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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배 전도자
요 2:13~22 2019-02-24
이것을 여기서 가져가라,  
갈릴리에서 구속 사역의 시작과 함께 제자를 선택하신 예수께서는 유월절 절기에 예루살렘 성전에 올라가셨다가 거룩한 성전이 장터가 되어 있는 모습에 분노하신 주님께서 살아계신 성전이신 자신의 상징인 예루살렘 성전의 오염을 책망하시고 성전의 주인으로서의 모습을 나타내신다.

그럼에도 그 거룩한 장터를 통해서 이권을 챙기고 있던 성전관리자들인 제사장들과 사두개인들의 항의에 사실을 말씀하시지만 이미 영적인 눈이 어두워진 그들이 자신들의 기득권의 대적으로 보이는 이러한 주님의 가르치심을 이해할 수 없었고 오히려 그러한 주님의 가르치심에 정면으로 대항하고 나섬을 본다.

영적인 이치를 말씀하심에도 육신적으로 대항하는 것은 당시의 종교지도자들이 그만큼 영적이지 못했기 때문임을 진행되는 3장에서 그들과 함께 했던 니고데모에게서도 불 수 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인류를 위한 희생을 예언적으로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19) 말씀하신다.

여기에 대해 영적으로는 소경 되어 있던 저들은 헤롯이 유대인들의 마음을 얻기 위해 지은 보이는 성전의 위용을 자랑하면서 거드름을 피우며 말한다. “이 성전은 사십육 년 동안에 지었거늘 네가 삼 일 동안에 일으키겠느냐?”(20)

또 아직 성령의 체험을 하지 못한 제자들조차도 이러한 가르침을 이해할 수 없었고 주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저들에게 성령을 보내주신 후에야 이 사실을 알게 되었다고 요한은 사실적인 기록을 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경계를 가져야 하는 것은 당시 예수님께서 육신으로 이 땅에 계시던 그때만이 아니라 오늘 우리의 시대에도 같은 경계를 가져야 한다는 사실이다. 주님의 이름으로 일컬어지고 사람들에게 알려진 장소나 모임이 같은 모양으로 이권이나 사람의 영광을 위하여 더럽혀져서는 안된다는 경계이다.



Ⅰ. 성전이 잘 못 사용되고 있었다.(13~14)

하나님의 백성들이 보이지 않으시는 하나님을 그래도 가장 사실적으로 느끼고 의식하며 감격하고 섬기는 곳이 바로 성전이었다. 물론 포로기 후에 지역적으로 회당이라는 곳에서도 집회를 가지기도 하였지만 그래도 예루살렘 성전은 이스라엘에 있어서 정신 세계의 중심 지었고 이스라엘의 3대절기 때는 천하에 흩어져 있던 사람들이 자신들의 정체성과 우월성을 이곳에 모여서 확신하였다고 이해할 수 있다.

“유대인의 유월절이 가까운지라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더니”(13) 예수께서 육신으로 계실 때 몇번의 유월절을 지내신 것으로 기록되고 있다. 그러나 12살쯤의 어린아이로 성전에 가신 것과는 분명이 차이가 있었다.(눅2:41~51) 특히 구속의 역사를 시작하신 입장에서는 자신이 이스라엘의 유월절 만이 아닌 온 인류를 죄로부터 탈출시키시기 위해 오신 유월절 양으로서, 선택 받은 유대인들의 잘못된 성전 사용을 더 이상 보실 수가 없으셨던 것 같다.

“성전 안에서 소와 양과 비둘기 파는 사람들과 돈 바꾸는 사람들이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14) 성전은 죄를 지은 사람이 자신의 죄를 용서받기 위해 짐승을 잡아서 피를 뿌리고 흘리며 그 짐승의 부분을 태워 바쳐서 하나님으로부터 죄를 용서를 받는 곳이다.

그렇기 때문에 제물로 필요한 짐승들이 있기는 해야하겠지만 이렇게 그것을 사고 파는 거래의 장소는 아니다. 물론 ‘소, 양, 비둘기’도 제사하는 사람의 형편에 따라 드리도록 배려하신 하나님의 사랑이셨다.

“그러나 그 짐승이 흠이 있어서 절거나 눈이 멀었거나 무슨 흠이 있으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 잡아 드리지 못할지니”(신15:21)라고 말씀하고 있지만 그보다 중요한 것은 OT 율법시대에는 제사를 드리는 제사장들 조차도 육체의 흠이 있는 사람은 제사에 참여할 수 없었음을 제사 법전이라고 일컫는 레위기 21장에서 경계하고 있다.(v17~18, 21~23)

이런 입장에서 보면 육신의 흠보다도 영혼이 오염된 주님 당시의 제사장들은 제사를 진행할 수 있는 자격이 없는 사람들이었고 무엇보다도 성전의 실체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볼 수 없다는 데서 더 큰 심각성을 볼 수 있다.

이런 사람들에게 제사에 사용될 짐승들의 적합성 검사가 맡겨졌다고 하는 것은 고양이에게 생선을 지키게 하는 것과 다를 것이 없었다.

“성전 안에서 소와 양과 비둘기 파는 사람들과 돈 바꾸는 사람들이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14) 하나님을 향한 경외감을 갖지 못한 제사장들은 백성들이 먼 곳에서 가지고 온 짐승을 제물로 부적합하다고 판결하고, 그 부적격 판정을 받은 짐승을 매수한 중간 상인들이 헐값으로 사서 성전에 돌려와서 제사 제물로 다시 비싼 값에 판매하였다고 전한다.

이 성전에서 산 짐승들은 이미 제물로서 적합여부를 인정받은 것으로 단정되어 의심없이 사게 되고 이런 형편이 된 데서 어떤 경우는 자신이 몰고 온 짐승을 헐값에 팔아 비싼 값에 다시 사는 웃지 못할 일들도 있었던 것으로 짐작 된다.

그리고 이 짓을 하는 사람들은 여기에 기록처럼 “파는 사람들과 돈 바꾸는 사람들이 앉아 있는”(14)이란 표현은 “앉다[κάθημαι, 정착해 있다, 머물다]”라는 의미에서 마치 시장 상인이 자신의 자리를 차지하고 항상 장사를 하는 것과 같은 표현이다.

결국 사람들의 죄를 해결해 주시기 위해 있게 된 성전이 그야말로 시장의 난전과 같은 모습으로 냄새 나는 짐승들의 시장이 되어 있었음을 짐작해 볼 수 있다. ‘기도하는 집’으로 이해되는 하나님의 성전은 또 다른 짐승 냄새로 가득한 가축 시장이나 다름이 없었기에 예수 그리스도는 그 성전이 바로 자신을 상징하는 거룩한 곳이어야 하기 때문에 참으실 수 없으셨던 것이다.

오늘 하나님의 집인 우리의 예배의 처소나 성전 된 우리의 구별된 몸은 과연 그런 요소가 없는지 살펴야 할 것이다.



Ⅱ. 불결해 진 성전을 참지 못하셨다.(15~17)

이 말씀은 어찌 보면 주님과 어울리지 않는 행동을 하시는 것처럼 보인다. “노끈으로 채찍을 만드사 양이나 소를 다 성전에서 내쫓으시고 돈 바꾸는 사람들의 돈을 쏟으시며 상을 엎으시고”(15)

우리 주님께서는 그의 공생애 동안 어쩔 수 없이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사회 약자의 사람들에 대하여서는 한없이 너그러우시고 연민으로 돌보시고 불쌍히 여기셨다. 그러나 성경을 알고 진리를 안다고 하면서 그것을 잘 못 사용하는 자들에게는 결코 용서하지 않으셨고 오늘 읽는 장면처럼 주님과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과격 하셨다.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마23:33)

하나님 앞에 사람들의 죄를 해결하기 위해 마련된 거룩한 성전을 자신들의 이속을 챙기는 도구로 사용하는 사람들에게 물리적으로 까지 진노하시고 대항하심을 본다. 사실 이러한 진노는 하나님의 공의에서 나온 것으로 바울조차도 이들이 이렇게 될 수 있는 것과 같은 경계를 우리에게 주고 있다.

“누구든지 다른 교훈을 하며 바른 말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경건에 관한 교훈을 따르지 아니하면, 그는 교만하여 아무 것도 알지 못하고 변론과 언쟁을 좋아하는 자니 이로써 투기와 분쟁과 비방과 악한 생각이 나며, 마음이 부패하여지고 진리를 잃어 버려 경건을 이익의 방도로 생각하는 자들의 다툼이 일어나느니라”(딤전6:3~5)

하나님께서 모든 죄를 용서해 주실 수 있으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용서하실 수 없는 죄는 바로 하나님의 거룩성에 대한 도전이다. 구체적으로 나타난 것은 바로 육신으로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모독하는 것까지 용납하셨지만 성령을 훼방하고 모독하는 것은 영원히 용서될 수 없다고 말씀하신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에 대한 모든 죄와 모독은 사하심을 얻되 성령을 모독하는 것은 사하심을 얻지 못하겠고, 또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얻되 누구든지 말로 성령을 거역하면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서도 사하심을 얻지 못하리라”(마12:31~32; 막3:28~29 영원히 사하심을 얻지 못하고 영원한 죄가 되느니라; 눅12:10)

이러한 원리는 당연히 하나님께 제사하는 것이거나 예배 드리는 것들을 악용하는 것에 대해서는 역시 용서될 수 없다는 원리로 이해하게 된다. 주님께서 비록 보이는 성전이시고 그것도 정치적인 이유에서 화려하게 지어진 성전 이었음에도 그곳에 대한 잘못 사용은 허용하실 수 없으셨음을 본다.

“비둘기 파는 사람들에게 이르시되 이것을 여기서 가져가라 내 아버지의 집으로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 하시니”(16) 역시 행동이 다소 과격하게 보였음에도 언어에는 분명히 품격과 위엄스러움을 가지고 계심을 볼 수 있다. 우리가 분노하게 되면 이성을 잃고 극단적인 표현까지 사용하는 경우를 보는데 역시 이런 부분에서도 우리 주님을 본받을 필요가 있다.

일단 예수 그리스도의 일련의 행동과 책망을 통해서 거룩하신 하나님의 영광과 위엄을 손상하는 것은 봐 주실 수 없다는 사실을 이해하게 된다. 또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하나님께서 임재 해 계시는 곳을 욕되게 한다면 그것은 다른 구제책이 없는 이유는 다른 사람들로부터 이미 하나님의 존엄성을 인정하고 있는 곳이기 때문에 그렇다.

여기에 대한 제자들의 반응도 역시 스승의 모습을 인정함을 보게 된다. “제자들이 성경 말씀에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이 나를 삼키리라 한 것을 기억하더라”(17) 어찌 보면 평상시 온유 하심을 당부하시고 그러셨던 주님의 갑작스런 행동, 그것도 하나님의 성전에서 돌발적인 행동에 의아할 수도 있었지만 “주의 집을 위하는 열성이 나를 삼키고 주를 비방하는 비방이 내게 미쳤나이다”(시69:9)라는 말씀을 회상하는 것으로 존경을 표하고 있다.

사실적인 부분을 생각해보면 헤롯이 비록 46년간 지은 성전이지만 솔로몬 성전이나 바벨론 포로 귀환과 함께 지은 스룹바벨 성전과 비교할 때 전혀 다른 가치를 가질 수 있다.

예수님 당시의 성전 자체가 순수성이 결여된 건축이었기 때문에 주님께서 물론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려지리라”(마24:2; 막13:2; 눅21:6) 예언하시고 또 그대로 이루어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께서 이 성전을 두고도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사56:7; 마21:13; 막11:17; 눅19:46)는 말씀을 그대로 적용하셨다.

이것은 물론 헤롯의 정치적인 수완을 정당화 하거나 그러한 생각에 함께 놀아난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을 인정한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이미 거룩한 이름으로 일컬어지는 곳에서 영광된 위엄을 악용하는 잘 못된 신앙적 악함을 책망하시는 것이다.

오늘 우리에게 있어서는 성령께서 임재하심으로 당연이 성전 된 우리 몸의 성결을 강력히 당부하신다.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고전3:16~17)



Ⅲ. 주님의 몸인 성전.(18~22)

이러한 주님의 선하신 당부와 교훈이 그렇지 못한 종교지도자들에게서 항의를 받게 되고 만약 군중들이 주님을 믿고 따르지 않았다면 오히려 주님께서 안타까움을 당할 수도 있는 상황이셨다. 여기에도 신령한 교훈과 그것을 육신적으로 이해하는 상충된 모습을 볼 수 있다.

“이에 유대인들이 대답하여 예수께 말하기를 네가 이런 일을 행하니 무슨 표적을 우리에게 보이겠느냐”(18) 직접적인 이 상황에서는 아니지만 이 일과 연관되면서 공관복음에서는 이런 일을 계속하시는 주님께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느냐 누가 이런 일 할 권위를 주었느냐”(마2123; 막11:28; 눅20:2)며 항의 하는 것을 볼 수 있고 주님께서 오히려 요한의 세례를 통해서 물으셨다.

“네가 이런 일을 행하니 무슨 표적을 우리에게 보이겠느냐”(18) 보지 않고는 도무지 믿을 수 없고 보고도 믿지 못하는 사악함을 그대로 들어내고 있는 것이다. 기적을 보여 달라고 하는 저들이 우리 주님의 기적을 이미 전해 들었을 것임에도 또 다시 억지를 부리고 있다.

그러나 지난 주에도 나눈 말씀이지만 기적이 믿음을 줄 수 있는 것은 아님을 알아야 한다. 믿지 못하겠다고 마음을 굳히고 있는 사람에게는 능력과 기적을 체험해도 오히려 불신하고 믿지 못하는 모습은 과거 이집트를 10가지 기적으로 탈출 시키셨음에도 또 광야에서 저들의 삶이 기적 자체였음에도 여전히 하나님을 진노케 하였던 이스라엘의 삶에서도 충분히 볼 수 있는 모습들이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19) 이것은 주님께서 당하실 일을 미리 아시고 자신의 대속의 죽음을 예언하신 것이지만 영적으로 무지한 저들이 이를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에 또 한번 저들은 어리석은 질문을 되풀이 할 뿐이었다.

사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역사에 몸을 입고 오신 목적이 이것이었다는 복음은 성경 기록의 목적이고 중심 사상이었다. 물론 이 구속의 역사에 대한 주님의 예언은 복음서 속에서 여러가지로 말씀하신 바 있다. 바로 인류의 죄를 대신 지시고 십자가에 대속의 저주를 받으시고 죽으실 것과 그럼에도 사흘 후에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그 죽음을 박차고 부활하셔서 사죄를 받은 주님의 백성들을 의롭다 선언함을 받게 하기 위해서이다. “예수는 우리가 범죄한 것 때문에 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롬4:25)

기적을 보여달라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을 향하여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선지자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느니라, 요나가 밤낮 사흘 동안 큰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것 같이 인자도 밤낮 사흘 동안 땅 속에 있으리라”(마12:39~40, 16:4; 눅11:29)고 본문v19과 비슷한 말씀으로 구속의 역사를 언급하셨다.

“유대인들이 이르되 이 성전은 사십육 년 동안에 지었거늘 네가 삼 일 동안에 일으키겠느냐”(20) 자신들이 영화롭게 여길 뿐 아니라 이익의 도구로 잘도 사용하고 있는 헤롯이 46년에 걸쳐서 지어준 보이는 성전을 두고 성전의 참 실체이신 주님을 알아보지 못하는 저들의 영적인 무지를 여지없이 드러내고 만다.

여기에 사도 요한의 바른 이해를 덧붙이고 있다. “그러나 예수는 성전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21) 그럼에도 사도 요한을 비롯한 제자들조차도 이 사실을 당시에는 깨닫지 못한 같은 어리석음 속에 있었음을 고백하는 진실을 마지막에서 적고 있다.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야 제자들이 이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고 성경과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믿었더라”(22)

이 말씀도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라는 표현이 무덤에서 부활하신 후를 그대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저들의 심령에 오셨을 때였음으로 이해해야하는 이유는 주님께서 부활 후 제자들에게 나타나시고 말씀하셨음에도 저들은 여전히 믿지 못했음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막16:14)

하나님께 제사하고 기도하는 곳인 성전이 제물로 사용될 짐승들의 울음소리와 냄새로 진동하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보다는 사람들의 욕망과 죄악 때문이었다. 주님의 성전이라고 하는 곳에서 어떤 이권이나 하나님 아닌 다른 어떤 사람이나 정책을 찬양하고 높이는 행위가 허용되어서는 안된다.

그것이 ‘금전적인 이권’뿐만 아니라 ‘어떤 사람의 명예’를 위한 것도 허용되어서는 안된다. 예배하는 그 때 그곳에서는 ‘다만 하나님의 영광만을 확인하고 드러내기 위해 모두가 최선을 다해야’ 한다. 그렇지 못하다면 예배 드리는 성소가 아니라 온 갓 악취와 소음으로 가득 찬 거듭날 수 없는 짐승들의 우릿간이 될 수도 있다.

오늘도 주님께서 우리의 예배 드리는 곳에 오신다면 같은 말씀을 하실 것이다. “이것을 여기서 가져가라 내 아버지의 집으로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16) 또 예수께서 말씀하신 성전은 건물뿐 만 아니라 상징성이 있는 그리스도의 몸이 된 성도의 몸까지도 생각할 수 있다.(고전3:17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