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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배 전도자
요 1:35~42 2019-02-03
보라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여기서부터 이 1장의 마지막절까지는 예수님의 제자 선택에 관한 기록을 비교적 자세히 다루고 있다. 예수님을 만난 첫 제자 두 사람이 본래 요한의 제자였다는 사실도 공관복음의 기록에서는 볼 수 없는 기록들이다.

또 주님의 제자로 부르시는 모습들 역시 공관복음과는 상당히 다른 것을 보지만 공관복음은 상황과 장소적인 면을 강조하고 있다면 시간이 상당히 지난 후에 기록된 이 요한 복음은 관계와 의미를 중심해서 전달해 주고 있다는 데서 전혀 혼란을 느낄 필요는 없는 것 같다.

두 마당이 다 주님의 제자 삼음에 대한 기록이지만 각각의 가진 독특한 상황과 인물을 따라 대하시는 주님의 가르침을 여기서도 읽을 수 있기 때문에 두 부분으로 생각하고자 한다.



Ⅰ. 요한의 사실적 믿음,(35~37)

“또 이튿날 요한이 자기 제자 중 두 사람과 함께 섰다가, 예수께서 거니심을 보고 말하되 보라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두 제자가 그의 말을 듣고 예수를 따르거늘”

세례 요한은 광야에서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회개의 침례를 베풀면서 그를 따르는 제자들이 더러 있었던 것 같다. 그럼에도 본문에서도 보는 것은 그들을 예수 그리스도께로 이끌려 하였음을 보게 되는데 이것 역시 하나님의 뜻을 바로 이해하지 못했다면 인간적으로는 절대로 자신의 제자를 다를 사람에게 가게 하려고 하는 노력을 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자기 앞에 나타나신 그리스도께 요한은 제자들이 보는 가운데 거리낌없이 신앙적 고백을 하였고 그들은 요한을 따르던 데서 돌이켜 머뭇거림이 없이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가 됨을 볼 수 있다.

“또 이튿날 요한이 자기 제자 중 두 사람과 함께 섰다가”(35) 이튿날은 우리가 앞에서 상고하였던 대로 세례 요한에게 그가 메시야인가를 물어보러 왔던 예루살렘의 사람들이 왔던 때를 중심 해서 말하고 있는 것 같다. 요한의 제자가 몇 명인지는 성경에 정확하게 나타나 있지 않지만 그의 제자 두 사람과 함께 있다가 그 두 제자 모두를 주님께 보내 버린다.

이것은 자연적인 것 보다는 다분히 요한의 의도였을 것이라고 볼 수 있는 이유는 제자들 앞에서 보인 그의 고백과 자세를 볼 때 그렇게 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누구든지 충성된 하나님의 사람이라면 당연히 그리고 최종적으로는 자신을 따르는 사람들을 그리스도께로 이끄는 것은 당연한 자세이다.

“예수께서 거니심을 보고 말하되 보라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36)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에게 오셨을 때도 먼저 이 고백을 드린 바 있었다. “이튿날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이르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29) 했었는데 제자들에게는 “보라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36b) 한 것의 약간의 차이이다.

앞에서 요한에게 몰려드는 모든 사람들을 향하여서는 여기 앞에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이라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을 덧붙여 고백한 것이었다. 앞에서도 약간의 언급을 하였겠지만 예수 그리스도는 이미 그의 공생애를 시작하시기 전부터 그 분이 왜, 세상에 오셨는 가가 분명히 선언되고 있는 것이다.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하나의 목적은 오로지 “세상 죄”를 해결하시려고 오셨는데 그것은 다른 어떤 방법도 아닌 자신이 그 세상의 죄는 지시기 위해서 라는 분명한 목적과 방법이 애당초부터 선언되고 있다는 말이다.

“세상 죄를 지고 가는”이라는 표현 자체가 이미 예수 그리스도의 삶의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표현이다. “지다[αἴρω, 들어 올리다, 치워버리다, 제거하다, 없이 하다]” 죄는 만천하에 드러나는 것이 공의이기 때문에 주님께서 다른 죽음보다도 십자가 위에 높이 들리신 것 자체가 세상의 죄를 지시는 당연한 모습일 수밖에 없다.

다른 어떤 방법도 아닌 자신이 그 죄를 친히 짊어지고 해결하셔야 했기 때문에 주님께서 그 사역을 시작하시기 전부터 침례 요한을 통해서 이 사실이 선언 된 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다.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29b) 아멘!

세례 요한은 자신의 제자들에게 자신이 제자를 잃어야 한다는 당연한 결과를 알면서도 그 제자들이 최종적으로 따라야할 대상을 기쁘게 소개하고 있다. “보라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36b)

예수 그리스도를 바로 아는 사람이라면 주변에 귀하게 여기는 사람들이나 가까운 사람들에게 어떻게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게 해주는 일이 우리 믿음의 사람들에게는 가장 중요하기 때문에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29b)라는 궁극적이고 최종적으로 소개할 수 있어야 한다.

“두 제자가 그의 말을 듣고 예수를 따르거늘”(37) ‘그 선생에 그 제자’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스승의 증거에 반응하는 제자들 역시, 요한의 가르침에 절대적 이었음을 볼 수 있다. 이것은 그들의 스승에 대한 절대적 신뢰임을 나타내는 것이기도 하다.

세상 말로는 ‘스승 만한 제자가 없다.’라는 말이 있지만 주님께서 오히려 이런 비유를 주신 바 있다. “제자가 그 선생보다 높지 못하나 무릇 온전하게 된 자는 그 선생과 같으리라”(눅6:40; 마10:24~25)는 말씀을 주고 계신다. 결국 요한의 제자들은 스승과 같은 신앙과 안목을 가졌고 스승이 원하는 대상을 따라 감을 볼 수 있다.

이 말씀은 자신의 위치나 입장보다도 설령 제자들에게 라도 그들이 궁극적으로 만나야 할 대상이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 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소개하고 이끌고 있음을 배운다.



Ⅱ. 빛의 질문과 초청,(38~40)

“예수께서 돌이켜 그 따르는 것을 보시고 물어 이르시되 무엇을 구하느냐 이르되 랍비여 어디 계시오니이까 하니 (랍비는 번역하면 선생이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와서 보라 그러므로 그들이 가서 계신 데를 보고 그 날 함께 거하니 때가 열 시쯤 되었더라, 요한의 말을 듣고 예수를 따르는 두 사람 중의 하나는 시몬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라”

세례 요한은 자신을 따르는 제자 둘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고백하고 소개하여 그분을 따르도록 인도하였고 스승에 대한 믿음을 가졌던 두 제자는 마침내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나섰다. 이를 되돌아 보신 주님께서 “예수께서 돌이켜 그 따르는 것을 보시고”(38f) 주님은 자신을 따르는 대상을 절대로 못 본체 하지 않으시며 결코 외면하시는 일이 없으시다.

마찬가지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오늘도 그 분을 따라 천국을 살고자 하는 주님의 백성들을 한결같이 돌아 보신다. 아무리 하찮은 사람일찌라도 믿음으로 그를 따르려는 자를 버려 두시는 분이 절대로 아니심을 확신할 필요가 있다. 주님께서 우리를 돌아 보시면 그 다음은 자연히 우리의 문제나 삶은 주님의 관심에 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 다음 순간이다. “물어 이르시되 무엇을 구하느냐”(38m) 이 말씀은 사도 요한을 통한 육신으로 우리와 같이 이 땅에 오신 로고스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첫 음성이라는 데도 큰 의미가 있고 이 질문은 단순히 세례 요한을 따르던 것을 그만 두고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당시에 두 제자에게만 하신 말씀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대부분의 영어 번역본들은 “What do you seek?(무엇을 찾느냐?)”고 번역하고 있다. 그러나 이 질문은 좀 더 깊은 의미로 보다 근본적인 의미를 담고 있는 주님의 질문 임을 알 필요가 있다. 여기 사용된 “구하다[ζητέω, ~을 하려고 하다, 찾아 다니다, 열망하다, 추구하다]”는 의미대로 단순이 주님의 동태를 살피며 궁금증을 가지고 있는 말이 아니다.

보다 근본적인 우리의 인생의 좌표를 묻고 계시는 주님의 물으심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주님께서는 본래의 스승이었던 침례 요한을 버리고 자신을 따라 나서는 두 제자에게 인생에 있어서 궁극적으로 얻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질문하신 것이다.

“너희는 일생에 있어 무엇을 실현하고 싶은 것이냐?; 무엇을 추구하며 인생이란 시간을 흘리고 있느냐?; 인생에 있어서 무엇이 되려고 사느냐?”는 보다 근원적인 질문을 하신 것임을 반드시 이해할 필요가 있다.

특히 이들이 요한이 아닌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나선 데서 이런 질문을 던지신 것에 좀더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이것은 오늘 우리에게도 같은 도전을 주고 계신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는 것의 다른 표현은 그를 따르는 것이며 닮는 것이다.

오늘 세상의 다른 분주함에도 불구하고 주님을 따르는 나를 향하여 묻고 계심을 들어야 한다. 그것도 요한 사도를 통하여 말씀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첫 음성이 이러한 질문이라는 데 더욱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나(우리)는 과연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며 인생을 사는 근본적인 이유는 무엇인가를 점검하라는 당부의 물음이다.

세상의 어떤 스승이나 선배들 보다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면서 추구하는 인생의 근본적인 이유는 과연 무엇인가! 단순히 길어야 120년 살 인생 동안의 안녕과 평안이나 사고 없는 무사안일이 단순히 주님을 따르는 이유인가! 스스로에게 질문할 차례이다.

“무엇을 구하느냐” 나의 인생을 통하여 최종적으로 실현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이며 사실 그것이 사람으로서는 실현 불가능하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인지 물으신다.

여기에 대한 제자들의 답변이 “이르되 랍비여 어디 계시오니이까”(38m) ‘너희의 인생에서 실현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이냐?’ 물으시는 주님께 어울리지 않는 답변처럼 들리기도 하지만 이 말씀 역시 저들의 신앙적 고백이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급한 경우에는 “주님[Κύριος]” 라는 칭호가 튀어나오는 경우(행9:5)와 잘 알지는 못하지만 존경스러운 대상을 향하여 “ῥαββί, 랍비[나비, נביא, 예언자, 선지자]”라는 표현을 사용하기도 한다. 이 말은 사실 음역 만을 헬라어로 사용한 것이기 사용한 것이기 때문에 당시에 아람어에 생소한 이 요한복음을 읽는 독자들에게 친절히 이 용어를 설명까지 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랍비는 번역하면 선생이라”(38b)

중요한 두 제자의 질문 “랍비여 어디 계시오니이까”(38m)라는 질문은 39절의 “예수께서 이르시되 와서 보라 그러므로 그들이 가서 계신 데를 보고 그 날 함께 거하니 때가 열 시쯤 되었더라”는 말씀과 함께 자신의 운명을 주님과 함께 하겠다는 신앙적 고백이다.

이 말씀과 더불어 꼭 생각해야 하는 것은 마태복음의 “한 서기관이 나아와 예수께 아뢰되 선생님이여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따르리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하시더라”(8:19~20; 눅9:57~58)는 말씀과 더불어 이해 해야만 한다.

인류의 죄를 해결해 주시러 오신 우리 주님은 이 우주가 다 주님의 것이지만 이 지상에 오셔서 사실 머리 둘 곳도 이 세상에 가지고 계시지 않으셨다. 그러므로 주님의 질문과 제자들의 답변은 오늘 같은 믿음으로 주님을 따르는 우리의 삶이 어떠해야 함을 제시해 주고 있는 교훈이다.

이 두번째 제목의 마지막 v40 “요한의 말을 듣고 예수를 따르는 두 사람 중의 하나는 시몬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라”고 기록되고 있는데 사도 요한은 여기서도 자신의 이름을 숨기고 안드레만을 거론하고 있는 것도 이 복음서가 1세기 말엽에 기록되었다는 것과 함께 다른 기록들에 안드레의 사도로서의 면모가 나타나지 않는 것을 보완해 주는 의도가 있기도 하다.

결국 요한은 자신의 이름은 숨기면서도 교회 역사에 이름이 보이지 않는 안드레가 예수 그리스도의 첫 제자 된 사실을 확인시키고 있는 샘으로 나보다 남을 낫게 여기라는 바울과 같은 사랑의 정신을 엿볼 수 있는 아름다운 모습이다.



Ⅲ. 제자의 그리스도께 초대,(41~42)

“그가 먼저 자기의 형제 시몬을 찾아 말하되 우리가 메시야를 만났다 하고 (메시야는 번역하면 그리스도라), 데리고 예수께로 오니 예수께서 보시고 이르시되 네가 요한의 아들 시몬이니 장차 게바라 하리라 하시니라 (게바는 번역하면 베드로라)”

이 말씀 역시 앞의 말씀과 연결해서 생각해야 할 필요를 느낀다. “그가 먼저 자기의 형제 시몬을 찾아 말하되 우리가 메시야를 만났다 하고”(41) 여기에 ‘그’는 당연히 ‘안드레’를 말하는 것이고 앞에서 말한 대로 교회 역사를 유대인과 이방인의 복음 확산으로 생각할 때 양대 산맥과 같은 베드로와 바울을 생각할 수 있고 오순절과 더불어 교회의 탄생과 땅끝을 향한 교회의 선두 역할을 지휘하고 이끌었던 베드로가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가 된 것은 이 안드레에 의해서 라는 귀중한 역할을 연관 시키고 있다.

그러면서도 “그가 먼저 자기의 형제 시몬을 찾아 말하되 우리가 메시야를 만났다 하고”(41) 라는 기록은 우리에게 또 다른 도전을 주는 교훈이다. 오늘 우리 역시 메시야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로 만났다면 그를 가장 가까운 형제에게 자신이 만난 주님을 전할 필요가 있는 것은 그 대상 중에 베드로처럼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하나님의 복음의 일꾼이 나올 수도 있다는 본문의 결과를 보는 데서 그렇다.

이것은 주님을 만난 안드레의 행동의 진행을 통해서도 우리를 교훈하고 있다. “그가 먼저 자기의 형제 시몬을 찾아 말하되 우리가 메시야를 만났다 하고”(41)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나서 ①먼저 ②자기 형제인 베드로를 찾아 갔고 자신이 요한과 더불어 ③그리스도를 만났다고 단순한 고백을 한 것이지만 여기에 우리의 가장 실제적인 사명의 실천이 나타나고 있다는 사실이다.

당연히 ‘메시야를 만났다’고 소개하는 것은 나의 죄를 해결하시기 위해 기름부음을 받은 구세주이신 주님을 만났다는 고백이 뒤에 이어지는 해설의 내용에서 이해된다. “메시야는 번역하면 그리스도라” 앞에서 “랍비는 번역하면 선생이라”(28b)는 번역의 의미보다도 더욱 중요한 뜻을 가진다.

‘랍비’는 단순한 세상의 스승을 의미할 수도 있지만 ‘메시야’ 즉, “기름부음을 받은 자”는 죄인이었던 나에게 영원을 열어주는 희생양이라는 데 비교될 수 없는 중요성을 깨닫게 된다. “데리고 예수께로 오니…”(42f) 안드레는 자신의 경험을 소개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베드로를 예수 그리스도께 데려오는 데까지 역할을 한다.

“예수께서 보시고”(42m) 앞의 v38f “예수께서 돌이켜 그 따르는 것을 보시고” 옛 스승이었던 침례 요한을 떠나서 자신을 따르는 안드레와 요한을 보셨던 주님은 이제 안드레가 데리고 온 베드로를 보시고 장래에 그가 교회 속에 얼마나 귀중한 역할을 할 것을 내다 보시며 역시 그에게 말씀을 주신다.

“네가 요한의 아들 시몬이니 장차 게바라 하리라”(42b)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에서 자신을 누구라 하는가는 주님의 질문에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16:16)라는 베드로의 고백을 들으시고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17b)고 칭찬 하셨는데 “바요나 시몬아” 하신 표현이 바로 본문의 “요한의 아들 시몬”이라는 말과 꼭 같은 표현이다.

물론 ‘시몬[Σίμων]’이라는 말은 히브리 말로 반석이라는 말이고 “장차 게바라 하리라”는 표현에서 ‘게바[Κηφᾶς]’ 아람어로 역시 ‘반석’이라는 의미임을 사도 요한은 역시 친절히 설명하고 있다. “게바는 번역하면 베드로[Πέτρος]라”

히브리어든 아람어든 그리스어든 베드로의 이름은 악의 세상 권세가 흔들거나 바꿀 수 없는 하나님의 집인 교회의 바탕이 됨을 주님께서 이미 보시고 그를 통해서 이 일을 진행시키셨으며 오순절날 이 땅에 교회를 탄생시킨 베드로가 어떻게 그런 역할을 하게 되었는가를 이 요한복음을 읽는 모든 사람들에게 설명하고 있다.

결과적으로는 안드레가 먼저 주님을 만나 감격하고 확신한 다음에 베드로를 데리고 갔고 베드로의 내면을 들여다 보신 주님께서 인류 구원의 역사 속에 베드로를 크게 쓰심으로써 한사람을 주님께 데려 옴이 이렇게 엄청난 일을 할 수 있음도 복음의 완성과 확산에는 별로 나타나지 않았던 안드레의 귀중한 역할을 오늘 우리가 배우는 것이다.

이런 이유에서 내가 주님의 나라인 교회 속에서 무엇을 하고 못하고 하는 것보다 필요한 한 사람을 이끄는 것이 상상할 수 없는 일을 하게하는 역할도 귀중함을 이 안드레의 역할 속에서 배운다.

우리 모두 자신의 입장이나 자존심보다 중요한 것은 우리와 꼭 같은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에 대한 확신과 감격의 고백이 중요하다. 때로는 나 자신이 존경의 자리에서 밀려난다 할지라도 이것은 영원이 걸린 중요한 확신 임을 누구에게나 고백할 수 있어야만 한다.

나름대로 이런 고백을 가지고 주님을 따른다는 우리 각자에게 주님께서 오늘 물으신다. “너의 삶을 통하여 무엇을 이루고 세우기 위하여 나를 따르느냐?” 여기에 우리 각자는 무어라 답하려 합니까?

우리가 비록 큰 일을 할 수는 없지만 내가 확신한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가까운 누구에게 전한다면 주님께서는 그의 나라인 교회 속에서 그를 베드로처럼 귀중한 인물로 쓰실 수도 있으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