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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배 전도자
요 2:1~11 2019-02-17
제자들이 그를 믿으니라.  
오늘 본문 v11에 말씀처럼 “예수께서 이 첫 표적을 갈릴리 가나에서 행하여 그의 영광을 나타내시매”라고 기록된 것처럼 공관복음에 그렇게 흔한 기적의 역사 중에서 이 요한복음은 단 7가지의 기적을 기록하고 있는데 이 표적들은 모두가 우리 사람에게 가장 실제적인 필요와 생명과 관련되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주님 되심을 나타내는 내용들을 확인할 수 있다.

[σημεῖον,(sḛmeion) 자연의 일반 법칙에 반대되는 일, 표적, 이적 등등 ← σῆμα, 표, 지시] 사건대로 역사적이면서 인간으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초자연적인 것으로 표면에 나타나는 의미보다 내면에 더 깊은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이면서 표적은 목적보다 의미로 기여한다.

행동을 통한 ‘비유’이고 예수님의 모든 이적은 바로 그분이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증거하는 것으로 이러한 면에서 표적이 반드시 초자연적인 것은 아니다. 특히 이 요한 복음 속에서의 표적은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명을 실증하고 임마누엘을 선언하는 증거이다.

NT성경에 특히 복음서들에 그 많은 기적들(77회)이 기록되고 있지만 단 7가지의 이적을 기록하고 있는 이 요한복음에 “σημεῖον”이란 표현이 가장 많이 기록되고 있는 것도 독특하다.(Mt.13; Mk.7; Lk.11)

이적의 목적: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서 이 책에 기록되지 아니한 다른 표적도 많이 행하셨으나,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20:30~31)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으로서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숨쉬셨던 모두가 신비로 가득 찬 이적이었다.

눅2:12 “너희가 가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누인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니라 하더니” (34)“시므온이 저희에게 축복하고 그 모친 마리아에게 일러 가로되 보라 이 아이는 이스라엘 중 많은 사람의 패하고 흥함을 위하며 비방을 받는 표적 되기 위하여 세움을 입었고”

사도들의 시대에 성령에 의한 잉태로부터 하늘로 승천하시기까지의 예수님의 이야기는 그것을 받아들이는 모두에게 하나님께서 친히 주신 표적이었다. 사람들에게 보여진 표적이 전부가 아니며 보여진 표적이 사람을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지상에서 “삶”이라는 표적이 인간을 구원하는 표적으로 십자가와 부활이 그 절정인 것이다.

오늘 요한복음에 나타나는 첫 표적을 통하여 제자들과 같이 오늘 우리의 믿음을 키우고 우리 삶 속에 하나님의 기적을 불러들이는 놀라운 천국의 삶이 되었으면 한다.



Ⅰ. 흥을 잃어버린 잔칫집,(1~4)

“사흘째 되던 날 갈릴리 가나에 혼례가 있어 예수의 어머니도 거기 계시고, 예수와 그 제자들도 혼례에 청함을 받았더니, 포도주가 떨어진지라 예수의 어머니가 예수에게 이르되 저들에게 포도주가 없다 하니,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나이다”

요한 사도는 마치 에스겔(서른째 해 넷째 달 초닷새)의 예언처럼 계속해서 사건마다 날들(사흘째 되던 날)을 언급하고 있는 것도 다른 복음서들이 주님의 움직이심을 기록하고 이는 것과는 다르게 어떤 일들의 정확성을 나타내는 것으로 역시 독특하다.

“갈릴리 가나에 혼례가 있어 예수의 어머니도 거기 계시고, 예수와 그 제자들도 혼례에 청함을 받았더니”(1~2) 역시 때뿐만 아니라 지역도 정확하게 언급하는 요한 사도의 배려로 보이는데 나중 두번째 표적을 언급하면서 이 장소를 언급하기도 한다. “예수께서 다시 갈릴리 가나에 이르시니 전에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곳이라 왕의 신하가 있어 그의 아들이 가버나움에서 병들었더니”(4:46)

이 혼례가 친인척의 혼례였는지 분명치는 않지만 예수님이나 어머님을 비롯한 제자들의 참여로 볼 때 분명히 그냥 지나치는 결혼식은 아니었던 것 같고 이러한 사실은 마리아가 이 혼례식의 문제를 주님께 부탁하는 것으로 봐서도 분명히 친인척의 결혼식이라는 짐작을 갖게 한다.

어쨌거나 이 혼례식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함께 하셨다는 사실이 다행이면 다행이고 이 새로운 부부의 행운이었고 더 깊이 이해한다면 하나님께서 이 결혼식을 통하여 한 가정의 출발을 복 주실 뿐만 아니라 그의 아들을 세상에 영광스럽게 드러내시려고 계획하시고 예정하셨다는 것이다.

“포도주가 떨어진지라”(3ff) OT에 “잔치는 희락을 위하여 베푸는 것이요 포도주는 생명을 기쁘게 하는 것이나 돈은 범사에 이용되느니라”(전10:19)라고 솔로몬이 말하는 것처럼 잔치는 기쁨을 전제로 하고 “포도주는 생명을 기쁘게 하는 것”이라는 이론이 물론 영적으로 이해되어져야 하겠지만 이스라엘 속에서는 혼인예식에도 당연한 것을 짐작하게 된다.

잔치의 흥청거림이 포도주의 역할로 더 흥겨워 질 수도 있는데 이 복된 혼례식에 흥겨움의 도구가 바닥나 버린 것은 분명 안타까운 상황이었기 때문에 거기에 마리아가 개입함을 본다.

이스라엘의 혼례식은 사실 우리와도 다른 것이 결혼을 한 신랑에게는 1년간의 모든 의무에서 면제됨으로 아내를 기쁘게 하라는 율법의 조항에서처럼 예식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예식이 1년간이나 지속된다고 볼 수 있다. “사람이 새로이 아내를 맞이하였으면 그를 군대로 내보내지 말 것이요 아무 직무도 그에게 맡기지 말 것이며 그는 일 년 동안 한가하게 집에 있으면서 그가 맞이한 아내를 즐겁게 할지니라”(신24:5)

이러한 행복의 시작의 시점에서부터 원인이 나와있지는 않지만 기쁨의 보조역할을 하는 포도주가 바닥나 버린 것은 분명 안타까움 일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예수의 어머니가 예수에게 이르되 저들에게 포도주가 없다”(3)고 안타까움을 호소한다.

사실 기쁨의 동산이라는 의미의 에덴에서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갈비뼈로 만들어 데려온 하와를 향해 감격하는 표현이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창2:23)는 감격의 고백을 하였지만 에덴에서 쫓겨난 아담과 하와는 어떤 좋은 일이라고 해도 에덴에서의 감격은 맛볼 수 없고 이러한 혼인은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

더욱이 요즘은 행복을 위해 결혼하는 일 자체가 부담을 크게 안게 되고 그런 이유에서 가정들은 ‘검은 머리가 파뿌리가 될 때까지 …”는 언약까지도 어겨지고 있는 상황들은 안타까운 일이다. “저들에게 포도주가 없다”신 마리아의 안타까움도 아마 이런 안타까움을 마음에 가지고 하는 호소였을 것이다.

여기에 대한 예수님의 답변이 조금은 냉담하게 들리기도 한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나이다”(4)

물론 이 반응도 나름대로 안타까움이 담겨 있다. 어머니를 향해 ‘어머니’가 아닌 ‘여자여’라는 표현도 얼핏 보기에는 몰인정하고 냉담하게 들릴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나 십자가에 죽으시면서조차 어머니를 요한에게 부탁하는 것을 보면 분명히 만고의 효자임이 분명한 주님이시다.(19:26~27)

그러나 주님께서 한 여인의 아들로서 보다는 죄로 인하여 기쁨을 잃어버린 인류의 진정한 행복을 찾아 주시려고 사람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의 어머니의 입장이기 보다는 기쁨을 잃어버려서 혼례식조차 안타깝게 되어버린 이 세상에 기쁨을 회복시켜 주시려고 오셨지만 아직 하나님 아버지의 예정하신 때가 이르지 않았음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이 혼인 예식은 기쁨을 잃어버린 이 세상 속의 잔치의 모형이었다면 다행히도 거기에 기쁨의 근원이 되시는 예 그리스도께서 거기에 계셨다는 것이 사실 다행이었다는 감사를 갖는다.



Ⅱ. 메시야의 첫 이적,(5~8)

“그의 어머니가 하인들에게 이르되 너희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 하니라, 거기에 유대인의 정결 예식을 따라 두세 통 드는 돌항아리 여섯이 놓였는지라,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항아리에 물을 채우라 하신즉 아귀까지 채우니, 이제는 떠서 연회장에게 갖다 주라 하시매 갖다 주었더니”

이 부분은 처음에는 좀 불안정한 상황이 믿음의 자리로 회복되고 마침내 하나님의 아들의 첫 이적이 빛을 발하는 상황을 보게 되는데 이것은 분명히 상황에 관계없이 우리에게 제사보다도 믿음을 요구하시는 하나님의 명령이 유효함을 깨닫게 된다.

“그의 어머니가 하인들에게 이르되 너희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 하니라”(5) 이러한 마리아의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뢰가 과연 어떻게 가능했을까?’를 생각해 보게 되는데 이런 근거들을 마리아와 요셉은 이미 여러 번 경험했던 것으로 성경이 기록하고 있다.

탄생 때 천사들의 지시를 받고 예수를 방문한 목자들의 고백을 마음에 두었고(눅2:19) 예수께서 12살쯤 되었을 때의 유월절에 예루살렘 성전에 갔다가 잃어버리고 되찾아 만나 “아이야 어찌하여 우리에게 이렇게 하였느냐 보라 네 아버지와 내가 근심하여 너를 찾았노라”(눅2:48) 했을 때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v49) 하는 응답에서도 이 일을 마음에 두었다고 기록하고 있다.(v51)

그럼으로 예수의 수태 때 자신에게 와서 예고한 가브리엘 천사로부터 탄생에서 자라면서 경험했던 모든 일들을 통해서 마리아는 자신의 몸을 통해서 났지만 자신의 아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역사와 약속을 마음에 품고 있었기 때문에 언젠가는 인류의 문제들을 해결할 하나님의 아들임을 확신하고 있었던 것으로 기대하고 있었다. 특히 예수께서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나이다”(4b)라는 말씀에도 그 때를 기다리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거기에 유대인의 정결 예식을 따라 두세 통 드는 돌항아리 여섯이 놓였는지라”(6) 이것은 당시의 유대인들의 잔치에서는 빠질 수 없는 가장 일반적인 풍경 이었을 것이다. 자신의 잔치를 찾은 손님들에게 하인들을 통하여 발을 씻게 하고 준비된 의상을 입게 하는 것(마22:11~12)도 상상할 수 있다.

“통[μετρητής, metrḛtḛs, 액체의 용량에 대한 측량 단위이지 OT의 호멜이나 밧, 고르, 에바 같은 단위는 아니다.]

돌 항아리의 저장 단위는 대개 영어식 번역으로 20~30gallon으로 번역을 하고 있는데 그 양은 요즘 우리가 사용하는 미터 단위로 환산하면 75~113ℓ x 6 = 450~678ℓ 가 되는데 이것이 적어도 주님께서 만드신 포도주의 양이라는 데서 엄청난 양임을 이해하게 된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항아리에 물을 채우라 하신즉 아귀까지 채우니”(7) 상황은 급진적으로 반전되었다. 본래 이 돌 항아리에 물을 채우는 것은 손님들의 발을 씻어주기 위한 것인데 왜 주님께서 다른 도구가 아니라 이 손발을 씻기 위해 마련된 돌 항아리에 물을 채우게 하셨는가 도 재미있는 추측을 가능하게 한다.

결국 깨끗케 하는 도구를 기쁨을 찾는 도구로 사용하셨다는 의미를 이해하게 되고 이것도 주님께서 사죄를 통한 기쁨을 찾아 주실 상징성을 보여주신 것이라고 이해해도 무리가 없을 것 같다.

“이제는 떠서 연회장에게 갖다 주라 하시매 갖다 주었더니”(8) 사실 여기에는 “물이 포도주가 되었다.”는 말씀도 없이 단순히 “연회장에게 갖다 주라”는 말씀이셨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한 마디 한 말씀을 하인들은 이해하려는 것보다는 바로바로 순종했다는 사실이 오늘 믿음 생활하는 우리에게 귀감이 되기에 충분하다.

만약에 오늘 같은 상황에서 이런 명령을 주님께서 주셨다면 ‘나는 과연 여기 하인들처럼 순종할 수 있었을까!’ 생각해 보면 아마 “왜 그래야 하는데요?”라고 질문부터 했을 것 같다. 이런 입장에서 하인들의 순종은 기적을 만들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당시의 상황에서 주님께서 하인들에게 명령하신 것들은 어느 것 하나 합리적인 것들은 없으셨다. 그러나 이해되지 않는 것일지라도 그대로 순종만 하면 하나님의 역사를 경험하는 놀라운 은혜에 참여함을 배운다. 이 기쁨이 바닥난 잔치는 결국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 하니라”(5)는 말씀에 절대적인 순종으로 성취되었다.



Ⅲ. 제자들이 그를 믿으니라.(9~11)

“연회장은 물로 된 포도주를 맛보고도 어디서 났는지 알지 못하되 물 떠온 하인들은 알더라 연회장이 신랑을 불러, 말하되 사람마다 먼저 좋은 포도주를 내고 취한 후에 낮은 것을 내거늘 그대는 지금까지 좋은 포도주를 두었도다 하니라, 예수께서 이 첫 표적을 갈릴리 가나에서 행하여 그의 영광을 나타내시매 제자들이 그를 믿으니라”

이 부분은 하나님의 사랑의 이적이 가져온 감사와 놀라움이다. 앞에서 본대로 어쩌면 하인들은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에 대해 거의 기계적으로 순종했을 뿐이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 이제 물로 포도주를 만들었으니 연회장에게 갖다 주라,’하신 것이 아니라 “항아리에 물을 채우라 하신즉 아귀까지 채우니, 이제는 떠서 연회장에게 갖다 주라 하시매 갖다 주었더니”라는 말씀에 대한 반응이 나타나고 하인들이 비로소 이 신비를 인식하고 있음을 본다.

“연회장은 물로 된 포도주를 맛보고도 어디서 났는지 알지 못하되 물 떠온 하인들은 알더라”(9) 하나님의 사랑이 그렇듯이 주님께서 행하시는 이적도 그 이적을 이루는데 믿음으로 참여한 자들만이 그것을 바로 알고 이해하는 다분히 주관적임을 본다.

하나님의 은혜는 지위의 높고 낮음이 아니라 그 말씀의 역사에 순종한 당사자들만이 바로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므로 오늘도 같은 원리로 우리 삶 속에서 순종으로 말씀을 받드는 사람들이 감격할 수 있음을 확인하게 된다.

또 하나 재미있는 사실은 기적을 일으킨 것은 주님이신 데 칭찬은 엉뚱하게 신랑이 받는 것이다. “연회장이 신랑을 불러 말하되”(9bb~10ff) 또 주님께서 이루신 일을 사람이 어쩔 수 없이 칭찬을 받는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고 세상에서는 충분히 그럴 수 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이것도 마지막 때에는 “인자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그 천사들과 함께 오리니 그 때에 각 사람이 행한 대로 갚으리라”(마16:27; 롬2:6)시는 약속을 본다.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의 일한 대로 갚아 주리라”(계22:12)

이 연회장은 역시 일반적인 세상의 원리를 들어서 신랑을 칭찬하고 있다. “사람마다 먼저 좋은 포도주를 내고 취한 후에 낮은 것을 내거늘 그대는 지금까지 좋은 포도주를 두었도다”(10) 범죄한 세상의 모습은 대부분 이렇다. 맛집, 남녀간의 사랑조차도 그런 경향이 있는 것 같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는 이와는 반대이다. 처음에는 힘들고 어려울지라도 참고 견디는 자들에게 더 큰 칭찬이 있을 것이다. 좋은 것을 나중까지 간수하고 약속하는 것은 땅에서는 보장이 없다.

또 이와 반대되는 예수 그리스도의 낮아지심과 영광을 받으시는 구원 사역을 보는 데서도 세상의 원리와 반대됨을 본다.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과 땅,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빌2:6~11) 사실 이런 원리에서 믿음 생활이 쉽지 않다.

그런 이유로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마5:11~12f) 세상에서 주님을 섬기는 것으로 인하여 고난을 당할수록 하늘에서 상이 크다고 말씀하신다.

그런 이유에서 우리 하늘의 원리로 사는 사람들은 역시 이런 일반적인 세상의 논리대로 살아서는 안될 것이다. 나중까지 좋은 것을 남겨 두실 분은 오직 우리의 하나님 아버지 분이시다.

“예수께서 이 첫 표적을 갈릴리 가나에서 행하여 그의 영광을 나타내시매 제자들이 그를 믿으니라”(11) 주님께서 그의 사역의 시작에서 큰 표적을 예루살렘에서 행하신 것이 아니라 갈릴리 작은 동내 가나에서 행하셨고 그 기적은 주님의 광야 시험 때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 내려 많은 사람들의 존경과 위엄의 대상이 된 것이 아니라(마4:5~6) 지극히 인간적인 기쁨을 잃어버린 잔칫집에 기쁨을 회복시켜 주신 것이라는 것도 큰 의미가 있다.

이 사건을 통해서 나타난 영광도 많은 사람들이 아닌 “그의 영광을 나타내시매 제자들이 그를 믿으니라”(11)는 것이었다. 이 요한복음에 나타난 일곱 가지의 표적의 대부분은 믿음의 사람들의 순종과 함께 끝에는 한결 같이 여기처럼 “그를 믿으니라”(11)는 은혜의 응답을 볼 수 있다.

우리는 대부분 예수님의 이 첫 이적에 의구심을 가질 수 있다. ‘왜, 한 잔칫집에 바닥나버린 포도주를 만드시는 것이었을까!’ 이것은 좀더 근본적인 사람들의 삶을 생각하게 한다. “주께서 인생으로 고생하게 하시며 근심하게 하심은 본심이 아니시로다”(애3:33) 하셨다.

이 말씀을 바로 이해하면 사람들은 분명 행복하게 살아야 하는데 범죄로 인하여 기쁨과 행복을 잃어버리고 어쩔 수 없이 주어진 시간만큼 살고 가는 초라한 존재들이 되었음을 본다.

그렇다면 여기 혼인잔치 집에 바닥난 기쁨의 이유인 포도주는 바로 십자가로 회복된 인생들이게 충만케 하시는 영적인 포도주, 성령의 충만 임을 바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성령의 충만으로 사람들에게 세상이 중 수 없는 기쁨을 주시려고 희생의 십자가를 지실 사역의 연장 이셨음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는 말씀이다.

이 역사 속에 우리와 꼭 같은 몸을 입고 내려오신 예수 그리스도만이 처음 희락의 동산 에덴에서 쫓겨나 기쁨을 상실해 버린 인간에게 기쁨을 찾아 주실 수 있는 유일한 분이시다. 믿으시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