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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배 전도자
요 1:43~51 2019-02-10
이보다 더 큰 일을 보리라,  
앞에서 요한과 안드레는 그들의 첫 스승이었던 세례 요한에 의해 주님께 이끌렸지만 여기서는 앞의 두 제자와 같은 고향의 사람을 주님께서 직접 부르심을 본다. 항상 이런 내용을 볼 때 마다 조금은 의아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복음을 위해서 제자로 부르신 자들이 예루살렘이나 베들레헴 같은 곳의 태생들로 사람들로부터 인정을 받고 호감을 얻을 수 있는 율법이나 OT에 이미 익숙해져 있는 공부한 사람들이 아닌 요즘 우리 표현으로 불학무식(不學無識)한 갈릴리 출신의 어부들인가 하는 것이다.

요한복음의 또다른 특징 중 하나는 공관복음서들이 주로 갈릴리를 중심 한 주님의 복음의 활동을 소개하고 있는 것과는 다르게 공관복음서에 빠져있는 예루살렘의 사역을 주로 다루고 있다는 것이다.

사실 메시야의 탄생이 베들레헴이고 이스라엘의 거룩한 도시로 여겨지는 예루살렘이 이스라엘의 주 관심사였다면 갈릴리를 비롯한 북쪽 이스라엘은 유대 전통을 주장하는 사람들에게는 죄악시 되는 경향이 없지 않았지만 주님의 활동무대가 주로 이 소외된 갈릴리에서 이루어진 공과복음들이 기록하는 것도 분명히 의미는 있다.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과 요단 강 저편 해변 길과 이방의 갈릴리여, 흑암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빛이 비치었도다 하였느니라”(마4:15~16; 사9:1~2)

오늘 말씀의 시작도 이 갈릴리로 나가시려 하신 주님의 세번째의 제자 삼으심을 기록하고 있지만 앞의 요한과 안드레, 그리고 다시 안드레는 베드로를 주님께 데려 왔다면 여기서는 주님께서 직접 빌립을 부르셨고 이 주님의 부름을 받은 빌립이 나다나엘을 주님께 초청하는 데 이루어진 독특한 상황 전개를 기록하고 있다.

율법의 깊이를 가진 나다나엘이 주님의 나사렛 사람이자 요셉의 아들이라는 빌립의 소개를 자의적으로 해석하고 무시하려 하지만 마침내 “와보라!”는 빌립의 사실적인 이끎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게 되고 자신을 꿰뚫어 보시는 주님을 인정 하고야 마는 독특한 상황을 보는 데서 선입견을 가진 사람일찌라도 주님을 바로 만나기만 하면 예수께 붙잡혀 버리는 바람직한 모습을 이 말씀에서 모범으로 본다.

여기에서도 독특한 몇몇 상황들을 보면서 먼저 주님을 만나 확신한 사람이면 역시 사람들의 편견을 떨쳐버리기에 충분하신 주님의 권위를 오늘도 믿고 신뢰하며 그런 사람들을 주님께 바로 이끌기 위해서 나 자신이 먼저 큰 확신이 필요함을 배우게 된다.



Ⅰ. 빌립의 초청,(43~45)

“이튿날 예수께서 갈릴리로 나가려 하시다가 빌립을 만나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빌립은 안드레와 베드로와 한 동네 벳새다 사람이라, 빌립이 나다나엘을 찾아 이르되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이를 우리가 만났으니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니라”

앞의 요한이나 안드레나 베드로는 다른 사람들의 고백이나 소개로 주님의 제자가 된 반면에 여기 소개되는 빌립(lover of horses)은 주님께서 직접 부르셨다고 하는 데서 또 다른 의미를 가질 수 있다. 또 베드로, 요한, 야고보처럼 복음서들에 자주 등장하지는 않지만 중요한 역사가 있을 때마다 거론되는 제자다.

특히 이 요한복음에서 이 빌립이 벳세다의 언덕에서 있었던 저 유명한 오병이어(五兵二魚)의 기적을 기록하는 데서도 주님께서 “우리가 어디서 떡을 사서 이 사람들을 먹이겠느냐”(6:5) 물으셨고 “각 사람으로 조금씩 받게 할지라도 이백 데나리온의 떡이 부족하리이다”(v6) 라고 답변했고 안드레는 한 어린아이가 가진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소개하여 기적을 일으킨 사건의 언저리에 등장한다.

12:20~22에는 유월절에 예루살렘에 올라온 헬라인 몇 명이 예수님을 보고싶다고 했을 때 안드레와 함께 그들을 주님께 데려가기도 했지만 14:8에서는 “빌립이 이르되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 라는 부탁을 주님께 드린 것으로도 유명하다.

“이튿날 예수께서 갈릴리로 나가려 하시다가 …”(43f) 앞에서도 언급한대로 같은 이스라엘 안에 있으면서도 사마리아나 갈릴리는 이스라엘 속에서 무시당한 이유는 그들이 앗수르의 침략을 당한 이후로 단일민족의 가치를 귀중히 여기는 이스라엘사람들에게 다민족이 된 이 지역의 사람들은 외면당하고 무시 당하는 곳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예수께서 갈릴리로 나가려 하시다가” 하신 것은 세상 죄를 지시기 위해서 이 역사 속에 내려오신 주님은 오히려 외면당하는 이들이 더 긍휼과 연민의 대상이었기 때문이다.

“… 빌립을 만나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43b) 주님께서 제자들을 직접 부르신 사실들은 공관복음에서는 더러 나타나는 사실들이다. 즉각적으로 따르는 제자들이 있기도 했지만 당장에 해야할 일을 처리한 후에 따르게 해 달라고 미룬 사람도 없지 않았다.(마8:21~22; 눅9:59~60)

주님께서 빌립을 어떻게 만나셨는지 정확하게는 기록되고 있지 않지만 주님께서 갈릴리로 가시려 했고 “빌립은 안드레와 베드로와 한 동네 벳새다 사람이라”(44) 한 것으로 봐서 그 만남이 자연스러울 수도 있었겠고 베드로, 요한, 야고보, 안드레와 같은 동네 사람이기는 하지만 빌립의 직업에 대한 짐작은 다만 어부들과 한 동네 사람이라는 것으로 정확한 판단은 불가능하다.[어부, 생선장사-계산에 밝은 것 때문에]

그러나 빌립은 주님으로부터 직접 부르심을 받은 나름대로의 자긍심이 있었기 때문에 조금은 성경적인 깊이를 가진 것으로 보이는 나다나엘에게 그리스도를 소개하게 되지 않았나 하는 이해가 되기도 한다.

그러나 더 놀랄만한 사실은 빌립이 단순히 주님의 부르심을 받은 것으로 메시야로 믿고 나다나엘에게 주님을 증거한 것이다. “빌립이 나다나엘을 찾아 이르되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이를 우리가 만났으니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니라”(45)

빌립이 나다나엘을 우연히 만난 것이 아니라 찾아갔다는 것과 그래도 OT의 율법을 깊이 알고 있는 나다나엘에게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이를 우리가 만났으니”라고 증거한 것이다. 물론 빌립의 인물 됨은 자세히 나타나있지 않지만 율법을 상고하고 연구하는 나다나엘에게v45절의 간략한 의미라면 ‘OT성경에 예언된 메시야를 내가 만났다.’ 라는 의미다.

그러나 거기에 조금은 이해가 쉽지 않은 표현이 “…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니라”(45b)라는 증거가 나다나엘에게는 받아들이는 것이 쉽지 안았던 것 같다. OT의 메시야 예언을 정통적으로 알고 있는 사람들은 메시야의 탄생지가 [베들레헴]이라는 것은 일반적이었다.

이러한 공통적이고 일반적인 OT성경적 믿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 예수께서 자란 나사렛은 그들이 부정(不淨)하게 여기는 지역으로 메시야의 활동무대가 될 수 없다고 믿었기 때문에 유대종교지도자들 조차 예수 그리스도의 그 많은 기적과 교훈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메시야 됨을 부정하게 된 이유였기 때문에 나다나엘의 반응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었다.

빌립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르심을 받고 즉각적으로 주님께서 이스라엘이 그토록 기다리던 그리스도이심을 확신할 수 있었고 자신이 확신하는 주님을 다른 사람에게 자신의 할 수 있는 표현대로 증거하였다. 어쩌면 주님에 대한 반응은 그때나 지금이나 이렇게 각각 다를 수 있음을 배운다.



Ⅱ. 사람을 꿰뚫어 보시는 주님,(46~48)

“나다나엘이 이르되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 빌립이 이르되 와서 보라 하니라, 예수께서 나다나엘이 자기에게 오는 것을 보시고 그를 가리켜 이르시되 보라 이는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 나다나엘이 이르되 어떻게 나를 아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을 때에 보았노라”

빌립으로부터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이를 우리가 만났으니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니라”(45)는 소개를 받은 나다나엘은 자신의 가진 지식에 근거하여 일단은 부인(否認)부터 하고 있다.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46f)

“나다나엘[Ναθαναήλ, נתנאל, Nethanel, 하나님께서 주신]”에 대한 인물 됨에는 그의 이름과 함께 여러가지 이야기들이 있다. 12사도들의 이름 가운데 직접적으로는 이 이름이 없는 데서 “바돌로매[Βαρθολομαῖος, [בר, bar아들 + תלמי, Talmay, 농부, 농부의 아들]”이라거나 ‘이름의 의미’와 함께 ‘하나님의 선물(gift of Jehovah)’이란 의미의 “마태[Ματθαῖος, ]”의 다른 이름이라고 하기도 한다.

빌립으로부터 주님을 소개받은 나다나엘의 반응은 많은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 받았을 때 가장 일반적인 모습이라고 이해된다. 사람들이 모두 빌립처럼 바로 확신하고 기쁨으로 주님을 증거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만은 이 나다나엘처럼 기존에 가지고 있던 선입견이나 자신이 알고 있는 성경 지식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부정해 버린다면 대단히 불행한 사실이다.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46m) 이것은 비단 나다나엘 뿐만 아니라 OT성경을 알고 있는 당시의 일반적인 사람들이 한결같이 예수 그리스도에 대응하는 반응이었다. 가장 대표적인 예가 바리새인들과 니고데모와의 대화에서 나타나는 내용인데 역시 이 요한복음이다. “그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너도 갈릴리에서 왔느냐 찾아 보라 갈릴리에서는 선지자가 나지 못하느니라 하였더라”(7:52)

당시의 OT성경을 충분히 연구하고 이해하는 사람들의 지나친 편견은 당시의 로마의 식민지 체제 때문이기도 하였겠지만 메시야를 왕이나 선지자로만 이해하여 자신을 제물로 삼아 인류의 죄를 해결할 대제사장적인 역할을 지나쳤다는 사실이다.

메시야 예언을 가장 많이 하고 있는 이사야서에서 예언된 희생양으로 취급을 당하는 대표적으로 53장 같은 부분을 바로 이해하고 있지 못했고 이것은 성령의 부음을 받기 이전의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 특히 사도들조차도 마찬가지였던 것을 볼 수 있다. “그들이 모였을 때에 예수께 여쭈어 이르되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 하니”(행1:6)

그러나 성경보다는 죄에 대한 저주를 충분히 느끼고 있었던 이스라엘로부터 저주 받은 사람들로 취급되었던 갈릴리나 사마리아를 비롯해서 이스라엘 밖의 사람들이 그리스도에 대해 감격하고 감사했던 부분이 바로 세상의 죄를 친히 담당해 주신 부분이었는데 성경 밖에서는 어떤 종교에서도 이러한 대속의 개념은 없었기 때문이다.

이런 부정적인 나다나엘에게 빌립은 가장 단순한 답변을 준다. “와서 보라!”(46b) 신앙만큼이나 자신이 경험하고 체험해야 바로 알아지는 것도 없을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와서 보라!”를 단순히 ‘교회당의 예배나 집회에 참여해보라!’는 표현으로만 이해하고 가르치는데 이 “와서 보라!”는 의미는 “네가 직접 그리스도를 만나보라!”는 의미임을 알아야 한다.

우리가 아무리 호소력을 가진 달변가(達辯家)라고 해도 어떤 한 사람 속에 예수 그리스도를 이해시키고 설명하는 것은 단순한 육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에 불가능하다. 그것이 불가능할 때는 상대로 하여금 직접 주님을 만나볼 수 있도록 빌립처럼 직접 만나 볼 것을 권하는 것이다.

“와서 보라!”는 또다른 표현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변화되고 달라진 자신의 삶 속에 그 사람을 참여시켜서 간접적으로 그리스도를 맛보게 하는 것으로 베드로전서3:15의 교훈과 같은 의미이기도 하다.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준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

이런 이유 때문에 교회의 직분자들에게는 가정의 모범적인 다스림을 자격으로 다루고 있는 것이다.(딤전3:4, 12; 딛1:6)

나다나엘은 이 단순한 빌립의 초청에 그대로 순종하는데 이것이 하나님께 은혜 받을 자세이다. “예수께서 나다나엘이 자기에게 오는 것을 보시고 그를 가리켜 이르시되 …”(47f) 여기에 사람을 꿰뚫어 보시는 하나님이심을 확인하게 된다. “내가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삼상16:7)

“… 보라 이는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47b) 이 표현은 하나님의 참 백성이 어떤 사람인가를 말씀하시는 것이다.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라는 두가지가 중요하다.

역으로 말하면 ‘속에 간사한 것이 없는 진실한 사람이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요 하나님의 백성이다.’라는 의미가 된다. 주님께 직접 이런 평가를 들은 나다나엘은 감격하며 되묻는다. “어떻게 나를 아시나이까?”(48) 그러나 이것은 나다나엘만의 감격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고백이다.

사람들은 날 몰라주고 오해한다고 할지라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나의 나 됨을 누구보다도 분명히 아시고 평가하실 분이시다. 이런 이유와 고백 속에서 그리스도인들은 외부의 평가보다도 자신이 섬기는 주님께 충실하려고 최선을 다하게 되는 것이다.

여기에 대한 주님의 답변은 다소 가볍게 들린다.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을 때에 보았노라”(48b) 유대인들은 주로 잎이 크고 촘촘하여 햇볕을 잘 막아주는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성경을 읽거나 말씀을 묵상하는 일들을 하는 데서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을 때에 보았노라,”시는 표현은 나다나엘이 성경을 상고하며 묵상하는 것을 보셨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실상은 주님은 우리 각 사람의 마음의 자세와 처한 상황을 가장 바르게 진실되게 보시고 판단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어떤 경우 애매한 고난과 말을 들어도 굳지 변명하거나 따지는 것보다는 침묵할 수 있는 것이 또한 그리스도인이다.

이런 부분을 상고할 때마다 “부당하게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이는 아름다우나,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그러나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벧전2:19~20)는 말씀으로 위로 받을 수 있다.



Ⅲ. 나다나엘의 고백과 약속,(49~51)

“나다나엘이 대답하되 랍비여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너를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보았다 하므로 믿느냐 이보다 더 큰 일을 보리라, 또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을 보리라 하시니라”

마지막으로 보는 이 말씀은 자신을 꿰뚫어 보시고 진실을 알아주시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나다나엘의 고백과 함께 그를 향한 주님의 약속이다. “… 보라 이는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47b)라고 진실을 알아봐 주시는 주님께 나다나엘은 당시의 최고의 예우인 ‘랍비’라는 칭호와 함께 메시야이심을 고백하고 있다.

“…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49) 이 고백은 저 유명한 베드로의 신앙고백과 같은 의미이다. “…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16:16) 공관복음에서는 십자가에 고난당하시는 그리스도를 조롱하는 표현으로 나타나기도 하지만(마27:42; 막15:32) 이 요한복음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시기 위하여 마지막으로 유월절에 예루살렘에 나귀를 타고 입성하시는 주님을 향한 군중들의 고백이기도 하다. “…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곧 이스라엘의 왕이시여”(12:13b)

시편84:3에 보는 대로 “나의 왕, 나의 하나님, 만군의 여호와여”라는 고백과 함께 하나님은 누구보다도 선택된 이스라엘의 왕이시고 이러한 믿음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바르게 믿음으로 고백 될 때는 그들의 삶에 문제가 없었음을 OT성경에서 볼 수 있다.

오늘 하나님의 백성이 된 우리 또한 다르지 않다. 나를 위해 십자가에 희생되시고 죽으시고 장사(葬事)되셨다가 부활하시고 승천하실뿐만 아니라 이 역사 속에 다시 오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의 운명을 쥐고 계신 살아계신 하나님으로 고백 되고 살고 있다면 같은 고백을 드리고 있는 나다나엘과 같은 대우와 칭찬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 대한 주님의 말씀은 조금은 인간적인 나다나엘의 한계를 지적하신다. “… 내가 너를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보았다 하므로 믿느냐 이보다 더 큰 일을 보리라”(50) 이 표현은 ‘내가 너를 좋게 봐 주고 평가한다고 믿느냐! 나를 사실 그대로만 믿는다면 그것과 비교될 수 없는 큰 일도 보게 될 것이다.’ 말씀하시는 것이다.

나다나엘 뿐이겠는가! 우리가 바른 믿음의 고백과 순종의 삶을 주님 오실 때까지 지속한다면 우리가 듣고 읽고 보았던 지금까지 않았던 것보다 비교될 수 없는 우리 자신에게 나타나는 역사들을 보게 될 것이다. 믿습니까!

여기에 덧붙여지는 말씀이 “진실로 진실로[ἀμὴν ἀμὴν λέγω ὑμῖν]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을 보리라 하시니라”(51) 사실 이러한 장면은 창세기28:10~22에 기록된 대로 옛 지명은 ‘루스’였지만 ‘벧엘’이라는 이름으로 바꾼 야곱의 감격이 연상된다.

야곱의 경험을 나다나엘에게 말씀하시는 것은 아직까지도 단순히 육신적인 상황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이해하며 고백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이 세상에서 볼 수 없는 열린 하늘의 영광을 감동으로 경험하게 될 것이라는 말씀이다. 이 약속 역시 하나님의 진리를 순종하고 따르는 우리 모두에게 같은 약속이다.

바울의 고백으로 대신할 수 있는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고전13:12)

우리가 이 땅에서 하나님의 나라나 영광을 맛본다고 해도 그것은 마치 청동 거울을 보는 것만큼 제한적일 것이지만 미래에 주님께서 죄와 상관없이 다시 오셨을 때 변화된 삶 속에서 경험되어는 것들은 우리의 육체에 머물며 생각하거나 판단할 수 없는 놀랍고 신기한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

이것을 기대라고 소망한다면 빌립과 같이 단순함으로 믿고 받아서 전하고 나다나엘처럼 고백하고 삶으로 순종하는 믿음으로 산다면 이제까지 믿음 속에서 경험했던 어떤 것보다 더 놀라운 하나님의 약속을 보게 될 것이다. 믿으시기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