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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배 전도자
겔 18:1~4 2018-09-02
범죄하는 그 영혼은 죽으리라.  
OT의 큰 선지서 중에 에스겔서는 좀 더 독특한 서신이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범죄로 포로되어 가 있는 땅에서 주어진 계시의 말씀이라는 데서 그렇고 약속의 땅에서 보여주신 이상이 아니라 죄의 대가를 치르는 타국에서 보여주신 이상이라는 데서도 그렇다.

그런 이유 때문에 세상에 살고있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는 더욱 더 호소력을 가지는 계시의 말씀이기도 하지만 이런 절망의 상태에 주어진 계시의 절정도 하나님의 택한 도성의 성전을 보여주시면서 생명을 회복해 주시는 것으로 결론짓는 것을 보면서 감사로 읽을 수 있다.

이 인류에 죄가 세상에 들어 오고 죽음이 자연적인 것이 되었고 현제 우리 모든 사람에게 이러한 이야기 어떻게 들릴 지 모르겠지만 태초에 하나님께서 이 우주를 창조하신 때에는 죽음은 자연적인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영원히 사는 것이 지금의 죽음처럼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모든 사람은 다 살고 싶어한다. 아니 영원히 살고 싶어한다. 이런 바램 자체가 죄가 아닌 것은 하나님께서 최초로 사람을 지을 때 그렇게 지으셨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들에게는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이 하시는 일의 시종을 사람으로 측량할 수 없게 하셨도다”(전3:11)

우리의 삶에 가장 큰 장애는 과연 무엇일까? 세속적으로나 의학, 생체학적으로는 상당히 타당한 이론들이 이미 세워져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사람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관점에서 찾아야 하는 것이 사실 정답이 될 것이다.

그럴 때 성경은 우리 이성적으로나 감정적으로 별로 행복하지는 못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죽음의 가장 근본적인 문제로 죄를 지적하신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롬3:23) 좀더 직접적으로는 “죄의 삯은 사망이요… ”(롬6:23f) 그럼에도 너무나 감사하고 황송한 것은 이 절망적인 선언 뒤에도 소망을 붙여서 말씀하고 계시다는 사실이다. “…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롬6:23b)

하나님의 속성의 일부인 죽지 않을 존재로 지음을 받은 사람이 죽게 된 이면에는 어두움의 세력의 유혹이 있었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분명히 창조주이신 하나님이나 피조물인 사람 모두가 원하거나 의도하는 바는 아닌 자연적이지 못한 비극이다.

창조 때부터 이미 이것을 아셨던 하나님은 어둠의 세력이 상상할 수도 없는 방법으로(롬11:33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 그의 판단은 헤아리지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사람을 영원히 살게 하실 장치를 마련하셨지만 그것 역시 어겨진 자연 질서를 회복하는 일이기 때문에 하나님 자신의 엄청난 희생이 아니고서는 불가능하심을 아시고 그 비극의 틈을 자신이 막으셔야 함을 알고 각오하신다.

때문에 자신의 독생자가 육체를 입으시고 만 천하에 수치를 겪고 치욕을 당하실 뿐만 아니라 최고의 고난을 당 하셔야 하는 공의를 충족시키고야 가능함을 아시고 그 안타까운 계획을 이 역사 속에 세우시고 이루셨다. 그러한 하나님 아버지의 희생으로 사실 오늘 우리가 있음을 알아야 한다.

세상은 生老病死를 자연적인 것이라 한다. 그러나 우리 창조주 하나님께는 자연스러운 것은 아니었다. 그러므로 오늘도 세상에 난 사람이 죽는 것은 부자연스러운 것이고 이미 삶을 마련하신 하나님께서 모든 인류에게 선언하시는 말씀이 “너는 그들에게 말하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니 나는 악인이 죽는 것을 기뻐하지 아니하고 악인이 그의 길에서 돌이켜 떠나 사는 것을 기뻐하노라 이스라엘 족속아 돌이키고 돌이키라 너희 악한 길에서 떠나라 어찌 죽고자 하느냐 하셨다 하라”(겔33:11)

이 부자연스러운 죽음은 죄와 사귈 때만 자연스러운 것이기 때문에 이 탄식 속에서도 유일한 안타까운 호소는 “악인이 그의 길에서 돌이켜 떠나, 돌이키고 돌이키라 너희 악한 길에서 떠나라”시는 사랑의 요청이다.



Ⅰ. 옳지 못한 속담,(1~2) “또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이스라엘 땅에 관한 속담에 이르기를 아버지가 신 포도를 먹었으므로 그의 아들의 이가 시다고 함은 어찌 됨이냐”

이것이 속담이 된 것은 하나님의 죄에 대한 형벌이 확대 해석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출애굽기20:5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나 네 하나님 여호와는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버지로부터 아들에게로 삼사 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신5:9)

그러나 이 하나님의 말씀에도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의 은혜로 우리와는 관련이 없는 계명이 되었지만 사실 형벌보다는 사상이 더 깊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음을 이해할 수 있다. 이와 반대되는 복의 약속을 이해하면 분명히 그렇다.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 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출20:6; 신5:10) 하신 것인데 여기에 비해 “아버지로부터 아들에게로 삼사 대까지”라는 표현은 일차산업시대에 당대에 사람들에게 말씀하신 비유일 뿐이다. 왜냐하면 당시에 3~4대는 함께 살았던 것을 감안하면 이 사실은 분명하다.

이와 같이 오늘 우리 속에도 전통적으로 잘못된 기준이 되어 있는 것 중에 한가지가 바로 죄는 상속받는다는 이론이다. 분명히 아담과 하와는 인류 속에 죄가 들어오도록 죄의 문을 열어 놓은 것이 사실이다. 그럼에도 분명한 것은 아담이 범한 그 죄 때문에 오늘 그의 육신의 후손으로 난 내가 죽는 것은 아님을 알아야 한다.

로마서5장은 이것을 분명히 하고 있다. “그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12) 결국 상함도 없고 해함도 없었던 에덴에서 아담은 죄가 들어올 수 있도록 죄의 문을 열어 놓았고 이 본문 자체에도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12b)고 기록되고 있다.

성경에서 ‘모든 사람이 죄를 가졌으므로’ 라든지 ‘모든 사람이 죄를 상속 받았기 때문에’ 라는 표현은 찾아 볼 수 없다. 한결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음으로” 또는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라는 기록이 있을 뿐이다.

죄를 고백하면 용서하신다는 요한일서1장에서도 “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자로 만드는 것이니 또한 그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10) 고 기록되고 있다.

그럼에도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불리는 이스라엘 백성 간에 “너희가 이스라엘 땅에 관한 속담에 이르기를”(2f) 잘못된 속담은 사용하지 않거나 없어져야 하는 것이 사람을 바르게 지혜롭게 바르게 살게 하는 교육이고 일반 도덕이다.

그럼에도 이들이 범죄로 인하여 외국에 포로로 잡혀와 있는 그때까지도 이렇게 잘못된 속담이 사용되고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내가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니 너희가 이스라엘 가운데에서 다시는 이 속담을 쓰지 못하게 되리라”(3)는 선언을 하고 계신 것이다.

안타까운 것은 몇 천년이 지난 오늘에도 일부 잘못된 신앙적 이해를 가진 사람들에 의해서 이 속담이 그대로 사용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속담의 내용인즉 “아버지가 신 포도를 먹었으므로 그의 아들의 이가 시다.”(2m) 이것은 과학적으로나 생태학적으로, 유전학적으로는 물론 어떤 논리로도 맞지 않는 이론이다. 그럼에도 이 모순된 이론이 가장 중심이 되는 영적이고 정신적 세계에 그대로 통용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우리 모든 사람은 죄를 남에게 전가하거나 핑계할 수 없다. 오늘 내가 죽는다면 그것은 하나님도 다른 사람 때문이 아니라 내가 지은 죄 때문에 죽는 것이다.



Ⅱ. 이 속담을 사용하지 말라.(3)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내가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니 너희가 이스라엘 가운데에서 다시는 이 속담을 쓰지 못하게 되리라”

무엇보다도 이 잘못된 가르침을 하나님께서 다시는 사용하지 않게 하시겠다고 단언하셨는데 아직도 이런 속담이 사용되고 있는 것을 보게 된다. 사람은 사용하지 말라고 하는 것에 더 애착을 가지는 것도 어쩌면 하나님께 대한 반항일 수도 있다.

하나님은 어떤 경우에 그것을 사람들에게 극단적인 경계를 주시기 위해서 가족을 멸하시는 예들이 하나님의 백성들을 이끄시는 가운데 본보기로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물론 그 가족들 조차도 하나님을 경외하기 보다는 하나님을 거역하는 자기 가정의 우두머리를 더 따랐을 것이기 때문에 함께 형벌을 받았을 것은 분명하다.

광야에서 고라와 다단과 아비람(민16장)이나 가나안에 들어와서는 세라의 자손 아간(수7장)이 대표적인 예가 될 것이다. 아브라함은 자신의 조카 롯이 속한 소돔과 이웃 도시들을 멸할 것이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주께서 이같이 하사 의인을 악인과 함께 죽이심은 부당하오며 의인과 악인을 같이 하심도 부당하니이다 세상을 심판하시는 이가 정의를 행하실 것이 아니니이까”(창18:25) 라고 항의 드렸고 하나님께서도 이를 받아들이시고 인정하셨음을 본다.

그런 이유에서 율법서에서부터 “아버지는 그 자식들로 말미암아 죽임을 당하지 않을 것이요 자식들은 그 아버지로 말미암아 죽임을 당하지 않을 것이니 각 사람은 자기 죄로 말미암아 죽임을 당할 것이니라”(신24:16)고 선언하고 있다.

약속의 가나안 땅에 들어와 왕국으로 발달했을 때도 하나님을 경외하는 왕들은 이것을 철저하게 순종하였음을 읽을 수 있다.

유다의 요아스의 아들 아마샤가 “왕을 죽인 자의 자녀들은 죽이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모세의 율법책에 기록된 대로 함이라 곧 여호와께서 명령하여 이르시기를 자녀로 말미암아 아버지를 죽이지 말 것이요 아버지로 말미암아 자녀를 죽이지 말 것이라 오직 사람마다 자기의 죄로 말미암아 죽을 것이니라 하셨더라”(왕하14:6; 대하25:4)는 기록을 분명히 남기고 있다.

오늘 말씀의 뒤 부분에서도 “범죄하는 그 영혼은 죽을지라 아들은 아비의 죄악을 담당치 아니할 것이요 아비는 아들의 죄악을 담당치 아니하리니 의인의 의도 자기에게로 돌아가고 악인의 악도 자기에게로 돌아가리라”(겔18:20)는 기록이 분명히 나타나고 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 사람이나 그 부모의 죄로 인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요9:3)

그러므로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성령과 더불어 그의 명령을 지키는 사람들은 절대로 하나님의 저주의 형벌을 두려워하지 않아도 된다. 우리 사람들의 한계는 늘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어떤 한계나 범위를 벗어나게 되면 쉽게 단정해 버리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비록 죄 속에 있다고 할지라도 그 사람이 아직은 죽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단정하고 정죄하는 것은 심판자이신 하나님이 아닌 이상은 조심해야할 자세이다. 반대로 진리를 순종하고 행한다고 할지라도 그 현재의 상태로 그 사람의 운명 전체를 구원으로 단정하는 것도 우리 사람의 한계를 벗어나는 것이다. 그러지 않겠고 그렇지 않기를 바라지만 그 사람이 살아있는 한 범죄 하고 은혜에서 벗어날 수도 있다는 것이 바로 이 에스겔 18장과 33장의 교훈이다.

의인이 자식을 낳았을 때도 사무엘의 집안처럼 자식은 아버지의 신앙을 본받지 않고 백성들의 평가처럼 “그에게 이르되 보소서 당신은 늙고 당신의 아들들은 당신의 행위를 따르지 아니하니 모든 나라와 같이 우리에게 왕을 세워 우리를 다스리게 하소서 한지라”(삼상8:5)

심지어 에스겔33:13에처럼 “가령 내가 의인에게 말하기를 너는 살리라 하였다 하자 그가 그 공의를 스스로 믿고 죄악을 행하면 그 모든 의로운 행위가 하나도 기억되지 아니하리니 그가 그 지은 죄악으로 말미암아 곧 그 안에서 죽으리라” 말씀하고 있다.

분명히 하나님께서 의인이기 때문에 그를 향하여 “너는 살리라” 하셨다고 할지라도 범죄하여 멸망할 가능성은 있다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을 보면 우리 사람으로서는 어느 누구에 대하여 단순한 순종이나 불 순종만으로 그 사람을 평가하는 것을 하나님조차 금하고 계신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확신이 있는가!’ 우리는 고민하게 되는데 전혀 염려할 필요가 없는 것도 이 에스겔18장과 33장이 보여주고 있는 말씀이다. “그러나 악인이 만일 그가 행한 모든 죄에서 돌이켜 떠나 내 모든 율례를 지키고 정의와 공의를 행하면 반드시 살고 죽지 아니할 것이라, 그 범죄한 것이 하나도 기억함이 되지 아니하리니 그가 행한 공의로 살리라”(21~22) 사실 이 은혜 때문에 우리 모두가 사는 것이다. “만일 악인이 돌이켜 그 악에서 떠나 정의와 공의 대로 행하면 그가 그로 말미암아 살리라”(겔33:19)

그러므로 현재에 내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의를 행하며 사는가! 불순종하며 정죄하고 사는가 하는 현재가 중요한 것이다. 각 사람은 분명히 자신의 삶의 기준이 있지만 긴장해야 하는 것은 언제 이 세상을 떠나는 것을 아무도 모른다는 사실이다.

이 반대의 논리도 역시 경고하고 있기 때문이다. “만일 의인이 돌이켜 그 공의에서 떠나 범죄하고 악인이 행하는 모든 가증한 일대로 행하면 살겠느냐 그가 행한 공의로운 일은 하나도 기억함이 되지 아니하리니 그가 그 범한 허물과 그 지은 죄로 죽으리라”(24)

그러나 죄인이 의를 행하면 그 죄가 사해지는 원리는 그냥 되는 것이 아니라 레위기의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음이라 내가 이 피를 너희에게 주어 제단에 뿌려 너희의 생명을 위하여 속죄하게 하였나니 생명이 피에 있으므로 피가 죄를 속하느니라”(17:11)는 OT율법의 원리와 복음의 완성으로 약속된 “율법을 따라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써 정결하게 되나니 피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히9:22)는 약속은 반드시 적용이 되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을 통해서만 회복이 되는 것은 바뀔 수 없는 생명의 이치이다.

우리는 당연히 죽을 죄의 사람들이었는데 예수 그리스도의 의로운 희생으로 살게 된 것이 가장 큰 기적이다.



Ⅲ. 범죄하는 그 영혼은 죽으리라.(4) “모든 영혼이 다 내게 속한지라 아버지의 영혼이 내게 속함 같이 그의 아들의 영혼도 내게 속하였나니 범죄하는 그 영혼은 죽으리라”

사실 이 말씀 자체에는 소망이 없다. 모든 생명과 영혼은 여기에 기록된 대로 아버지도 아들도 자자손손의 영혼은 다 그 권한이 하나님 아버지께 속해 있기 때문에 그 권한을 가지신 하나님 아버지 외에는 어떤 영혼에 대해서도 가타부타할 수가 없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영생 얻을 분명한 근거를 모든 죄인 된 인류에게 이미 주신 것은 사실이다.

여기 “범죄하는 그 영혼은 죽으리라”할 때 “영혼נֶפֶשׁ,, nephesh 창2:7, (호흡하는)생물, 생명력, 신체, 숨, 생물, 욕망, 혼령, 갈망 soul, life, person, heart, ]” living soul-KJV, living being-NKV living being-NASB]은 본래적으로는 죽을 수 없는 존재이다.

그러므로 거룩하신 하나님과 연결되어 그분으로부터 계속 생명을 부여 받는 상태의 신앙은 단순히 어떤 명령된 과정 하나를 완성하거나 거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이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요17:3)

다시 말하면 [영생]은 계명의 한 조항을 지키고 거쳤기 때문이 아니라 주어진 삶 속에 하나님의 아들의 대속의 피의 효력이 역사 되는 삶, 세상의 죄와 정죄의 삶의 이치가 바뀌어서 하나님을 의식하며 행하는 삶이라고 할 수 있다.

성경에서 영생을 찾아보면 “헐몬의 이슬이 시온의 산들에 내림 같도다 거기서 여호와께서 복을 명령하셨나니 곧 영생이로다”(시133:3)라고 기록하고 있는 것이 OT성경에 기록된 영생이다.

영생이라는 말 자체가 사람에게 보다는 본래적으로 하나님께 해당되는 말이다. 이스라엘의 죄의 형벌을 위임 받았던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 조차도 이 사실을 깨닫지 못했던 것 같다. 왜냐하면 바벨론의 권세와 영광을 마치 자신이 만든 것처럼 잘못 생각했다가 한 때 마치 짐승과 같은 삶을 산 후에야 이 사실을 깨달았다고 고백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기한이 차매 나 느부갓네살이 하늘을 우러러 보았더니 내 총명이 다시 내게로 돌아온지라 이에 내가 지극히 높으신 이에게 감사하며 영생하시는 이를 찬양하고 경배하였나니 그 권세는 영원한 권세요 그 나라는 대대에 이르리로다”(단4:34)고 고백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영생”이라는 것 자체가 이 우주 속에 존재하는 어떤 것에도 적용될 수 없는 이 우주의 창조주 되시는 하나님께만 쓰여질 질 수 있는 그야말로 유일한 것이었다. 그런데 그것이 역시 유일하게 오직 그분의 형상을 가진 사람에게만 허용되게 되었다.

우주 창조의 마지막 여섯째 날에 사람을 모든 피조물과는 다르게 특별하게 만드시고 그 자신의 형상을 가진 피조물에게 이 하나님께만 가능한 용어를 주셨다.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נֶפֶשׁ] 되니라”(창2:7)

그럼에도 이 귀한 것을 시샘한 사탄은 사람으로부터 이것을 잃게 만들었고 이 “[נֶפֶשׁ, nephesh]”를 잃게 된 사람은 다른 모든 피조물들과 같은 존재로 전락되고 말자 하나님은 그것을 찾아 주시기 위한 계획을 수천 년 동안 시행하셨고 모든 날 마지막에 자신의 독생자를 십자가에 죽이심으로 완성하셨고 이왕에 회복된 이 생명을 모든 사람이 누리기를 원하신다. 바로 이 독생자를 가진 사람이 생명 곧, 영생을 가진 사람이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요17:3) 그러므로 영생은 어떤 단계나 길이에 그치지 않고 분명히 삶의 질의 변화이다. 그런 이유에서 영생의 가진 자의 삶은 일반 사람들과 다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