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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배 전도자
요 1:1~8 2019-01-06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공관복음(共觀福音)이라고 하는 마태, 마가, 누가복음이 각각 다른 각도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인류구원의 메시아이신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있지만 이 요한복음이 없었다면 과연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하신 하나님의 아들이자 하나님 되심을 이해할 수 있었을까 하는 의아함을 갖을 수 있을 정도이다.

그런 이유에서도 역시 하나님께서는 창조주요 구세주로서 죄인을 불쌍히 여기시고 사랑하시며 용서하시고 자신과의 관계를 회복시키시고 싶어하시는 하나님이심을 확신하게 한다.

이 요한복음을 또 다른 복음서와 함께 독수리 복음서라는 별명을 가진다. 높은 곳에서 낮은 땅을 가장 잘 내려다보는 독수리는 물론 자신의 먹이 감을 찾는 것이 그 목적이지만, 절대적인 영광과 위엄에 계시면서도 범죄로 하나님을 떠난 인류를 가장 세밀히 보시고 스스로 해결할 수 없는 인간의 죄의 문제를 친히 해결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은 그 사랑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도록 성령께서 요한을 통해서 일깨워 주시는 것이다.

우리는 올해를 시작하면서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기 위하여 이 요한을 통한 하나님의 사랑을 확신하고 누리고 즐기는 영생의 사람으로 변화되어 갔으면 하는 바램이다.



Ⅰ. 거룩한 시작(1~3)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이 말씀 이야말로 요한복음의 시작일 뿐만 아니라 최초의 창조의 기록인 창세기의 기록과 같으면서[창1:1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이 요한복음의 주제가 되는 말씀이다. 사실 시간 속에 나서 시간 속에 살다가 시간 속에 떠나야 하는 시간에 메인 사람에게는 이 “태초(ἀρχῇ)”라는 말 자체가 완전한 이해가 불가능한 낱말이다. 그러나 이 “ἀρχῇ, 태초”도 당시 헬라철학에서 익숙한 말이요 신비한 낱말로 취급되었던 말이다.

그러므로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1f)는 시점을 사람으로서는 완전히 이해할 수 없는 의미이다. 왜냐하면 어떤 사람도 그 “ἀρχῇ, 태초” 속에 있어본 경험이 없었고 시간의 제한 속에 살기 때문에 막연히 그것을 동경하고 기대하는 존재일 뿐이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하루살이]에게 내일이나 다름이 없는 의미이지만 로고스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사람으로서는 완전히 이해할 수 없는 시간을 넘어서는 영원의 저 넘어로부터 시간 속에 갇혀있는 인간을 구원하러 시간 속에 찾아오신 분이다.

본래 처음 창조된 사람은 시간에 갇힌 존재가 아니었다고 창세기는 우리에게 가르친다.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창2:7)는 말씀이 그것이고 결국 이 영원의 하나님과 같은 존재가 범죄함으로 시간 속에 던져졌다.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1b) 이 말씀도 공간의 한계를 느끼는 각각의 육체를 가진 우리 사람에게 시원한 이해가 불가능한 설명이다. 결국 최대한의 우리 사람의 말로 표현하려 하지만 우리 스스로의 한계라는 제한으로 완전히 이해할 수 없다.

무엇보다도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바로 하나님이시다.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2) 이 말씀은 첫 1절의 반복이자 설명이다. “그”는 당연히 [말씀(Λόγος)]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하는 것인데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라는 말씀과 다르지 않다.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3) 보이는 것뿐만 아니라 보이지 않는 영적세계조차도 지으심의 통로를 이 [말씀(Λόγος)]이신 예수 그리스도라고 증거하는 것이다. 이것은 누구보다도 바울이 잘 증거하고 있는 내용이다.

“그는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형상이시요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나신 이시니, 만물이 그에게서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왕권들이나 주권들이나 통치자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골1:15~17)

우리는 이 ‘보이는 세상’이나 ‘보이지 않는 세상’의 ‘출처’와 ‘존재이유’와 ‘목적’을 분명이 알아야 바른 삶을 살 수 있는데 이 말씀은 그러한 가치를 분명히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요한은 분명히 헬라 철학을 배우거는 전공한 사람이라고 보기 어렵다 왜냐하면 그는 갈릴리에서 나서 자라 예수 그리스도를 만날 때까지 어부로 살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어찌 보면 어부로 나서 어부로 자란 이 세속적인 표현으로 ‘불학무식(不學無識)’한 천민이 당시의 최고의 학문에 속한 철학의 표현들을 빌어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할 수 있는가 하는 의문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이요, 요한 자신이 증거하는 대로 성령의 충만, 기름 부으심으로 가능하였음을 이해할 수 밖에 없다. “너희는 주께 받은 바 기름 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그의 기름 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 또 참되고 거짓이 없으니 너희를 가르치신 그대로 주 안에 거하라”(요일2:27)

우리는 2019년이라는 새로운 한해를 시작하는 것보다 중한 것은 태초부터 계신 이와 함께 늘 새로운 시작이 가능하고 만물뿐만 아니라 우리가 왜 존재해야 하는가 내가 가진 모든 것이 어디로부터 왔는가 하는 삶의 좀더 근본적인 문제를 이 말씀을 통해 배운다. 만물이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존재한다면 그의 피로 씻김을 받은 우리가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함을 깊이 깨닫는 이 말씀과 함께 하는…



Ⅱ. 생명과 빛의 근원(4~5)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

이 요한복음이 다루고 있는 가장 귀중한 것 중의 하나가 바로 [생명]이며 [영생]이다. 이v4처럼 반복되는 표현도 더러 있지만(5:26, 12:25) 공관복음 전체에 모두 4회가 사용되는 것과 다르게 무려 이십여 회나 “생명[ζωὴ, ]”을 반복하여 사용되었다는 데서도 이 요한복음은 ‘생명의 책’이라는 별명을 가질만 하다.

앞으로 계속 상고해 가겠지만 [영생]도 이십여 회 가까이 사용되고 있음도 공관복음 전체에 우리 개역으로 12회 검색되는 것과 비교하면 역시 귀중한 영생의 논리를 설명함도 확신할 수 있다.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4) 했는데 역시 ‘그 안에’는 [말씀(Λόγος)]이신 예수 그리스도안에 라는 분명한 표현이다. 생명은 우리 사람이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인정하든 그렇지 못하든 예수 그리스도 안에만 있다.

이를 역시 바울이 증거한다.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졌음이라”(골3:3) 그럼에도 그 안에 감추어졌던 이 생명은 다른 어떤 것이 아닌 사람들에게 주시기 위한 것 이었음도 감사해야만 한다. 그리고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하였다. 하나님 안에 감춰져 있는 빛은 곧 사람들의 빛이고 그 빛이 가려져 있는 곳은 흑암이요 어두움일 뿐이다.

그럼에도 여기에 안타까움이 있는데 그것은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5)는 비극이다. 요한은 연이어 이 안타까움의 이유를 밝히고 있다.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요3:19)

항상 상대적인 세상에서는 대비될 수 밖에 없는 것이 빛이 잘 드는 양지(陽地)가 있으면 그 반대편에는 음지(陰地)인 어두움이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비춰 주시는 생명에 빛에 대해서는 필연적인 것이 아니라 비록 죄인들이지만 자신의 순종의 대상이 다르다는 것이다.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5) 어둠에 빛이 비치면 어둠은 물러가고 빛이 비춰지는 것이 자연의 순리이지만 죄로 가려진 음지(陰地)는 빛이 비춰도 깨닫지 못하는 죄(罪)의 가리게가, 순종하고 맡기지 않는 이상 치워지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이유를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라고 선언하고 있다. 여기에는 분명히 비교되고 있는 모습을 표현하고 있다.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한 것”이 그것이다. 우리 인생은 본질적으로 안타깝지만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하는 것이 사실이다. 그런 이유 때문에 정죄(定罪)되고 있는 것이다.

이제 영원 속에 계시던 빛은 어두운 세상에 비추기 위해서 오셨고 그 은혜를 거절하고 받아들이는 것은 각자의 책임이다. 하나님의 빛에 비춤을 받았음에도 빛이 가려지는 죄의 문제 자체도 우리 사람스스로는 절대로 해결할 수 없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한 영원한 제사가 드려졌기 때문에[히10:12 오직 그리스도는 죄를 위하여 한 영원한 제사를 드리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으사] 다만 그의 마련하신 희생의 십자가를 의지하고 순종하기만 하면 치워 주셔서 생명의 빛이 바로 비출 수 있게 할 것이다. 왜냐하면 이미 빛은 어둠에 비춰주고 있기 때문이다.

[말씀(Λόγος)]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생명의 빛이 있었고 그 빛은 사랑 때문에 어두운 세상에 생명을 주시기 위하여 비추고 계시다. 우리 각자가 할 일을 그것을 방해하고 가리는 죄의 악함을 회개하고 그 빛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비록 이해되지 않아도 처음에는 순종이 되지 않더라도 복종이라도 하면 우리 인생에 죄의 어둠을 거둬 내시고 생명의 빛을 비춰 주실 것이다. 이것은 이제 ‘믿으십시오!’’라기보다 ‘받아들이십시오!’라고 해야 할 것이다.



Ⅲ. 빛의 증거자(6~8)

“(6)하나님께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사람이 있으니 그의 이름은 요한이라 (7)그가 증언하러 왔으니 곧 빛에 대하여 증언하고 모든 사람이 자기로 말미암아 믿게 하려 함이라 (8)그는 이 빛이 아니요 이 빛에 대하여 증언하러 온 자라”

오늘 마지막으로는 이 놀라운 은혜의 역사를 위해 선택된 한 사람을 증거하고 있는데 바로 세례 요한이다. 이 일을 감당하는 일을 위해서는 세상으로부터 난 자가 아니라 이 일을 처음부터 준비하시고 시행하신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라야 가능하다.(고전2:14 참고) 그런 이유에서 “하나님께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사람이 있으니 그의 이름은 요한이라”(6)고 사도 요한이 증거하고 있다. 영적인 일은 절대로 세상적으로는 감당할 수가 없다.

그의 해야할 일이 분명히 나타나고 있다. “그가 증언하러 왔으니 곧 빛에 대하여 증언하고 모든 사람이 자기로 말미암아 믿게 하려 함이라”(7) 곧 ①빛을 증거해야 하고 그것으로 하여 ②모든 사람이 ③자기로 말미암아 ④믿게 하려는 것이다. 이것은 어쩌면 예수 그리스도의 일꾼들이 가져야할 변치 않는 섬김의 이유와 목적이다. 이 원리의 가르침은 대단히 중요하다.

그 다음에는 이러한 역할의 사람이 주의 해야할 자세를 덧붙인다. “그는 이 빛이 아니요 이 빛에 대하여 증언하러 온 자라”(8) 침례자 요한은 공간복음에서도 증거하는 것처럼 이 자세에 대해서는 분명하였다.(마4:11; 막1:7; 눅3:15~16; 요1:27) 항상 건전치 못한 사람들이 일어나는 과정을 보면 처음에는 겸손하고 잘 사역하다가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고 나면 그리스도를 증언하던 것을 그만 두고 자신을 증거하는 것이 문제이다.

이 세상에는 누구도 빛일 수 없다. 다만 빛에 대하여 증거할 뿐이다. 이런 입장에서도 은혜의 일꾼은 자기를 부인하는 것이 중요함을 요한에게서 배운다. 주님께서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 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마16:24; 막8:34; 눅9:23)하셨다.

이 마지막 부분에서 우리가 깨달아야 하는 한가지가 있다. 지금 세례 요한은 없다. 그럼에도 이 빛은 세상의 마지막까지 증거되어야만 한다. 그렇다면 오늘은 누가 요한 같은 증거자 인가!

그것은 하나님께서 마련하신 이 놀라운 은혜를 맛본 나(우리)이다. 이제 우리는 하늘로부터 거듭나서 하늘의 사람들이 되었다. 믿습니까! 그렇다면 다른 사람이 아니라 오늘 나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이 믿게 해야 하는데 그것은 현재의 대한민국 안에서는 말뿐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난 삶이 되어야 한다. 한 사람이라도 ‘나로 말미암아 믿게’ 된다면 얼마나 감사하겠습니까!

다만 증거하는 모든 사람이 이종배로부터 모두 나를 자랑하고 선전하는 것이 아니라 빛이신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것이다. ‘빛이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어둡던 내 인생이 이렇게 빛을 얻었다.’고 삶으로 증거하는 빛의 삶이 되시기를 …

우리는 시작과 끝이 없으신 하나님과 항상 새롭게 시작할 수 있다. 언제나 우리의 시작과 끝에는 알파와 오메가가 되시는 만물의 원인이시고 목표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함께 하시며 그 분이 바로 하나님이시며 이 역사에 존재하는 어떤 것이라도 주님이 없이는 의미도 없고 가치도 없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하나님 안에 생명은 빛으로 계시고 그 빛은 어둠에 비치지만 깨닫지 못했음에도 오늘 내(우리)가 그 빛을 받게 되었다는 감격이다.

그 빛은 바로 세례 요한과 사도 요한 같은 하나님께로 보내심을 받은 사람들 덕택에 오늘 나에게 증거 되었고 그들의 빛의 증거로 다시 하늘로부터 거듭난 나를 이 역사의 증거자로 보내신다.

나를 세상에 보내시는 것은 또 다른 사람들로 믿게 하기 위해서이고 나는 빛일 수 없고 다만 생명의 빛의 증거자로 다시 보냄을 받았다는 감격으로 사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