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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배 전도자
잠 3:5~10 2018-08-26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우리 신앙의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이 말씀을 지체들에게 기억시키곤 한다. 그럼에도 그 실제적인 내용이나 적용에 있어서는 무딘 것이 사실이다. 우리 일상에 모든 시간과 상황 속에서 하나님을 알고 의식하는 삶은 현재의 모습과 또다른 삶을 살게 할 것임에 틀림없다. “이로써 그리스도를 섬기는 자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사람에게도 칭찬을 받느니라”(롬14:18) 그러나 깊은 의미나 사실적인 명령으로 이 말씀을 받는 것이 아니라 바리새인들처럼 자신에게 적용하려는 것 보다는 늘 다른 사람에게 이런 당부를 하곤 한다.

이런 이유에서 가볍게 말하고 지나는 모든 삶의 과제들을 진지하게 판단하고 헤아리며 점검할 필요를 느낀다. 왜냐하면 우리 하나님은 우리의 예배나 경건의 모임들에 만 움직이시는 분이 아니다. 내(우리)가 그분의 백성이요 자녀라면 우리의 일상에 함께 하시기를 바라시며 우리의 모든 삶이 좀더 아름답고 행복하기를 바라시는 분이 바로 우리의 하늘 아버지이시다.

또 어떤 특정한 시간들 속에서만 주님을 인정한다면 그분은 우리의 삶의 주인이나 왕이라고 할 수 없다. 우리의 모든 상황과 시간과 순간을 온전히 하나님 아버지께 의뢰하고 맡기는 삶이야말로 생명을 누리는 인생이 될 수 있을 것이고 이를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죄를 해결해 주신 사실을 잊어서는 안된다. 또 “영과 진리”(요4:23~24주님의 희생을 드려진 제사로 기념)의 격식을 갖춘 순서에 맞는 예배가 중요하다면 우리의 삶으로 행위로 드리는 산 제사(롬12:1~2)도 하나님은 명령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주님께서 이 역사에 예수 그리스도를 순종하며 사는 사람들을 영원으로 인도하시기 위해 다시 오실 징조들은 어느때보다 더 자주 나타나고 있다. 이런 위기이면서 영적인 승리의 기회를 놓치지 않기 위해서 오늘 우리의 주님을 섬긴다는 사실을 다시 진단해 봤으면 한다.



Ⅰ. 마음을 다해 의지하고 범사에 인정하라,(5~6)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신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

이 명령은 분명히 주님의 사랑과 은혜에 관련이 없는 세상 사람들에게 주시면 당부나 권면이 아니다. 솔로몬이 “너는” 할 때 분명 하나님을 알고 있는 이스라엘백성들을 향한 당부였다면 이것은 오늘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거듭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주시는 권면이다.

하나님께서 가장 귀한 자신의 독생자를 죄의 대가로 사용하셔서 우리를 죄로부터 구원하셨다. 그런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다하여”라는 명령은 결코 지나친 명령이 아니시다. 그러므로 “너는 마음을 다하여” 하신 명령은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그렇게 사랑해야하지 않느냐!”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

OT 율법 시대의 명령도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신6:5) 하신 것은 그만큼 자신의 사랑하시는 만큼 사랑할 것을 권면 하신 것이다. 언제나 온 마음으로 가 아니라 반쪽짜리로 사랑하고 위하는 것이 문제이다.

그런 이유에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심같이 사랑으로 응답하는 것이 사실 하나님보다 우리 자신들에게 유익이 되기 때문이다. 이런 사랑의 확신이 없다면 거기에는 항상 어두움의 세력이 틈탈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에덴에서 불순종의 죄를 범한 아담과 하와가 현재 범죄할 수 있는 오늘 우리와 같은 상태에 뱀에게 속았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러나 우리가 바르게 이해하고 경계해야 하는 이유는 그 때의 상태는 상함도 해함도 없는 희락의 동산이었고 아직 하나님의 형상이 전혀 손상 받지 않은 상태에 있을 때라는 사실을 이해한다면 왜 하나님께서 그 에덴에서 그 두 사람을 내보실 수 밖에 없으셨다는 사실을 더 잘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오늘 우리에게도 동일한 경계를 가질 수 있어야 한다. 최초로 하나님의 형상이 전혀 일그러지지 않은 완벽한 상태의 사람이 사탄의 부추김으로 범죄할 수 있었다면 영성은 회복 받았지만 여전히 죄의 도구인 육신을 입고 사는 우리는 사실 더욱 경계를 늦춰서는 안된다는 사실이다.

이런 경계를 염두 해 두고 바로 바울을 통해서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전10:12)는 경계를 주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해야할 것은 “여호와를 신뢰하”는 것이다. 우리의 모든 삶의 과제를 하나님께 온전히 맡기고 신뢰할 수 있다면 절대로 실패하는 인생이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곧잘 이러한 명령을 거꾸로 시행하는 것이 우리 삶의 일상이다.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고 하나님은 명령을 주시는데 이것을 거꾸로 적용하기가 더 쉽다. 어떻게 ‘네 명철을 의지하고 여호와를 신뢰하지 말라,’는 위험천만한 삶의 형태가 더 많기 때문에 낙담하고 절망하는 경우를 더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이어지는 당부도 역시 같은 이해를 가능하게 한다.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6) 이 말씀을 자주만 인용할 것이 아니라 바로 이해할 필요를 앞에서도 말한 바 있다.

여기 사용된 표현이 어려운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 명령도 곧잘 거꾸로 응용되고 있다. 모든 일과 상황을 대하면서 하나님을 왕으로 지혜자로 인정하기보다는 나 자신을 믿고 신뢰하는 경우가 더 많다는 것을 지적하는 것이다.

우리는 성경의 수많은 역사들을 통해서 충분히 하나님을 믿고 신뢰할 수 있는 근거들을 가지고 있으면서 실제에 있어서는 하나님 보다 자신이 더 큰 역할을 하려고 나서는 것이 문제이다. 그러면서도 여전이 입술로는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이라고 고백하고 있으니 앞뒤가 맞지 않는 모습이다.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6) 이 말씀보다도 신앙이 사실적일 수는 없다. ‘어느 때’ “범사에-모든 시간과 상황”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왕으로 주인으로 인정하고 대우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첫번째 과제이다. 우리는 예배를 드리면서는 대부분 이곳에 임재 하셔서 우리의 예배를 받고 계신 하나님을 인정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를 인정하라”는 표현은 우리가 이해하는 것 이상인 것을 알아야 한다. 여기 [인정하라, ָידַע, yadah, 본래 의미는 (직접 보아서) ‘확인하다; 부부간의 관계, 알다, 깨달음, (확실히)이해하다, 분별하다, (지식을)갖다, 존경하다 등등]의 아주 다양한 의미를 가지는 낱말이다.

그러므로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는 말씀은 이 예배에 뿐만 아니라 우리가 어떤 장소 어떤 시간 어떤 상황속에서도 예배하는 때와 동일하게 하나님의 임재를 인정하는 것을 의미하고 그럴 때 우리의 많은 삶의 부분이 달라질 것이다.

우리가 절망의 상황에서도, 최고로 기쁜 순간에도 주님께서 그곳에 계심을 인정하라는 명령이다. 심지어는 부부싸움을 할 때도 형제와 불화한 순간에도 하나님께서 그곳에 함께 계심을 알고 인정하는 것이다. 남에게 거짓말을 하고있는 순간에도 주님께서 거기에 함께 계심을 인정하는 것이다. 또, 안다고 하는 것과 인정하는 것은 차이가 있다. 막연히 주님께서 비극의 순간에 함께 하신다는 것보다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령으로 그곳에 예배 때처럼 함께 하심을 인정하는 것이다.

사실 이러고 나면 요즘 흔히 하는 표현으로 나(우리)의 사생활이 없어진다고 할 수 있는데 주님께서 어디에서나 어느 시간 속에서나 나와 함께 계심을 인정하는 것이 나의 삶을 훔쳐보고 계시다는 부담감 보다는 비교될 수 없는 약속을 누리게 된다고 하는 사실이다. 거기에 대한 약속이 분명하다.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6b)

항상 우리가 주님보다 먼저 판단하고 설치다가 대부분의 일을 망치고 마는데 어떤 시간과 상황속에서나 주님께서 알고 계시며 보고 계신다는 인정은 우리가 주님을 의식하는 것 이상으로 복된 이유는 그러한 상황과 처지를 주님께서 이끌어 가시고 지도해 주실 것이라는 엄청난 약속이다.

그러지 못해서 우리의 일을 망치게 되는데 사실 부부싸움을 할 때도 그것을 주님께서 보고 계신다는 사실을 인정한다면 극한까지 가는 싸움은 적어도 방지할 수 있을 것이고 치료되지 못할 질병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주님께서 나의 고통스러운 숨소리조차도 함께 하신다는 확신과 인정을 갖는다면 질병을 이길 확신이 생길 뿐 아니라 주님께서 그 질병을 통해서 더 나은 길로 인도하심을 확인하게 될 것이다.



Ⅱ. 자신을 의지하지 말라,(7~8)

“스스로 지혜롭게 여기지 말지어다 여호와를 경외하며 악을 떠날지어다, 이것이 네 몸에 양약이 되어 네 골수를 윤택하게 하리라”

두번째로 주시는 말씀의 흐름은 역시 그러기 위해서는 불안전한 무익한 스스로의 지혜를 버리라는 당부를 하신다. 나만큼이나 나 자신을 지혜롭게 여기는 사람은 사실 나 자신이 살고있는 현실 속에는 적어도 없다. 그럼에도 우리를 위해 피를 흘려 주신 주님께서는 “스스로 지혜롭게 여기지 말지어다 …”(7f) 어찌 보면 항상 이것이 문제가 된다.

나 자신의 확신만큼이나 위험한 것이 사실 신앙에는 없다. 이런 이유에서 하나님의 역사를 경험하고 큰 일을 하는 사람들은 한결같이 자신을 부인하고 거절하였다. 이스라엘의 초대 임금이었던 사울에게조차 사무엘이 “사무엘이 이르되 왕이 스스로 작게 여길 그 때에 이스라엘 지파의 머리가 되지 아니하셨나이까 여호와께서 왕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 왕을 삼으시고”(삼상15:17)라는 책망을 듣는 것을 볼 수 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자신을 따르는 사람들에게 주시는 첫번째 당부가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마16:24; 막8:34; 눅9:23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는 권면이셨다.

이스라엘 속에서 가문이나 학문적으로나 권위에 있어 모자람이 없었던 사울이었지만 지극히 작은 자라는 ‘바울’이라는 이름을 선택하면서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를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한 그 때에 강함이라”(고후12:9~10)는 고백 이야말로 모든 이방을 구원으로 이끈 사도 다운 증언이다.

오늘도 우리는 자기 자신을 칭찬하기에 바쁜 때가 많다. “나는 그래도 믿음이 괜찮아, 나는 꽤 괜찮은 남편(아내, 부모, 자식)이지, 나는 그래도 교회에 쓸만한 역할을 하고 있지, 나 없으면 아마 우리 교회나 가정과 나라에 어려움이 많을 거야!”

사실 이런 생각은 남을 의식해서 가 아니라 거꾸로 스스로 해 볼 수 있는 자세가 바울 같은 모습이다. ‘나의 변변치 못함 때문에 ~어려움이 많은 것이다. 그래서 주님을 더욱 의지할 수 밖에 없어!’ 이것은 스스로 좌절하라는 자학을 부추기는 것이 아니라 나의 부족함 때문에 더욱 주님을 의지하고 높이라는 당부이다.

이런 사람이 자기를 신뢰하지 않기 위해서 적극적인 대응이 당부 되고 있다. “… 여호와를 경외하며 악을 떠날 지어다”(7b) 사실 교회는 세상의 죄를 떠난 사람들의 무리이다. 이 말씀은 둘 이면서 한가지이다. 반드시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악을 떠나야 하는데 악을 떠나기 위해서는 하나님께 대한 경외감이 있어야 하기 때문에 ‘여호와≠악’은 서로는 극과 극이기 때문에 상태에 따라서는 역시 다른 결과를 가져온다.

아직도 악에 발을 담그고 떠나지 못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경외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백성들에게 쉼없이 명령하신다. 악에서 세상에서 어둠에서 죄에서 떠나라고, 그래야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 하시고 보호하시겠다고 … 그럼에도 아직도 죄에 발을 담그고 손으로는 하나님을 잡겠다고 하는 어줍잖은 신앙은 하나님께 대한 경외감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스스로 지혜롭게 여기지 말지어다 여호와를 경외하며 악을 떠날지어다”(7)라는 명령이 지켜만 진다면 거기에는 엄청난 약속이 주어지고 있으니 “이것이 네 몸에 양약이 되어 네 골수를 윤택하게 하리라”(8)

우리는 우리의 건강에 대해 관심이 많다. 하나님의 약속이 지켜 지기만 하면 우리의 근본부터 튼튼하게 되는 이치는 역시 성경에 두루 증거되고 있다. 같은 약속을 사랑의 사도 요한이 증거하고 있다.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 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요삼1:2) 그러나 안타깝게도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원하면서도 ‘네 영혼이 잘됨 같이’는 지켜지지 않아서 귀한 생명의 약속이 지켜지지 않아서 누리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스스로를 어리석은 존재로 인정하고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악에서 떠나는 것이야 말로 생명의 약속이 쏟아지는 사실적인 삶의 비결이다.



Ⅲ. 실제적으로 섬겨라,(9~10)

“네 재물과 네 소산물의 처음 익은 열매로 여호와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네 창고가 가득히 차고 네 포도즙 틀에 새 포도즙이 넘치리라”

마지막으로 우리에게 주시는 권면은 이러한 당부가 우리의 삶에 실제적이어야 함을 다시 한번 확인하시고 계시다. 모든 신앙적 가르침과 논리와 이론은 자신의 삶에 그대로 적용하지 않는다면 헛된 가르침이 되고 말기 때문에 이를 다시 확인해 주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어떤 건전치 못한 신앙집단들의 요구처럼 ‘바쳐라, 바쳐라, 모두 바쳐라!’를 주문하시는 분이 아니시다. 왜냐하면 이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바치던 그렇지 않던 이미 그분의 것이다. 하나님께서 주인 되시기 때문에 누가 현재 그것을 가지고 있던 쓰시고 싶은 대로 사용하실 수 있는 분이시다.

시편기자는 이를 확인해 주고 있다. “내가 네 집에서 수소나 네 우리에서 숫염소를 가져가지 아니하리니, 이는 삼림의 짐승들과 뭇 산의 가축이 다 내 것이며, 산의 모든 새들도 내가 아는 것이며 들의 짐승도 내 것임이로다”(시50:9~11)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신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는 명령이 실제적인 것이 되기 위해서는 그 말씀에 반응이 사실적이어야만 함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주님께서도 마태복음6:21에서 “네 보물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눅12:34)고 확인하셨다.

그러므로 “네 재물과 네 소산물의 처음 익은 열매로 여호와를 공경하라”(9)는 하나님의 명령을 들으면서 마음을 드려 하나님을 신뢰하고 범사에 그를 인정하는 것이 이론에 그치지 않고 땅에서 귀중하게 여기는 물질을 그 확신에 기쁘게 드리는 것임을 가르치는 것이다.

이 세상에서도 귀하게 생각하는 것에는 아까움 없이 투자하는 것이 사실이다. 그렇다면 영원 속에서 약속된 하나님의 언약에 당연히 실제적이어야 하는 것은 당연한 교훈이다. 그러므로 “네가 마음을 다하여 나를 신뢰하고 모든 상황에서 나를 인정한다면 그 믿음에 합당한 반응을 해봐라!”시는 확인이 이 말씀에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특히 “네 소산물의 처음 익은 열매로 여호와를 공경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은 그의 백성들에게 한결같은 당부의 말씀임을 율법 속에서 읽게 된다. 사람들은 첫 것을 귀하게 여기는 것이 사실이고 그 첫 것을 준 대상에게는 모든 것을 드릴 수 있다는 데서 이 의미를 이해할 수 있다.[첫사랑, 처음 사랑]

그렇기 때문에 “네 재물”이 먼저 거론되고 있기는 하지만 바로 이 첫 것이 가는 데에 따라 재물은 사용되고 소비할 수 있으므로 “처음 익은 열매”는 단순이 물질에 국한 되지 않고 시간과 건강과 사랑과 우리에게 요긴한 모든 것들의 첫 것을 하나님을 위해 사용할 수 있을 때 비로소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신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시는 말씀에 진정한 응답이 될 것임을 확인하는 것이다.

“그리하면 네 창고가 가득히 차고 네 포도즙 틀에 새 포도즙이 넘치리라”(10) 결국 이 말씀조차도 단순한 물질의 복을 약속하시는 것에 그치지 않음을 이해할 수 있다. 어줍잖은 너 자신의 지혜를 버리고 하나님을 실제적으로 신뢰하고 인정하여 네 마음과 세상의 보물을 그 말씀에 의지하여 드리고 사용할 수 있다면 주님의 채우심이 인생의 어디에나 차고 넘치는 풍성을 경험하게 됨을 약속하시는 언약이다.

그러므로 ‘가득히 차고 넘치리라’는 ‘창고’와 ‘포도즙’도 육신적인 것으로만 이해하고 적용할 수 있는 것을 넘어서 영육의 풍성함을 상징적으로 언약하고 계시는 것임을 확신할 수 있다.

‘창고’는 우리가 다음을 위해 보관하고 저축해 두는 것이라는 이해는 누구나 다 할 수 있는 내용이다. 우리가 하늘의 백성들이라면 세상의 재물을 저축해 두는 ‘창고’보다는 영원을 위해서 하늘에 저축할 수 있는 사람들이라면 하나님을 신뢰하고 모든 상황에서 그를 인정하는 사람들의 당연한 자세일 것이다.

성경에서 포도주를 부정적으로 표현하는 부분이 더러 있기는 하지만 긍정적으로 표현하기를 “사람의 마음을 기쁘게 하는 포도주 …”(시104:15)라거나 “포도주는 생명을 기쁘게 하는 것 …”(전10:19)을 볼 때 분명히 기쁨을 주는 것이라는 이해를 보면 “… 새 포도즙이 넘치리라”는 의미는 인생과 내생에 기쁨을 저축해 두는 것임을 이해할 수 있다. 물론 복음 속에서의 기쁨은 성령의 충만함 일 것이다.

찬송가191:1 “내가 매일 기쁘게 순례의 길 행함은, 주의 팔이 나를 안보함이요 내가 주의 큰 복을 받는 참된 비결은 주의 영이 함께 함이라, 성령이 계시네 할렐루야 함께 계시네, 좁은 길을 걸으며 밤낮 기뻐하는 것, 주의 영이 함께 함이라”

믿음의 사람들이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을 신뢰할 뿐 아니라 범사에 그를 인정하는 것이 입에서나 다른 사람들에게 당부의 말로만 사용되어서는 안될 것이다.

스스로의 지혜를 의지하지말고 하나님 아버지를 두려워하므로 온전히 악에서 떠나는 것이 근원부터 생명이 넘치게 되는 비결이다.

이러한 교훈은 이론이 아니라 나의 가장 귀한 것을 실제로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사실이 될 때 지금의 삶과 영원한 미래의 생명에 기쁨을 저축하고 쌓는 구체적인 삶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