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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배 전도자
요 1:14~18 2018-09-04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진리가 무엇인가는 얼마 전에도 상당부분 다룬 바 있다. 그러나 진리와 은혜가 서로의 관계 속에 어떻게 역할하고 또 이 둘의 충만을 힘쓰되 사람으로서 경계 되는 부분들도 분명히 있다.

실제로 사람들은 진리보다는 은혜를 더 좋아하고 사실 그런 현상이 가져온 신앙의 형태가 오늘 우리 시대의 예수 그리스도에 속한다는 대부분의 교회의 형태로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은혜와 진리를 제목으로 이렇게 시작하다 보니 또 너무나 딱딱하고 굳은 사변적인 말씀이 될까 봐 조심스럽기도 하다. 역시 예수 그리스도께서 만이 은혜와 진리 양쪽에서 충만할 수 있는 것 같다. 은혜로운 말씀을 준비해 보려 하지만 역시 진리 쪽의 중요성만 강조하다 끝나버릴 것 같아 조심스럽기도 하다.

지난번에 언급한 대로 [진리, ἀληθεία]의 어근이 가리지 않고 열어놓은 상태라 하였고 불변하는 성격으로 특히 진리를 말하면서 많이 강조한다. 끊임없이 변화 하는 속에서 변하지 않는 것을 말하고 찾고 논의 한다고 하는 것 자체가 사실 분명한 한계는 있다.

그럼에도 [은혜, χάρις]를 논할 때는 다분히 주관적 이라서 모두가 같은 은혜를 동일한 강도로 누리는 것은 절대로 쉽지 않다. 그러므로 은혜와 진리가 모두 충만하게 되려면 그것을 넘치도록 가지신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채움을 받는 것 밖에는 다른 묘안은 없다.

이 말은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 “…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14:6)는 말씀이 역시 해답일 수 밖에 없다. 혹 그저 “말씀 전하려면 저 말씀이다.”하실 이가 있을 지 모르지만 신앙은 복잡한 것이 절대로 아니다.

모든 인생의 가야할 길이 예수 그리스도이고 하나님께로 들어가는 문이 예수 그리스도라(요10:7)면 또한 그 같은 길이 진리이고 진리로 이를 수 있는 최종적인 결과가 생명이 된다는 간단한 이해해서 이런 해석을 해볼 수 있을 것이다.

또 그렇기 때문에 “길이요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빼버린 방법에서 [은혜, χάρις]를 받았다고 떠들어 대는 것은 허황된 이론일 수도 있다는 논리로 이해된다.

결론부터 말한다면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길을 가지 않은 [은혜, χάρις]는 은혜일 수 없고 어떤 속임수가 될 수도 있는데 그것은 은혜의 바른 검증은 반드시 진리로 해야 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Ⅰ. 은혜와 진리(14, 17)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어진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

먼저는 “은혜와 진리”를 다루는 이 글을 쓰고 있는 요한의 자세에서도 생각해 봐야 할 것 같다. [진리, ἀληθεία], 25회 요일 9회; 요이 5회; 요삼 6회 모두 45회를 거론하고 있으나 [은혜, χάρις]는 요한복음에 오늘 본문에 나온 4회가 전부이고 요이1:3에 단 1회로 요한 사도가 언급하고 있는 [은혜, χάρις]는 모두 단 5회에 불과하다.

횟수가 무엇이 중요할까 할 수 있지만 많이 언급된 내용일수록 더욱 분명한 이해를 가능케 한다고 볼 때 사랑의 사도인 요한이 은혜와 진리에 대한 사용 빈도는 오히려 은혜를 다룸에 있어서 더 조심스러움을 보게 되고 특히 다른 부분에서 보다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과 같은 분으로 설명하고 있는 본문 외에는 은혜에 대하여 침묵하고 있다는 사실에 무게가 있다.

즉, 하나님과 함께 계시다가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찬양하는 데만 은혜를 사용하고 그의 사역에서 만났던 수많은 사람들과 관련해서는 은혜라는 말 자체를 전혀 사용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말씀이 육신으로 오신 속에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하였고 그러므로 이 충만은 먼저 아버지 하나님 속에 충만해 계셨음을 시119편 기자는 “주의 율법은 진리로소이다142, 주의 모든 계명들은 진리니이다151, 주의 말씀의 강령은 진리이오니 주의 의로운 모든 규례들은 영원하리이다160” 고백하고 있다.

진리는 어떻게 만들어지는 것이기 보다는 영원부터 존재해오는 것이었고 그 진리는 이 땅에 인류를 구원하기 위하여 육신을 입고 오신 하나님 속에 여전히 충만이 넘치고 있었던 것임을 이해하게 된다. 은혜가 먼저 언급되었는데도 또 진리를 먼저 거론할 수 밖에 없는 것 같다.

[은혜, χάρις]는 ← χαίρω(유쾌하게 되다, 행복하다, 복되다, (만남이나 헤어짐에)안녕, 인사하다, 환영하다, 축하하다), 마음에 주는 신성한 영향과 생의 직접적인 반영, 감사를 포함하면서 ‘은혜, 호의, 선물, 자비(로운), 너그러움, 기쁨, 감사 등등’의 의미를 갖는다.

신앙에서 우리는 늘 양면성을 경험하게 된다. 그럼에도 이 양면성은 반드시 조화되어야 하고 극복되어야만 할 것이다. 성경 속에 주님께서 특히 요한이 증언하는 대로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신” 우리의 구세주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신으로 계실 때도 진리를 지킨다고 가르치면서 그 진리를 자신들과는 전혀 관계없는 학문으로만 가르치는 당시의 종교지도자들과 많은 부딪힘을 경험하셨음을 읽게 된다.

배우는 모든 사람들에게는 진리를 가르친다고 율법을 강론하면서도 자신들에게 있어서는 주님의 표현대로 “또 무거운 짐을 묶어 사람의 어깨에 지우되 자기는 이것을 한 손가락으로도 움직이려 하지 아니하며”(마23:4)라는 저들의 삶은 어떤 스포츠나 음악 강사와 다름없이 진리는 다만 자신이 가르치며 먹고 사는 수단의 도구에 불과했던 것을 보는 것이다.

독특한 것은 역시 그들은 은혜를 전혀 언급하지도 않음을 본다. 그런 저들의 가르침은 서릿발 같이 차가웠고 사랑의 온기를 전혀 느낄 수 없었음을 복음서들은 우리에게 전달해 주고 있다.

안타깝지만 오늘 우리 시대에도 마찬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다. 진리는 배우고 그 진리를 가지고 교제하는 것으로 만족하고 그 배운 교훈들을 우리 자신들의 삶에는 전혀 적용하지 못하는 데서 경계를 가져야만 한다. 교훈을 들을 때 행복하고 감사했으면 당연히 그 배운 대로 믿음의 삶이 가야만 함에도 배운 것과 삶은 전혀 조화되지 못하는 안타까움을 보데 된다.

베드로 사도는 벧후1:5~7에 신앙의 균형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므로 너희가 더욱 힘써 너희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더하라”고 당부한다.

그런 다음에 역시 8~9절에서 다시 “이런 것이 너희에게 있어 흡족한즉 너희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알기에 게으르지 않고 열매 없는 자가 되지 않게 하려니와, 이런 것이 없는 자는 맹인이라 멀리 보지 못하고 그의 옛 죄가 깨끗하게 된 것을 잊었느니라”고 대속의 은혜를 잃어버린 것임을 강조한다.

제 자신은 [은혜와 진리]보다는 [진리와 은혜]식의 순서를 다루게 되는데 나중에 다시 말하겠지만 우리 세상 속의 그리스도인들의 경계가 일반적인 신앙의 자세로 [은혜와 진리]를 말하면서 너무 은혜만을 사모해서 진리를 소홀히 하는 경향이 많기 때문이라고 이해해 주면 고맙겠습니다.

은혜와 진리는 마치 ‘성경과 성령’ 같은 특성이 있지만 우리 주님께는 이 둘 다 충만함으로 채워졌다. (1)어떤 특성이나 차이가 있는가? ①[은혜, χάρις]는 다분히 주관적이다. 선물을 받은 사람의 감정과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들에게 같은 선물을 주었을 때도 받은 사람들의 상태나 감정에 따라서 다를 수밖에 없는 것처럼 은혜는 각 사람의 받음 분량은 물론이고 신앙 상태에 따라서 다르고 그렇기 때문에 “왜 다른 사람은 은혜를 받았다고 하는데, 너는 받지 못했느냐!”라고 따져 물을 수도 없다. 그런 이유 때문에 주관적인 성격은 각자에 따라 또한 차이가 많다.

복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영생을 누리게 되는 것도 죄인 된 인간의 입장에서는 친히 죄의 문제를 해결하시고 다 이루어 놓으신 구원을 차별없이 나눠 주시기를 원하시는 창조주요 구세주이신 하나님의 은혜이기 때문에 최종적인 심판의 때까지는 묻지 않으신다.

그럼에도 복음 자체가 그 은혜의 선물을 거절한 자들에게 은혜가 은혜 되지 못하는 것 자체가 이미 심판의 요소가 된다. “그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요3:18)

②[진리, ἀληθεία]는 대단히 객관적이다. 모든 사람에게 이미 열려있고 검증되고 인정되었기 때문에 진리는 잘 못 이해하고 적용하는 것은 손해가 된다. 쉽게 표현하면 진리는 쉬운 표현으로 ‘이미 나타난 사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이유에서 은혜와는 반대로 같은 진리를 받은 사람들에게 “너는 왜, 진리를 따르지 않았느냐?”라고 따져 물을 수 있다.

이런 이유에서 마지막 심판의 기준은 당연히 [진리, ἀληθεία]가 기준이 될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진리의 하나님이요 절대적으로 공의로우신 분이시며 이미 은혜를 넘치도록 부으셨기 때문이다.

(2)서로 어떤 역할을 하는가? ①은혜는 진리를 진리로 확증한다. 은혜가 진리를 확증하고 증거한다. 그럼에도 이것은 이미 복음 시대에 완성되었다. 이를 말씀인 성경과 은혜의 성령이 확증하는 것은 성경은 가르쳐 주고 있다.

주님께서 친히 “그러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스스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들은 것을 말하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요16:13) 말씀하셨고 후에 이 사실을 확증한 사실을 읽을 수 있다.

“제자들이 나가 두루 전파할새 주께서 함께 역사하사 그 따르는 표적으로 말씀을 확실히 증언하시니라”(막16:20) “두 사도가 오래 있어 주를 힘입어 담대히 말하니 주께서 그들의 손으로 표적과 기사를 행하게 하여 주사 자기 은혜의 말씀을 증언하시니”(행14:3) “하나님도 표적들과 기사들과 여러 가지 능력과 및 자기의 뜻을 따라 성령이 나누어 주신 것으로써 그들과 함께 증언하셨느니라”(히2:4)

그렇기 때문에 지금은 이미 진리는 객관화 된 진리로 확증 되었기 때문에 성령의 은사로 말씀을 인정하는 때는 아니다.

②그러나 은혜가 진정한 은혜인지는 진리로 분별할 수 있다. 오늘 날에도 ‘은혜’의 신비체험을 많이 강조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여기에 대한 경계들을 성경은 경계하고 있다. 그러므로 더욱 경계해야 할 것은 이미 객관적으로 확정된 구원의 진리가 아니라 진리를 빙자하면서 행해지는 거짓 표적들이다.

“이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니라 사탄도 자기를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나니, 그러므로 사탄의 일꾼들도 자기를 의의 일꾼으로 가장하는 것이 또한 대단한 일이 아니니라 그들의 마지막은 그 행위대로 되리라”(고후11:14~15)

“악한 자의 나타남은 사탄의 활동을 따라 모든 능력과 표적과 거짓 기적과, 불의의 모든 속임으로 멸망하는 자들에게 있으리니 이는 그들이 진리의 사랑을 받지 아니하여 구원함을 받지 못함이라”(살후2:9~10)

진리는 완전히 열려있는 상태라면 은혜는 때로는 객관적이지 못하고 주관적인 부분이 많다. 그런 입장에서 객관적이지 못한 은혜는 사용에나 판단에 조심해야만 한다.

OT에서 은혜와 진리가 인격으로 취급된 예도 있다. “너는 어제 왔고 나는 정처 없이 가니 오늘 어찌 너를 우리와 함께 떠돌아다니게 하리요 너도 돌아가고 네 동포들도 데려가라 은혜와 진리가 너와 함께 있기를 원하노라 하니라”(삼하15:20) 그러나 이것은 물론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신” 하나님을 표현하는 말씀이고 OT의 마당에서도 역시 우리 아버지 하나님은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신” 분으로 자신의 백성들을 이끄셨던 것으로 이해할 수가 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은혜로 부름을 받은 하나님을 백성들을 위해 아버지께 구하고 계시다. “그들을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요17:17)



Ⅱ. 은혜와 진리 출처(17~18)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어진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 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

사람이 영원을 살고 싶어하지만 스스로는 절대로 영원을 살 수 있는 진리는 없고 줄 수도 없다. 이미 그것을 아시는 하나님께서 진리를 이 땅에 인격으로 나게 하시고 그 진리의 거짓없는 희생과 헌신을 통하여 모든 죄인 된 인류에게 구원을 값없이 은혜로 선물로 주셨다.

적어도 영원과 영생에 속한 귀한 것들은 보이는 것에서나 세상에서 날 수 없고 살 수 없기 때문에 선물 즉, 은혜가 아니고서는 영원히 불가능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와 진리에 감사드릴 수 밖에 없다.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어진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17) 사실 모세를 통해서 이스라엘에게 주셨던 율법은 한시적이고 이스라엘이라는 한정된 사람들에게 주셨던 진리요 은혜라면 복음은 모든 인류에게 동일하게 영원히 주신 진리요 은혜이다.

그렇기 때문에 OT시대에는 은혜와 진리를 동시적으로 누릴 수 없었지만 온 인류를 구원하기 위하여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신 진리요 은혜의 주인공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제 은혜와 진리는 모든 인류에게 주어졌다. 그러한 확신의 고백이 “…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17b)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을 뵐 수도 없고 온전한 은혜는 제한적이었던 OT시대와는 다르게 우리와 같은 육신을 입으시고 친히 이 역사 속에 내려오신 독생하신 하나님 속에서 비로소 하나님을 뵈올 수 있게 된 것은 과거 이스라엘 속에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은혜 중의 은혜라고 말할 수 있다.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 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

은혜와 진리는 절대로 땅에서 나지 않는다. 땅에서 진리를 찾으려 했던 모든 사람들은 실패하였다. 그것이 지혜를 사랑한다는 철학이지만 언제나 그 철학의 기준은 바뀌고 변화무쌍했던 이유는 결국 그것이 진리이지 못했음을 반증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하나님께서 온 인류에게 주신 선물(은혜)이고 그분 속에서는 무엇을 구하든 만족할 수 있다.



Ⅲ. 충만하더라(16)

“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 데서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러라”

우리는 이 말씀을 읽고 상고하면서도 “은혜와 진리의 충만을 받으라!”는 말씀으로 먼저 생각해 놓고 시작할 것 같은 짐작을 하게 된다. 그럼에도 이 전체의 말씀들은 하나님의 독생자에 대한 충만을 찬양하며 감격하는 요한의 고백일 뿐이지 사람을 향한 평가가 아님을 먼저 알았으면 좋겠다.

어찌 보면 사람은 거듭나서 성령의 지배를 받는다고 하면서도 육신을 입고 있는 한에서 이 둘 모두가 충만할 수 없는 것 같다. 진리 편에 서려고 하면 은혜가 모자라고 은혜 편에 치중하면 진리를 잃어버리는 그런 안타까움은 늘 경험하고 보는 사실이다. ‘과연 왜 그럴까!’

어떤 교회의 교역자는 “이제 나는 진리보다는 은혜 쪽에 더 치중하려고 한다.”는 고백을 하고 나서 그 교회의 모이는 모습에서의 부흥이 아니라 오히려 진리를 잃어버려서 기준이 모호한 모습으로 그리고 숫자적인 부흥도 되지 못하는 것을 보고있다. 사실 ‘진리보다는 은혜 쪽’이라는 표현 자체가 벌써 양쪽이 다 충만하지 못하고 한쪽에 치우치고 있다는 사실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오히려 자신의 권위나 명예를 세우려는 욕심이 없이 깨끗한 마음으로 순종이 아니라 복종으로 라도 진리를 따르려고 하는 사람들은 충만이나 넘치게는 아닐지라도 하나님께서 은혜도 입혀 주심을 경험하는 데서 교회나 하나님의 백성들은 먼지 진리를 따르는 것으 중요함을 배우고 경험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