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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배 전도자
요 8:44~47 2018-09-09
진리가 무엇이냐?  
요18:37~38 “빌라도가 이르되 그러면 네가 왕이 아니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네 말과 같이 내가 왕이니라 내가 이를 위하여 태어났으며 이를 위하여 세상에 왔나니 곧 진리에 대하여 증언하려 함이로라 무릇 진리에 속한 자는 내 음성을 듣느니라 하신대, 빌라도가 이르되 진리가 무엇이냐 하더라 이 말을 하고 다시 유대인들에게 나가서 이르되 나는 그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하였노라”

역사 속에서 그래도 역시 진리를 가장 많이 거론해온 사람들은 철학자들일 것이다. 여기 빌라도가 물었던 “진리가 무엇이냐?”고 예수 그리스도께 물었지만 예수께서 여기에 답변하시지 않은 것으로 본문은 진행이 된다. 사실 세속적인 정치욕에 사로잡혀 있는 로마의 총독 빌라도에게 아무리 [진리]를 설명하신다고 할지라도 이해하지 못할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

그렇다고 [진리]는 대단히 높은 지식 수준의 사람들만이 이해할 수 있는 철학자들의 전유물이 아니다. 우리에게 가장 일반적이고 가까운 [진리]를 묻는다면 무슨 대답을 할 수 있을까? ‘사람은 죽는다.’ 우리 삶에 있어서 가장 비극적이면서 일반적인 진리는 ‘사람은 태어나면 죽는다.’라고 답변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역사 속에 수많은 사람들이 보이지도 않는 [진리]라는 것을 찾으려 하고 결국 그걸 찾다가 일생을 다 보내고 결국 허탈한 마음으로 인생을 마감하는 사람들도 더러 있었다. 도대체 [진리]가 무엇이길래 그렇게 사람들은 모형도 없는 그것을 그렇게도 사모하고 애타게 찾는가!

그러나 사실 [진리]는 아직 문화의 발전을 전혀 맛보지 못한 삼수갑산(三水甲山)의 농부도 나름대로의 자연의 이치나 계절의 변화에 있어서는 어쩌면 문명의 첨단을 걷는 도회지의 지식인이라고 하는 사람들보다 더 지혜로울 수 있다.

대개 신앙하는 종교적인 사람들이 더 깊은 [진리]를 알고자 하는 그런 유형의 사람들이 더 많은 것이 사실이다. 그럼에도 성경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진리를 논하고 대화하신 사람들을 볼 때 꼭 높은 지식이나 도덕 수준의 사람들이 아니셨던 것이 일반적이었다. 주님께서는 당시의 학문이나 덕목이나 철학의 높은 경지의 사람들과 진리를 논하고 대화하신 것이 아니라 인간적으로 볼 때는 별 볼일 없는 사람들과 진리를 논하셨기 때문이다.

마치 신령한 예배를 말씀하신 요한복음 4장의 대화에서도 도덕, 윤리도 모르는 천한 사마리아 여인이었고 신령한 것이라고는 모르는 사람들과 진리를 말씀하는 오늘 본문의 사람들도 그렇고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에도 정치적 이권에만 눈이 먼 빌라도에게 진리를 말씀하시고 계시는 곳에서도 그렇다.

이런 상황들을 헤아려 보고 우리 주님께서 절대로 어리석은 사람이 아니라고 볼 때 진리를 이해할 수 있는 사람들이 어떤 높은 수준의 사람들만이 아니라는 판단을 해보게 된다.

쉽지 않은 과제가 되겠지만 이 역사상에서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요14:6m)이라고 선언한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아무도 없었고 우리가 그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선언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 진리는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하지 안느냐 생각이 된다.

차제에 붙여서 말하고 싶은 것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선언하실 때 이 말씀 자체에도 귀중한 이치를 이해하게 되는데 그것은 중간에 말씀하신 이 진리가 인생의 길과 생명과도 관련을 가지고 있음을 일깨워 주심도 깨달아야만 할 것이다.

또 우리가 성경 속에서만 진리를 말하고 이해 하려할 때 사람들은 독선적 이라고 욕할 수도 있음을 각오할 수 밖에 없다. 그럼에도 이 역사 속에 진리를 찾는 그 수를 헤아릴 수 조차 없이 많은 사람들이 명쾌한 해답을 얻었다면 모르겠지만 적어도 아직도 진리에 대한 갈증이 철학을 통해서도 해결되지 않았음을 볼 때 자신이 곧 진리라고 선언하신 그분을 좀더 자세히 알 필요가 있다.

아니 오히려 성경 속에서는 고난과 역경의 인생을 살고, 심지어는 육신의 목숨을 빼앗기면서까지 행복하게 생을 마치면서 진리에 만족했던 역사 속의 수많은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들이 성경의 표현대로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히12:1f) 라는 증언을 무시할 수가 없다.

당시 유대의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자신들의 종교와 정치적인 대적이라 생각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죽이려고 당시의 로마의 총독이었던 빌라도에게 최후의 사형언도를 부탁하려고 예수님을 관정까지 끌고 갔을 때 빌라도는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요18:33) 묻자 주님께서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36) 말씀하신다.

빌라도가 다시 “그러면 네가 왕이 아니냐 …”(37f)라고 다시 묻자 주님께서 “… 네 말과 같이 내가 왕이니라 내가 이를 위하여 태어났으며 이를 위하여 세상에 왔나니 곧 진리에 대하여 증언하려 함이로라 무릇 진리에 속한 자는 내 음성을 듣느니라”(37b) 말씀하신다.

오로지 육신의 안일과 자신의 정치적 권좌를 잃지 않으려는 빌라도가 진리에 대해서 증언하러 오셨고 진리에 속한 자는 주님의 말씀을 들을 것이라고 말씀하시자 어떤 표정이었지 는 모르지만 주님께 되물은 질문이 “진리가 무엇이냐?”고 묻는 것을 볼 수 있다. 빌라도는 나름대로 총독의 자리를 지키는 수완과 방법으로 전혀 죄를 찾을 수 없는 예수 그리스도를 죽음에 내 주면서까지 자신의 자리를 지키려 했지만 진정 인생의 가치나 목적 같은 것은 깊이 생각해 보지도 못한 사람이었지만 우리 주님은 이런 사람에게 까지도 진리를 가르치셨다면 오늘 이 혼란의 세대를 사는 우리들도 충분히 고민해볼 필요가 있다.



Ⅰ. 진리가 무엇인가?

사실 사람들은 진리를 이야기 하려고 하면 대단히 철학적이며 아무나 다룰 수 없는 아주 고상한 주제로 짐작해 버리고 ‘나 같은 사람에게 그런 것은 묻지도 말고 따지지도 말라!’는 식으로 반응하는 것이 대부분이다. 그런데 우리는 이미 앞에서도 우리 주님께서 아주 평범한 사람들에게도 진리를 가르치시고 말씀하셨음을 말한 바 있다고 하였다.

그렇지만 또 다른 우려는 전제나 거창하게 진리의 제목을 내걸어 놓고 용두사미(龍頭蛇尾)처럼 부정적인의미로 ‘그러면 그렇지 뭐 또 다른 것이 있을까!’라고 낙심하게 될까 마음 한 구석이 안타깝기도 하다. 오늘은 우리가 신앙적으로 알고있는 일반적인 이론보다는 좀더 가까운 이해를 나눌 수 있었으면 한다.

쉽게 진리라 하면 [참眞 다스릴理]는 한자 적이고 사전적인 의미를 쉽게 말하게 된다.

먼저는 OT성경에서 사용하는 [진리]라는 단어와 주변적인 상황들을 이해하고 복음 속에 사용된 의미들을 이해하는 쪽으로 진행을 해보고자 한다.

OT성경에서는 사전적인 의미가 항상 다른 중요한 하나님의 성품들을 표현하는 표현들과 함께 사용되고 있는 특징들을 볼 수 있다. “내가 주의 공의를 내 심중에 숨기지 아니하고 주의 성실과 구원을 선포하였으며 내가 주의 인자와 진리를 많은 회중 가운데에서 감추지 아니하였나이다”(시40:10) “그가 하늘에서 보내사 나를 삼키려는 자의 비방에서 나를 구원하실지라 하나님이 그의 인자와 진리를 보내시리로다”(시57:3)

위의 두 곳의 시편의 말씀 속에는 항상 [진리]가 “주의 인자와 진리를 많은 회중 가운데에서 감추지 아니하였나이다”라는 나타냄의 성격을 선포하고 “그의 인자와 진리를 보내시리로다”라는 형식으로 주님의 인자와 진리는 그의 백성들을 그의 원수들에게서 보호하시기 위한 수단으로 증거하고 있다. 이러한 표현은 “그가 영원히 하나님 앞에서 거주하리니 인자와 진리를 예비하사 그를 보호하소서”(시61:7)라는 표현에서도 반복된다.

이러한 이유에서 지혜와 영광의 왕이었던 솔로몬은 물론이고 대부분의 OT성경에서 인자와 진리는 각자가 하나님과 사람과의 관계에서 최상의 진실성과 인자로 관계하는 최상의 자세와 덕목으로 나타난다. 즉,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께 같은 하나님의 성실과 진실로 섬길 뿐 아니라 하나님 백성들 서로 간에도 인자와 진리로 관계함으로 거기에는 창조와 구원의 은총이 충만할 수 있었다.

이러한 원리를 잘하는 지혜의 왕이었던 솔로몬이었기 때문에 “인자(חֵסֵד)와 진리가 네게서 떠나지 말게 하고 그것을 네 목에 매며 네 마음판에 새기라”(잠3:3)거나 “… 선을 도모하는 자에게는 인자와 진리가 있으리라”(잠14:22b)는 확인을 해 주고 있음을 본다.

이런 이유에서 OT 성전 제사의 찬양자들도 비슷한 찬양의 주제로 노래하였음을 기록하고 있다. “주의 빛과 주의 진리를 보내시어 나를 인도하시고 주의 거룩한 산과 주께서 계시는 곳에 이르게 하소서”(시43:3) “인애와 진리가 같이 만나고 의와 화평이 서로 입맞추었으며”(시85:10)

결국 OT의 진리의 의미적인 진보를 보면 [אָמַן,(aman) 확증하다, 지지하다, 성실하다, 믿을만하다,→ אׇמֵן(amen), 참으로, 진실로,→ אֶמֶת(emeth), 진리, 확립, 신실한, 옳은, 분명한, 참된, 진실로] 라는 의미들을 가지면서 “진리”는 성실과 진실에서 진전하여 [진리]로 확장되었음을 이해할 수 있다.

그렇지만 NT의 사용에서는 좀더 독특한 이해가 가능함을 확인할 수 있다. 앞에서 인용한 바 있는 요한복음14:6의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를 비롯하여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 곧 진리이심을 선언하는 부분이 참 많다.(for Exam. 요1:14, 17)

여기에 사용된 “진리[ἀλήθεια,(ale:theia) 진실, 성실, 사실, 진리의 사랑, 믿음성, 참, 정직, ← ἀληθής,(ale:the:s) ← ἀ부정 접두어 + λανθάνω,(lanthano:) 주의를 끌지 못하다, 눈에 띄지 않다, 숨겨지다, 알아주지 않다, 무시되다, 숨기다 등등]의 궁극적인 의미는 ‘드러내는 것, 숨기지 않는 것’을 의미하면서 감추어 뒀던 것을 들어내는 계시적 의미와 함께 숨겨져 있던 것들을 찾아내는 의미를 가지는 것이 독특하다.

이런 의미들 속에서 진리를 이해하면 참으로 진리만이 자유 하며 승리하며 사랑하며 용서함을 이해할 수 있다. 다시 OT적인 의미에서 ‘인자’와 함께 하는 관계로서의 ‘진리’에서는 모든 어둠과 미움은 사라지게 되어 있고 어떤 잔인함이나 포악함은 있을 수 없는 관계가 되기 때문이다.

숨겨 두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면 약점을 가지고 있는 것조차 이해하게 될 것이고 온유함으로 용납되고 관용하게 되며 서로 신뢰 되고 진실됨으로 이런 관계는 끊기지 않고 변치 않는 것이며 시작과 끝이 같은 것이며 이미 모든 것을 열어 놓은 상태이기 때문에 “악인은 쫓아오는 자가 없어도 도망하나 의인은 사자 같이 담대하니라”(잠28:1)는 말씀들이 사실일 수 있을 것이다.

사람들은 죄를 숨기기에 급급하지만 진리의 하나님은 그것을 열어서 해결하심이 우리의 죄의 용서를 위해 자신의 독생자를 수치스러운 자리에 내어놓는 것이 자연스러울 수 있었고 그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모든 죄인이 용서받을 수 있고 이렇게 되를 용서받은 자들이기 때문에 마귀의 참소에도 자유함을 누리는 원리를 말씀하신 것이 바로 요한복음8:31~32의 “그러므로 예수께서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으로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는 진리가 통하는 이해할 수 있다.

그러므로 “진리”는 “관계의 상태”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감추어 두고 숨겨두고 미워하고 절망하던 서로의 관계를 열어두고 선포하고 덮어지는 은혜의 역사가 이 세상의 죄악의 역사에 내려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희생의 역사인 동시에 그러한 상태가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지속되는 것이 바로 구원의 상태이다.



Ⅱ. 과연 나는 오늘 어느 편에 서있는가?(44~45)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대로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그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그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라, 내가 진리를 말하므로 너희가 나를 믿지 아니하는도다”

분명히 육신적으로는 아브라함의 후손으로 났으면서도 진리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사실보다는 거짓을 말하고 행하는 것은 육신적인 태생보다는 그가 어디에 속하는가 선택이 중요하다. 자신의 죄를 될 수 있는 대로 최대한 숨겨보고 발각되면 어쩔 수 없는 것이 공중의 권세 잡은 자 마귀에게 속했기 때문이라고 주님은 거리낌없이 말씀하신다.

사람은 자신의 성격을 표현하게 되어 있는 것은 지극히 자연적인 현상이다.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대로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44f) 그런 다음에 그들의 아비 된 보다 근본적인 성격을 지적하신다. “… 그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44m) 진리에 서지 못하는 것은 진리의 반대편인 거짓에 익숙해 있기 때문이란다. 이런 이유에서 어쩔 수 없이 그들을 그렇게 만드는 것은 “… 이는 그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라”(44b) 선포하신다.

‘진리’는 숨기지 않고 드러내는 것이고 열어두는 것이지만 그 반대는 숨기는 것이고 거짓으로 라도 감추는 것이라고 했다. 그럼에도 그들은 감추지 않고 아브라함의 후손으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들의 상태를 들어내고 고발하기 때문에 주님 편에 설 수 없었던 것이다. “내가 진리를 말하므로 너희가 나를 믿지 아니하는도다”(45)

오늘 우리 각자가 진리의 사람인지 어둠의 사람인지 판단하는 것도 예수님과 이들 사이의 차이와 같다. 믿음의 관계가 진리에 선 사람들간에 통하는 신앙적 관계를 야고보는 지적하고 있다. “그러므로 너희 죄를 서로 고백하며 병이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큼이니라”(약5:16) 진리의 성품을 따른 기도가 의인의 기도요 역사하는 힘이 큰 기도이다.

진리의 주님 말씀을 듣는 것이 기쁜가 그 말씀이 거북하고 싫은 가의 간단한 진단은 내가 오늘 속해 있는 사실적인 진단이다.



Ⅲ. 진리 편에 서야 후회 없는 삶을 살 수 있다.(46~47)

“너희 중에 누가 나를 죄로 책잡겠느냐 내가 진리를 말하는데도 어찌하여 나를 믿지 아니하느냐, 하나님께 속한 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나니 너희가 듣지 아니함은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였음이로다”

어쩌면 이 말씀이 앞의 말씀보다도 자 자신의 소속을 더욱 분명히 한다. 그리고 나의 지속적인 소속은 결국 영원에 이를 것이기 때문에 대단히 두려워해야 하고 중요하다. 우리가 진리 편에 서있다고 착각하면서 어둠의 편에 서 있다면 결국 기대하지 않은 결과로 영원이 끝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그들에게 자신 있게 증거하신다. “너희 중에 누가 나를 죄로 책잡겠느냐”(46) 사실 아무 허물로 찾지 못했다는 최종적인 선언은 그들을 죽여달라고 고발한 빌라도에게서 나왔다. “나는 그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하였노라”(요18:38) “내가 그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함이로라”(19:4) “나는 그에게서 죄를 찾지 못하였노라”(19:6)

진리가 무엇인지도 몰랐던 빌라도 조차도 계속 진리의 예수 그리스도를 변호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는 주님은 어떤 신비 종교의 교주처럼 자신을 숨기거나 가리지 않으셨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드러내 놓고 세상에 말하였노라 모든 유대인들이 모이는 회당과 성전에서 항상 가르쳤고 은밀하게는 아무 것도 말하지 아니하였거늘”(요18:20; 마26:55; 막14:49)

그런 다음 “… 내가 진리를 말하는데도 어찌하여 나를 믿지 아니하느냐”(46b) 사실 세상에 모순이 이것이다. 진리를 가르치면 믿어져야 하는데 어두움에 속해있는 사람들은 오히려 진리를 더 싫어하는 것은 주님께서 이 땅에 계실 때도 마찬가지였다.

“하나님께 속한 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나니 …”(47f) 이 말씀은 너무나 단순하고 평범한 진리이다. 그런 다음 이제 주님의 최종적인 무서운 정죄의 선언을 듣게 된다. “… 너희가 듣지 아니함은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였음이로다”(47b) 이미 앞의 45절에서도 선언하신 바 있다. “내가 진리를 말하므로 너희가 나를 믿지 아니하는도다”

바울은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롬10:17)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들어야 믿음은 나고 진리는 자라게 되어 있다. 그러나 그것이 불가능하다면 진리의 믿음은 자랄 수 없다.

찬358:1 “주의 진리위해 십자가 군기 하늘 높이 쳐들고, 주의 군사 되어 용맹스럽게 찬송하며 나가세, 나가세 나가세 주 예수만을 위하여, 목숨까지도 바치고 싸움터로 나가세” 진리를 위해 목숨까지 바칠 수 있는 믿음의 진리의 군사로 훈련하고 사시기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