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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배 전도자
요 1:14~18 2019-01-20
충만한 데서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러라,  
요한은 하늘의 영광을 버리시고 이 땅에 내려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과 주님이 가지신 그 영광의 충만이 오늘 우리에게 미치는 놀라운 은혜를 증거한다. 특히 여기서는 하나님의 가장 귀중 하면서 그분의 백성들이 반드시 함께 가져야할 속성을 지적하고 있다.

그것은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으로 죄에 대해 진노하실 수밖에 없고 그럼에도 죄에 잡혀있는 사람을 불쌍히 여기시는 두가지 성품인 “은혜”와 “진리”를 증거하고 있다. 이러한 중요한 성품을 그분의 백성들에게 주시기에 부족함이 없도록 충만 하심을 또한 증언하고 있다.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거나 “그의 충만한 데서 받으니”라는 선언이 그것이다. 하나님께는 모든 것에 모자람이 없으시지만 무엇보다도 그분의 근본적인 거룩한 성품과 그럼에도 그 거룩성으로 이끄시는 사랑(은혜)이 모자라지 않음을 증거하고 있다.

그럼에도 조심스러운 것은 하나님의 이러한 귀중하고 특별한 성품을 짐승이나 다른 모든 피조물을 제외한 천사나 사람들에게만 허락하신 것을 사람들이 조화하지 못하고 치우침으로 신앙에나 인간 관계에 문제를 일으키는 일이 흔하다는 경계를 가져야만 한다.



Ⅰ. 은혜와 진리가 넘치시는 예수 그리스도.(14, 16~17)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 데서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러라,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어진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

횟수가 그렇게 중요한 것은 아니지만 여기에 “은혜”라는 표현이 모두 네 번, 그리고 “진리”라는 표현이 모두 두 번 사용되고 있다. 이 모든 성품이 넘쳐나는 형용사로는 “충만”이라는 표현 역시 두 번이나 언급되고 있다.

오늘의 메시지는 이 부분이 중심을 이뤄야 할 것 같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14f) 우리 사람으로서 가장 감격할 수 밖에 없는 하나님의 화육(化肉) 즉, 육신을 입으신 사랑이다. 바울은 빌립보서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가장 본받아야 할 모습을 주님께서 육체가 되심으로 제시한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2:6~8)

자주하는 말이지만 죄인인 우리를 위한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은 단순히 십자가에서 수치와 고통만을 말하지 않는다. 어찌 보면 어떤 시공간의 제약도 받지 않으시든 분이 종의 형체로 사람이 되신 것 자체가 주님의 가장 큰 희생이셨고 사랑이심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육신을 입으신 것 자체가 우리가 완전히 이해할 수 없는 갇힘이다.

여기에 대해 완벽하게 비유될 수 있는 것이 없다. 그러나 이 우주 가운에 어디서나 동시적으로 계시는 분이 한 좁은 사람의 몸 속에 갇힌 것이다. 좀더 가까이 표현해보면 정신이 전혀 이상이 없는 사람이 자물쇠로 잠긴 좁은 방에 갇힌 것으로 비유될 수 있다.

로마 시민권을 가지고 천하를 자유롭게 다닐 수 있던 바울이 복음 때문에 로마의 감옥에 갇히면서 앞에서 인용한 빌립보서2:6~8의 예수 그리스도의 낮아지심을 더욱 사실적으로 경험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런 입장에서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14f) 하는 표현은 주님께는 완전히 헤아릴 수 없는 희생이셨지만 우리들에게는 말할 수 없는 감격의 이유가 된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16m) 우리 육체를 가진 사람에게서는 절대로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 없다. 아무리 거룩한 삶을 사는 사람일지라도 그 사람에게서 위엄스런 창조주의 영광을 볼 수는 없다. 그럼에도 육체를 입고 오신 예수 그리스도로부터는 이 우주 가운데 유일하신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 그대로 나타났다는 증거이다.

“영광을 보니, 영광이요” 했는데 여기 사용되는 영광은 “영광[δόξα, 거룩, 위엄, 영예, 찬양, 경배]”로 하나님께만 적용될 수 있는 낱말이다. 바울이 이를 표현하기를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롬1:23)이라고 묘사했다. 이것의 차이는 사람의 영광은 풀의 꽃에 비교하는 것[벧전1:24,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은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한 것과 다르게 시간이 흘러도 또 어디에서든지 전혀 감소되지 않는 위엄을 표현하는 것이다.

또 하나 지나칠 수 없는 표현은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한 것이다.[μονογενής, 홀로 태어난, 독생 한, 외아들, 지극히 사랑스러운 = μόνος 유일한, 하나뿐인, 홀로 있는 + γίνομαι, 존재하게 되다, 발생하다, 나타나다, 창조되다] 그러므로 “독생자의 영광”이란 또 다시 볼 수 없는, 영적인 존재인 천사 중에서나 그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은 아담은 물론 어떤 다른 존재에게 서는 볼 수 없는 영광을 의미하는 표현이다.

그리고 이 영광을 다시 풀어 증언하기를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14b)고 찬양하고 있다. 이 말을 더 분명히 표현하면 스스로 존재하시는 홀로 한 분이신 하나님 아버지는 물론이지만 예수 그리스도에게 만이 은혜와 진리가 치우침이 없이 균형 있는 모습으로 존재한다는 의미이다.

이런 의미 속에서 역시 사람은 아무리 경건하다고 해도 은혜와 진리를 균형 있게 가질 수 없다는 한계성도 이해해야만 한다. 사람들은 늘 대칭저울을 보면서 재판을 한다고 할지라도 역시 정확한 균형감각을 가질 수 없다. 그런 이유에서 역시 하나님만이 심판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지는 것이 당연하다.

그럼에도 하나님의 성령을 의지하여 이 주님께는 치우침이 없이 충만한 이 “은혜”와 “진리”를 우리의 삶 속에도 균형을 맞출 필요가 있다. 하나님은 분명히 “진리”의 하나님이시지만 배열에 있어서도 횟수에 있어서도 사람이 읽어야 할 말씀이기 때문에 배려를 하셨다고 보여진다.

“진리와 은혜”이기보다는 v14, 17 모두 “은혜와 진리”로 기록하고 있고 횟수에 있어서도 “은혜”는 4회를 “진리”는 그 절반인 2회로 기록하고 있다. 그럼에도 “은혜”를 제외해버린 “진리”의 삶은 우리 사람 사는 세계에서 조금은 두려움과 경외감이 앞서게 되고 “진리”를 가볍게 여기고 “은혜” 중심의 삶을 산다고 하는 사람들의 무질서와 혼란을 보게 된다.

그렇다면 우리의 삶에 이 두 귀중한 성품을 어떻게 균형 맞추고 도전할 것인가! 하는 과제를 갖게 되는데 예수 그리스도나 바울의 자세를 보면 “진리”는 철저하게 자신에게 그리고 “은혜”는 다른 사람에게 적용하는 모범을 배운다. 이 적용이 거꾸로 될 때 역시 천국을 누리지 못함을 성경 속에서 본다.

즉, 나 자신은 진리를 지키지 못함에 한탄 할 수 있을 정도로 냉정 하되 다른 사람들에게는 기회를 기다리는 자세로 관용하는 은혜의 사람으로 사는 것이다.

불법을 빌어서 자신을 십자가에 못박고 조롱하는 무리들을 향하여서도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눅23:34)는 모습 때문에 나중 주님이 운명하심을 보면서 “예수를 향하여 섰던 백부장이 그렇게 숨지심을 보고 이르되 이 사람은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 하더라”(막15:39; 마27:54)고 고백함을 볼 수 있다. 분명히 진리의 주님이시지만 은혜를 적용함을 본다.

바울만큼이나 진리에 민감한 사람도 드물 것이다. 그럼에도 때로는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그의 모습들을 더러 보게 된다. 안디옥교회에서 있었던 이방인의 복음에 받아들여 짐이 사도행전 15장에 예루살렘교회의 사도들과 장로들에 의해서 정리되고 그 확정된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와 장로들이 작정한 규례를 그들에게 주어 지키게 하려고 전하기 위해 디모데를 데리고 가면서 보인 자세는 진리보다는 은혜의 사람이었을 본다.

“바울이 그를 데리고 떠나고자 할새 그 지역에 있는 유대인으로 말미암아 그를 데려다가 할례를 행하니 이는 그 사람들이 그의 아버지는 헬라인인 줄 다 앎이러라”(행16:3)

나중 예루살렘에 올라가 야고보를 방문한 바울이 유대인들의 항의를 염려하여 제안하는 머리는 깎고 율법적인 결례를 행하라는 권면을 받아 들이는 것도 그렇다.(행21:17~26) 비록 이 결례를 행한 것에 별 효과가 없었음에도 바울이 자신의 신앙에는 필요 없는 이런 종교적 행위를 받아들이는 것은 분명히 “진리”를 지키려는 모습 보다는 은혜의 방향임을 배운다.

반면에 주님께서는 율법 조항으로 사람들을 정죄하는 사람들을 향하여서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모세의 자리에 앉았으니”(마23:2)라고 책망함을 듣는다.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를 “진리”대로 판단한다면 그분 앞에 자신 있게 설 지체는 한 사람도 없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변함없이 되어질 나(우리)를 기대하시며 오늘 나를 받으시고 기대하시면서 끊임없는 은혜를 지속적으로 베풀고 계신다.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에 감사하며 “진리”는 철저하게 자신에게 적용하고 “은혜”는 다른 사람에게 적용하는 삶이 된다면 “은혜와 진리”로 충만한 교회가 될 것이다.

“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 데서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러라”(16) 앞에서도 말했지만 “충만”이란 말은 그 단어를 분석해야 할 정도로 어려운 말이 아니다. 좀 더 가까운 우리말 표현은 “넘친다”는 의미이다.

반드시 짚고 지나가야 할 말은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라는 앞에서의 내용과 함께 여기서도 “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 데서 받으니” 라는 ‘우리’ 또는 ‘나’의 중요성이다. 놀라우신 하나님의 은혜는 그의 생명을 값없이 받은 모든 사람이라고 할 때 ‘우리’이고 좀 더 가까이는 ‘나’에게 관련 없는 하나님의 진리나 은혜는 적어도 나에게는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은혜 위에 은혜러라”했는데 신앙에 있어 가장 좋아하고 흔한 표현이지만 “은혜[χάρις, 호의, 선물, 자비, 너그러움, 기쁨, 감사]”는 하나님의 모든 사랑을 은혜로 받아 들이는 사람에게 더욱 넘치게 되는 데서 “은혜 위에 은혜러라”는 표현을 이해할 수 있다.

마치 바울이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롬1:17f)라는 표현처럼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신 모든 것을 자신의 노력이나 공로가 아니라 은혜로 이해하고 은혜로 감사하는 사람에게 은혜는 모든 면에서 넘치게 되어 있다. 자신의 생명, 형편, 사람들, 건강 모두가 은혜 아닌 것이 없다.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어진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17) 사실 엄밀히 따지면 “율법”은 “진리”의 법이지 “은혜”라는 측면은 분명하게 나타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죄는 형벌 받아야 하고 그것을 확정하는 결론이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롬3:23) 라는 이론이다.

물론 OT에 은혜가 나타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아브라함의 선택에서 이집트 탈출, 광야에서의 삶, 이스라엘의 건국이 다 사람이 한 일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친히 이루신 “은혜”임을 부정할 수 없다.

그럼에도 “진리”는 물론이지만 “은혜”가 은혜로 나타난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육체로 오심에서부터 이 땅에 다시 오실 복음의 역사는 OT에서는 쉽게 이해할 수 없는 상상할 수 없는 은혜이다.

이런 이치에서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17)는 선언은 우리가 더욱 감사하고 은혜로 살아야 할 이유이다.



Ⅱ. 요한이 증거하는 예수 그리스도.(15)

“요한이 그에 대하여 증언하여 외쳐 이르되 내가 전에 말하기를 내 뒤에 오시는 이가 나보다 앞선 것은 나보다 먼저 계심이라 한 것이 이 사람을 가리킴이라 하니라”

이미 앞의 v6~8 “하나님께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사람이 있으니 그의 이름은 요한이라, 그가 증언하러 왔으니 곧 빛에 대하여 증언하고 모든 사람이 자기로 말미암아 믿게 하려 함이라, 그는 이 빛이 아니요 이 빛에 대하여 증언하러 온 자라” 한 것처럼 이 “로고스(Λόγος)”의 증거자에 대해 언급하였지만 다음 시간에 더욱 구체적으로 당시 종교 지도자들이 계속 던지는 질문들과 함께 이 “은혜와 진리”의 증거자 침례자 요한에 대한 부분을 다루게 될 것이다.

꼭 같은 의미의 “하나님은 자비(은혜)로우시다”라는 이름을 가진 사도 요한은 자신이 사랑받는 사람이지만 역시 하나님께 귀한 쓰임을 받는 세례자 요한을 간간히 소개하면서 같은 “로고스(Λόγος)”를 영접한 오늘 우리의 사명을 깨닫게 하는 것을 본다.

누가복음에 보는 대로 요한은 육신적으로는 예수 그리스도보다 약 6개월 먼저 태어난 것으로 나타난다. 그럼에도 침례자 요한은 다른 사람이 아닌 자신이 받은 보다 신령한 계시를 통하여 자신이 그를 증거해야함을 잊어버리지 않았다.

이러한 증언은 모태로부터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눅1:15) 성령의 지시를 받는 것으로 증언한 것이다. “… 내 뒤에 오시는 이가 나보다 앞선 것은 나보다 먼저 계심이라 한 것이 이 사람을 가리킴이라 하니라”

이러한 사실이 우리에게 주는 도전은 남이 전해 주는 예수가 아니라 나 스스로가 확인한 예수 그리스도를 소신 있게 증언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Ⅲ. 하나님 아버지 품 속의 독생하신 그리스도.(18)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 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

이 말씀은 어디의 말씀보다도 하나님의 가장 분명한 계시자로서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하고 있다. 사실 기름부음을 받은 “그리스도” 또는 OT적인 “메시야”의 중요한 역할 중의 하나가 하나님을 백성들에게 나타내는 역할임을 대부분의 신앙하는 사람들은 알고 있다.

그럼에도 성경에서는 하나님을 직접적으로 보고는 살 사람이 없다고 증거하고 있다. 심지어 신명기서에서 “그 후에는 이스라엘에 모세와 같은 선지자가 일어나지 못하였나니 모세는 여호와께서 대면하여 아시던 자요”(신34:10)라고 기록하고 있지만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직접 말씀하시기를 “또 이르시되 네가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니 나를 보고 살 자가 없음이니라”(출33:20) 하셨다.

그렇기 때문에 OT성경에서 하나님을 만났다고 하는 아브라함이나 야곱은 물론 사사기에 나타나는 표현들은 모두 주님의 보내신 사자를 본 것이지 하나님을 직접 뵐 수 없었다.

“야곱은 모태에서 그의 형의 발뒤꿈치를 잡았고 또 힘으로는 하나님과 겨루되, 천사와 겨루어 이기고 울며 그에게 간구하였으며 하나님은 벧엘에서 그를 만나셨고 거기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셨나니”(호12:3~4)

이렇게 하나님의 계시에 대해서는 선지자들마다 여러 속성들을 소개하였지만 “옛적에 선지자들을 통하여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이 모든 날 마지막에는 아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이 아들을 만유의 상속자로 세우시고 또 그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 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 …”(히1:1~3f)고 증거하고 있다.

그러므로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18f)라는 증언은 창세기~말라기까지에 계시된 진리이다. 거룩하신 하나님은 죄를 가진 사람은 주님께서 자신을 계시하시는 것 외에는 절대로 뵐 수 없다. 이런 입장에서 OT의 하나님 계시는 흔히 말하는 대로 ‘시각 장애자가 코끼리 만지는 격’이었을 뿐이었다.

마치 달빛의 그림자에 가려 제한되었던 그런 계시가 광명한 태양에 나온 것처럼 분명해진 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보게 되는 하나님이시다.

“… 아버지 품 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18b) 뒤에 가서 주님께서 자신과 하나님 아버지를 설명하실 때 이런 표현을 사용하셨다.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은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서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 그렇지 못하겠거든 행하는 그 일로 말미암아 나를 믿으라”(요14:10~11)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하시는 말씀도 행하시는 일들도 다 자신과 함께 하시는 아버지께서 함께 행하기는 것이기 때문에 이것을 믿어야 한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여기서도 또 한번 “독생하신 하나님”이라는 표현이 사용되고 있다. [μονογενής, 홀로 태어난, 독생 한, 외아들, 지극히 사랑스러운] 즉, 하나님을 가장 완벽하게 보여 주시는 분은 어떤 선지자도 아니고, 바로 하나님 아버지의 품 속에 계신 홀로 한 분이신 유일하신 독생성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장 완벽하게 나타내 보이셨다는 선언이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오셨고 그 분께는 세상에서 볼 수 없는 영광과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셨다. OT의 율법으로는 채움이 불가능했던 은혜와 진리는 주님으로부터 얼마든지 늘 모자람이 없이 우리 것으로 누릴 수 있는 약속을 받고 있다.

그럼에도 공의와 같은 진리의 두려운 판단은 나 자신에게 적용하고 언제나 참아 주시고 기다리시며 바라시는 주님처럼 은혜를 다른 사람들을 대함에 적용해야만 한다.

세례 요한은 자신이 직접 받은 주님에 대한 증거를 확증하고 외칠 수 있었다. 우리 역시 진리를 사모하고 은혜 속에 강건 함으로 로고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삶 속에 증거할 수 있어야 한다.

본래 하나님을 뵈면 죽을 수 밖에 없었지만 이제는 모든 면에서 아버지 하나님을 우리의 시간과 공간 속에 모시고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 삶의 중심에 모심으로 말미암아 인류의 유일하신 창조주요 구세주를 증언하는 복된 삶을 감당하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