름이 없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탄식하신 것이다.

주님께서 직접적으로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노니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라”(요4:22)고 무지한 예배와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예배의 차이점을 지적하신 바 있다.

이렇게 신령한 것들에 무지함과 총명이 어두워짐의 결과는 마음이 굳어져버려 감각을 잃어버리게 되는 데까지 이르게 된다. ③그들의 마음이 굳어짐,[πώρωσις, 어리석음, 무감각한, 어두움, 굳어짐, (비유적으로)영적인 무지] 결국 하나님을 떠나 있는 상태가 이렇게 까지 가게 되는데 역시 바울은 로마서 1장에서 이러한 내용을 지적한 바 있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여러가지 만드신 자연 세계와 말씀을 통해서 나타내시므로 알게 해 주셨지만 그 하나님을 거역함으로 “하나님께서 그들을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버려 두(24)시고, 그들을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 두사(28)” 윤리와 도덕을 거스르고 더러운 정욕대로 행하도록 버려 두셨다는 안타까움을 보게 되는 것과 같다. 이 모든 것들이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있는 사람들에게서 나타나는 현상들이다.

믿음의 사람들은 반드시 거듭난 삶에 합당한 삶을 살아야 하는데 여전히 구원받기 이전의 상태를 계속한다면 그러한 결과는 19절에 나타나는 것이 자연스러운 모습이 될 것이다. ⓒ“그들이 감각 없는 자가 되어 자신을 방탕에 방임하여 모든 더러운 것을 욕심으로 행하되”(19)

세상을 따라가는 삶은 당연히 영적인 감각도 잃어버리고 도덕적으로도 무감각해지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수순이 될 것이다. 이것은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는 로마서 1장의 표현과 역시 무관하지 않은 현상이다.

“또한 그들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 두사 합당하지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 곧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요 수군수군하는 자요”(롬1:28~29)

이런 결과들을 보면서 이 사회가 영적이지 못한 사회일수록 비도덕적이고 비윤리적인 현상으로 가게 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임을 배우게 된다.

마지막 시대일수록 믿음의 사람들이 자신의 아들을 십자가에 희생시키면서까지 우리를 죄에서 끌어내어 성별 해주신 하나님의 삶의 이치로 살아야 할 것을 격려하고 각오해야 할 것을 확인하게 된다.

우리가 하나님의 주시는 말씀이 바로 들려지고 확신하게 되는 것도 그 말씀으로 이끌림을 받을 때만 가능하다. 우리가 이러한 삶의 원리를 팽개치고 “이방인이 그 마음의 허망한 것으로 행함 같이 행하”게 된다면 비록 하나님께서 생명의 말씀을 들려 주신다고 할지라도 ‘아멘!’이 아니라 진리와 생명의 말씀에도 오히려 분노를 일으킬 수 있다.

우리에게 하나님의 진리가 기쁘게 들려지지 않는다면 자신의 신앙상태를 점검할 필요가 있다.



Ⅱ. 진리를 따라 행하라!(20~21)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를 그같이 배우지 아니하였느니라, 진리가 예수 안에 있는 것 같이 너희가 참으로 그에게서 듣고 또한 그 안에서 가르침을 받았을진대”

믿음의 사람들은 믿지 않는 사람들의 그 마음의 허망함 같이 행하지 말라고 하고 왜 그렇게 해야하는 이유를 가르치는 것이 두번째 이다.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를 그같이 배우지 아니하였느니라”(20)

심지어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고 과거의 언약인 율법으로 돌아가는 것조차 복음을 헛되게 하고 그리스도의 희생을 헛되게 하는 것이라고 바울은 가르치고 있다.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아니하노니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갈2:21)

우리로 하여금 세상의 진리와 생명이 없는 사람들처럼 살게 하려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와 같이 수치스럽고 고통스러운 십자가를 지시지 않으셨다. 복음을 듣고 알면서도 여전히 세상의 원리, 육신의 이익을 위해서 행하고 있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헛되게 하는 것이다.

좀더 단호하게 확인을 한다. “진리가 예수 안에 있는 것 같이 너희가 참으로 그에게서 듣고 또한 그 안에서 가르침을 받았을진대”(21) 세상에 생명의 진리에 이르는 길이 있었다면, 죄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 있었다면 하나님의 아들이 그런 수치와 고통을 당하는 일은 절대로 없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복음을 안다고 하는 것 자체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만 진리와 생명이 있음을 아는 사람이고 그 안에서 생명의 능력을 지속적으로 부여 받고 있는 것인데 여전히 세상의 이치와 원리대로 산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이 그러한 사람에게는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하는 것이 되고 만다.

주님께서 직접 말씀하신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요10:10b) 것처럼 우리로 하여금 더 이상 죄와 세상에 메여 살지 않게 하려고 주님께서 희생해 주셨으므로 희생의 대가를 받은 사람답게 살 것을 당부하고 있다.



Ⅲ. 오직 심령이 새롭게 되라!(22~24)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오직 너희의 심령이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우리 믿음의 사람들에게 믿지 않는 사람들의 그 마음의 허망함 같이 행하지 말라고 경고한 후 세상의 일반사람들과 다른 삶을 살기 위해서는 반드시 거기에 합당한 삶의 원리가 있어야 하는데 그러한 세상과 육체의 방법이 아닌 하늘의 백성들에게 합당한 삶의 원리를 제공 하는 것이 마지막 다룰 신앙적 교훈이다.

첫째는 역시 부정적인 버려야할 일반 사람들의 삶의 경계 되는 모습이다.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22)

사람들이 단번에 그냥 멸망에 던져지거나 형벌을 당하지 않기 때문에 사실 죄를 짓는데 담대한 것이 사실이다. ‘이렇게 해도 안 죽는다.’거나 ‘괜찮더라!’ 하면서 점점 죄짓는데 담대해 지고 하나님과 멀어지게 된다. 사람은 누구를 막론하고 자주 하는 일이나 행동 그리고 자주 만나는 사람들과 가까워지고 익숙해 진다.

이 원리는 모든 경우에서 그렇다. 이러므로 우리는 ‘하루의 생활이 주로 누구와 함께 이루어지는가!’를 헤아려 보면 우리 삶의 결과를 이미 예측해볼 수 있다는 데서 임마누엘이 중요하다. 주님의 백성 된 나는 과연 나(우리)를 다스리시는 주님과 가까이 지내는가 아니면 주님께서 싫어하실 세상적 원리로 살아가는가 살필 필요가 있다.

여기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이 상당히 점진적으로 표현되고 있는 것이 독특하다.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은 음미해볼 필요가 있다.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약1:14~15) 세상의 모든 것들이 당장 멸망으로 떨어지게 하지 않는 것들도 조심해야 하는 이유이다.

욕심은 언제나 어두움의 유혹이며 그것은 그리스도와 관련을 갖지 않았던 과거의 옛 뱀의 유혹이며 우리의 생명으로 하여금 썩게 만드는 죄의 형벌의 이유이기 때문에 신앙의 사람들이라면 반드시 벗어 버리고 떨쳐버려야 할 어두움의 모습이다.

거기에 붙여서 당부하는 교훈은 “오직 너희의 심령이 새롭게 되어”(23)이다. 우리는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된 사람들로 새로운 피조물일하고 칭함을 받은 존재들이다. 그러나 우리는 매 주님의 날마다 새롭게 될 필요가 있는 사람들이다. 이것을 위해서 주님의 몸을 기념하는 것이 예배의 중심이다.

주님께서 요한 사도를 통하여 “그가 빛 가운데 계신 것 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요일1:7) 가르친 다음에 연이어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9)라는 사죄의 방법을 제시하시는 이유이기도 하다.

우리는 매일 매 순간 영혼의 사람으로 새롭게 되어야만 한다. 과거의 나의 경건은 더 이상 나의 것이 아니다. 우리의 육체의 세포가 매일 죽고 사는 것과 같은 원리가 우리의 심령에서도 이루어져야만 한다. 그런 이유에서 “오직 너희의 심령이 새롭게 되어”(23)이다.

그런 다음에는 세상의 육체가 아니라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24) 하나님은 매일 새롭게 하시는 분이시다. 무엇으로 새롭게 하고 거룩하게 하는가 하면 [의]와 [진리]를 통해서 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의롭게 되었지만 우리의 삶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을 통한 의를 지속적으로 힘입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희생을 묵상할 필요가 있다. 이것은 이렇게 예배를 통한 주님의 떡과 잔으로만 아니라 우리의 심령으로는 매 순간 주님의 희생을 묵상할 필요가 있다.

이것이 지속될 때 우리는 세상의 그럴싸한 사람이 아니라 하늘의 사람으로 거룩하게 지어져 가는 것이며 새사람을 지속적으로 바꿔 입는 것이다.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엡2:22)

우리가 세상에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 우리의 심령은 퇴보할 수도 있고 매일 깨끗한 새 옷을 바꿔 입듯이 새사람을 입을 수도 있다. 과거의 사람으로 되돌아 가는 삶을 지속한다면 구습에 익숙해지면서 썩어져 가고 하나님께서 지시하시는 명령을 따라 그리스도의 희생을 묵상한다면 매 순간 새 사람을 덧입을 수도 있다.

죄의 사람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거듭나는 것은 순간이지만 이것이 일평생 지속되는 것이 바로 신앙생활이다. 진정한 부흥과 능력의 힘은 보이는 것들에 있지 않고 심령의 새로워 짐에 있음을 잊지 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