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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배 전도자
요 2:23~25 2019-03-03
이는 친히 모든 사람을 아심이요,  
조금은 진부하고 듣기 쉽지 않은 말씀이기 때문에 더욱 정신을 차리고 들어 주시기 바란다.

주님께서 자신의 몸의 상징인 성전이 사람들의 이권을 위한 장터가 되어 있는 것을 분노하시고 안타까워하셔서 그러한 욕심과 성전에서 제사를 가장한 물질의 우상숭배를 책망하시고 짐승들을 내어 쫓고 환전상을 들러 엎으시면서 그러한 것들을 성전에서 가져갈 것을 명하셨다.

그러나 그러한 성결을 가장한 사악한 행위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신으로 이 땅에 오셨을 때뿐만 아니라 복음이 완성되고 각 사람이 성령께서 계시는 성전이 된 지금도 여전히 있을 수 있음을 경계하였고 하나님을 섬기는 것을 가장(假裝)한 사람 숭배까지도 조심해야만 할 것을 경계하며 나눈 바 있다.

오늘은 그런 일이 일어날 수 밖에 없는 사람의 한계를 아신 주님께서 자신만이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에 합당한 완전한 인자(人子) 즉, 사람이며 죄의 습성에 더 깊이 젖어 있는 사람들에게는 자신의 몸을 의탁하지 않으실 뿐만 아니라 증언도 무효 함을 선언하신다.

이러한 부정적인 입장을 취하실 수 밖에 없으셨던 이유를 사도 요한은 두번씩이나 강조하고 있다. “이는 친히 모든 사람을 아심이요, 이는 그가 친히 사람의 속에 있는 것을 아셨음이니라” 이 표현들이 이미 오늘의 결론을 증거하고 있다.

그러나 오늘 첫 절은 그러한 사람들과는 다르게 불신하려는 마음만 아니면 만나는 사람들에게 마다 믿음과 확신을 주셨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런 일반적인 사람들과는 확실히 다른 하나님의 독생자이셨음을 나타내고 계시다.



Ⅰ. 사람 중에 유일한 사람,(23)  “유월절에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계시니 많은 사람이 그의 행하시는 표적을 보고 그의 이름을 믿었으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육체적으로 지극히 인간적인 모습들을 그의 제자들에게 수없이 보이셨다. 그러함에도 극단적인 상황에서는 언제나 한결같이 육신의 편리나 육신의 원하는 것을 선택하신 것이 아니라 영적인 것들을 선택하셨다는 것에서 오늘 같은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우리들과 다른 모습이셨다.

이러한 사실을 히브리서 기자는 연거푸 기록하고 있다. “그러므로 저가 범사에 형제들과 같이 되심이 마땅하도다 이는 하나님의 일에 자비하고 충성된 대제사장이 되어 백성의 죄를 구속하려 하심이라, 자기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시느니라”(히2:17~18)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히4:15)고 증거하고 있다.

“유월절에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계시니 …”(23f) 이스라엘에게 유월절이 나라의 출발이 되고 승리가 되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유월절을 지키도록 명령하심으로서 하나님의 권능과 은혜로말미암아 자신들이 존재함을 돌아보게 하고 그럼으로 변함없이 하나님을 의지하도록 하셨다.

그러나 보다 깊은 유월절의 의미는 온 인류의 유월절 양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세상으로부터 죄로부터 자유 하게 하시려는 엄청난 희생과 사랑의 모형을 미리 보여 주신 것이 모범이었다. 그런 의미에 예수께서 유월절에 예루살렘에 계신 것은 이러한 주님의 뜻을 알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원하심 이셨다.

사실 유월절을 주신 분이 그 유월절을 지키고 행하는 곳에 계신 것은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영광과 위엄을 감사할 수 있다. 그러한 사랑과 은혜를 믿음으로 감격하는 사람들은 주님의 행하시는 행동 하나하나에도 감격을 가질 수 있었다. 보통 사람들과 달랐던 주님의 이적에 매년 행해지는 절기에서 누렸던 그 이상의 것을 즐길 수 있었다.

“… 많은 사람이 그의 행하시는 표적을 보고 …”(23m) 어쩌면 주님께서는 많은 사람들에게 그 유월절이 자신을 통한 죄에서의 완전한 자유를 주시기 위한 주님의 구속사역을 알게 하시기 위한 기적들을 보인 것일 수도 있었다. 분명한 기록은 주님께서 유월절에 예루살렘에 계셨고 그 유월절 기간에 모여든 많은 사람들이 그분이 행하시는 표적을 볼 수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 결과를 사도 요한은 “… 그의 이름을 믿었으나”(23b)라는 사뭇 불완전한 끝부분으로 기록하고 있다. 이것은 이러한 예수 그리스도와는 다르게 연결되는 사람들의 불완전과 변화무쌍함을 말하고자하는 분위기를 남기고 있다.

사실 주님께서 OT의 예언대로 어린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들어 오실 때 많은 군중들이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곧 이스라엘의 왕이시여”(요12:13; 마21:9; 막11:9~10)라고 환영하며 찬양했지만 나중에는 그 군중들이 종교지도자들의 부추김을 받아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하겠나이다, 더욱 소리 지르되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마27:22~23; 막15:13~14; 눅23:21; 요19:6)라고 외쳤음을 보면서 죄성(罪性)에 더 쉽게 붙잡히는 사람이라는 한계를 보게 된다.

비록 그러하였을 지라도 “많은 사람이 그의 행하시는 표적을 보고 그의 이름을 믿었으나”라는 반응이 사람들의 믿음을 칭송하기 보다는 믿음을 불러 일으키시는 주님의 신실하심을 불완전한 사람과 비교하기 위한 요한의 깨달음을 우리에게 주고 있다.

비록 타락하고 범죄하여 불완전한 사람들은 아침과 저녁으로 생각이 바뀌고 하나님께 대한 믿음을 잃어버릴 수 있지만 이 우주의 창조자이실 뿐만 아니라 자신의 형상대로 사람을 지으신 하나님은 변함없이 믿음직하심을 증거하고 있다. “우리는 미쁨이 없을지라도 주는 항상 미쁘시니 자기를 부인하실 수 없으시리라”(딤후2:13)



Ⅱ. 의탁할 수 없는 존재,(24)  “예수는 그의 몸을 그들에게 의탁하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친히 모든 사람을 아심이요”

앞v23에서 “… 그의 이름을 믿었으나”(23b)라고 말끝을 흐렸던 이유를 계속 기록하고 있다. 이 문장의 본래적인 형식이 독특하다. 간략하게 두 부분으로 구성된 문장인데 “예수”라는 주 명사와 “그 자신[αὐτὸς, autos]”이라는 대명사가 3번이나 사용되고 나머지는 “믿다[πιστεύω, pisteuo, 맡기다, 신뢰하다]”라는 말의 부정형과 “사람에 관한 모든 것들”로 구성되어 있다.

그러므로 바로 앞 절의 내용과는 완전히 반대되는 내용으로 구성되었는데 앞 절에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유월절에 예루살렘에 계시며 행하시는 이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보면서 믿었다’는 내용이라면 이 v24에는 ‘모든 사람들의 거짓됨을 친히 아시는 주님이시기 때문에 그러한 사람들에게 믿음을 두지 않으셨다’는 비교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럼으로 이 구절을 더 이해하기 쉽게 배열하면 “예수님은 모든 사람을 다 알고 계셨기 때문에 자신을 그들에게 맡기지 않으셨다”라고 이해할 수 있다. 그런 입장에서 이 말씀은 뒤에서부터 이해할 필요가 있다.

“… 이는 친히 모든 사람을 아심이요”(24b) 전례 되는 속담에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는 말을 흔히 쓴다. 그러나 이것은 사람에게 있어서 그렇고 또 사실이다. 만약에 어떤 사람이 상대의 마음을 안다고 하면 그것은 하나님의 자리에 올라 앉는 것으로 진실되지 못한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을 의지하는 것도 문제이지만 사람을 함부로 판단하는 것도 금하신 것이다.

우리는 전후좌우(前後左右)를 헤아려 짐작하고 남을 판단하고 하는 경우도 있는데 그것은 엄밀히 하나님 앞에서 옳은 행동이 아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볼 수 있고 짐작을 할 수 있는 부분이 있다고 할지라도 사실 볼 수 없는 부분이 더 많기 때문에 함부로 짐작해서 남을 판단하고 정죄하는 것을 성경은 금하고 있는 것이다. “오직 너희 말은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 이에서 지나는 것은 악으로부터 나느니라”(마5:37)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가 볼 수 없는 이면(裏面)을 시각적(視覺的)인 것은 물론이고 사람은 볼 수 없는 ‘생각’까지 보시고 계시기 때문에 그분의 판단이 옳은 것이다. 이렇게 주님께서는 사람을 꿰뚫어 보실 수 있는 하나님이심으로 사람에게 자신을 맡기지 않으신다고 하였지만 본래적인 의미는 ‘믿지 않으신다’는 의미가 더 가깝다.

욥의 친구 엘리바스를 통하여 “하나님은 그의 종이라도 그대로 믿지 아니하시며 그의 천사라도 미련하다 하시나니”(욥4:18) “하나님은 거룩한 자들을 믿지 아니하시나니 하늘이라도 그가 보시기에 부정하거든”(욥15:15)

이렇게 보면 ‘하나님은 믿음이 없으신 분이시면서 우리에게는 믿음을 요구 하시는가!’ 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그렇지 않다. 하나님은 진리이시고 변함이 없으신 분이시기 때문에 참으로 믿음직 한 것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신뢰를 주시는 분이시다.

그러나 아무리 경건 하다는 사람일지라도 사람은 신뢰의 대상이 되지 못하는 것이 사실이다. 역사 속의 위대하다는 신앙인들도 한결같이 인간적인 면을 가지고 있었고 “… 내가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내 마음에 맞는 사람이라 내 뜻을 다 이루리라”(행13:22b; 삼상13:14) 하셨던 다윗조차도 범죄하고 그 대가를 톡톡히 치루었음을 볼 수 있다.

“… 이는 친히 모든 사람을 아심이요”(24b) 이 한마디 속에 하나님의 전지전능(全知全能)하심이 다 선언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순종하는 그의 백성들만 아시는 것이 아니라 그를 거역하고 대항하는 사람들까지도 이미 왜, 그렇게 하는지를 모두 보고 계시는 분이라는 말씀이다.

두렵지만 이 말씀 속에는 우리 각자도 다 포함되어 있음을 알아야 한다. 긍정적(肯定的)인 측면에서는 많은 감사를 드릴 수 있는 이유이고 부정적(否定的)으로는 많이 두려워해야 할 부분이다.

그런 이유 때문에 “예수는 그의 몸을 그들에게 의탁하지 아니하셨으니 …”(24f) 라는 이유가 이해될 수 있다. 주님께서 요셉과 마리아의 육신의 아들로 나서 성장하셨지만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의 섭리를 이해해 볼 때 사실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요셉과 마리아가 하나님의 보호를 더 받았을 것이고 영적으로 이해해볼 때 예수께서 요셉과 마리아에게 의탁해서 사신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였을 것이라는 이해를 해 볼 수도 있다.

바울은 아테네에서 철학자들을 향하여 “우주와 그 가운데 있는 만물을 지으신 하나님께서는 천지의 주재시니 손으로 지은 전에 계시지 아니하시고, 또 무엇이 부족한 것처럼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니 이는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이심이라”(행17:24~25)

어쩌면 이 부분이 다른 신이라고 이름 짓고 섬김을 받는 우상들과 가장 다른 부분일 것이다. 하나님 우리 아버지는 오늘도 우리에게 의탁하여 무엇을 바라시는 분이 아니시다. 이런 이유 때문에도 우리는 그 분을 바로 알 필요가 있는데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이러한 가르침보다는 늘 세상 속의 섬김의 이치로 하나님도 섬기려고 하는 것들이 문제가 된다.

교회는 분명히 세상의 이치나 원리로 다스려가는 기관이 아니다. 세상에서 불러내고 구별하신 교회는 하나님의 명령과 말씀으로 다스려져야 세상과 구별된 교회라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세상에 익숙해져 있는 사람들은 세상의 원리나 규범들이 행해지지 않는 교회를 이해하지 못하고 참지 못한다.

‘왜, 하나님께서 한주간이라는 사이클로 세상을 운영 하실까!’하는 생각을 해 보게 되는데 이것 역시 하나님께서 사람을 아시기 때문이었다고 이해된다. 세상에 섞여 사는 엿새 동안 세상에 물들어 살다가 다시 시작하는 한 주간의 첫날에 우리를 위해 피를 흘리신 주님을 확인하면서 다시 하나님의 백성의 자리를 회복하게 하시려는, 그것이 열흘이라고 해도 너무 멀기 때문이라고 생각해 볼 수 있다.

아무리 그럴싸한 사람일지라도 하나님과 같을 수 없기 때문에 자신을 과신할 수 없는 것은 하나님은 사람을 믿지 않으시며 육신으로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는 결코 거짓된 사람들에게 자신을 의탁하지 않으셨고 앞으로도 그러실 것이다. 그 이유는 사람의 온전치 못함을 친히 아시기 때문이다.



Ⅲ. 증언을 신뢰할 수 없는 사람,(25)  “또 사람에 대하여 누구의 증언도 받으실 필요가 없었으니 이는 그가 친히 사람의 속에 있는 것을 아셨음이니라”

주님께서는 사람의 거짓됨을 아시기 때문에 자신을 사람에게 의탁하지 않으셨지만 주님은 자신의 명예나 삶의 필요뿐만 아니라 사람들의 증언, 즉 인정도 받으실 필요가 없으신 분이라고 증거한다.

하나님과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성령은 우리가 찬양하지 않아도 충분히 영화로우시며 존귀하신 분이시다. 하나님은 우리 사람에게 영광을 구걸하지 않으시는 분이시다. 이런 이유 때문에 그분을 영화롭게 찬양하고 섬기는 것 조차도 사실은 영광을 돌리는 우리 자신들을 위한 것이다.

하나님의 영광에 사람이 더할 수 있는 아무 것도 없기 때문에 우리가 교만하면 안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사람이 되신 겸손 때문에도 사람의 교만은 우주적으로 가장 치명적이다. 하나님께서는 창조주요 구세주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높일 때 하나님의 영광이 반사되게 하심으로 겸손을 요구하신다.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를 제외한 사람에 대하여 절대적으로 긍정적인 평가를 하고 있지 않다. 왜냐하면, “귀인들을 의지하지 말며 도울 힘이 없는 인생도 의지하지 말지니, 그의 호흡이 끊어지면 흙으로 돌아가서 그 날에 그의 생각이 소멸하리로다, 야곱의 하나님을 자기의 도움으로 삼으며 여호와 자기 하나님에게 자기의 소망을 두는 자는 복이 있도다”(시146:3~5) 말씀하신다.

그런 이유에서 OT 성전에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으로 살았던 고라의 자손들은 계속 강조하기를 “…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가 여전히 찬송하리로다”(시42:5b, 11b, 43:5b)고 격려하고 있다.

이 말씀도 역시 도치형식(倒置形式)으로 뒤에서부터 이해할 필요가 있다. “… 이는 그가 친히 사람의 속에 있는 것을 아셨음이니라”(25b) 앞에서는 “… 이는 친히 모든 사람을 아심이요”(24b) 하셨는데 여기서는 좀더 깊이 접근을 하여 사람 속에 가진 것을 아신다고 말씀하신다.

주님께서 육신으로 세상에 계실 때 바리새인들이 그의 제자들이 손을 씻지 않고 음식을 먹는 것을 책잡으려고 할 때 “사람 안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니라”(막7:16, 20; 마15:11, 18, )고 여러 번 말씀하시면서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란과 도둑질과 거짓 증언과 비방이니”(마15:19; 막7:21)라고 하셨다.

우리 스스로는 대단히 정의롭고 그럴싸한 존재라고 스스로 생각하고 자만하지만 우리 자신은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이 함께 하지 않는 한 결코 긍정할 만한 존재가 못된다. 그래서 야고보는 “그러나 너희 마음 속에 독한 시기와 다툼이 있으면 자랑하지 말라 진리를 거슬러 거짓말하지 말라”(약3:14)고 경계한다.

“또 사람에 대하여 누구의 증언도 받으실 필요가 없었으니 …”(25f) 하나님은 친히 사람을 지으셨고 자신의 피조물인 사람을 너무나 분명히 깊이 알고 계신다. 이런 이유에서 우리 자신보다 우리를 더 잘 아시는 분이시다. 우리는 이런 질문을 할 수 있다. ‘그럼 하나님은 사람이 말씀을 어기고 타락할 것도 하셨을까?’ 물론 아셨다고 확신할 수 있다. 그런 이유에서 세상을 만들기 전인 창세전부터 교회를 계획하시고 예정하신 것을 에베소서 1장에서는 증거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창조주요 구세주이신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이 옳은 것이다.

“또 사람에 대하여 누구의 증언도 받으실 필요가 없었으니 …”(25f) 우리는 앞에서 이미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1:14)는 기록을 상고한 바 있다.

‘영광과 은혜와 진리가 충만’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변화무쌍한 사랑들로부터 인정을 받으실 필요가 없으신 분이시다. 사람은 어쩌면 형편과 이권에 따라 변하는 존재들이기 때문에 그런 유한한 존재들에게 증언을 필요로 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장래적으로는 사라지고 영원할 수 없는 존재들이지만 주님의 변함없이 다스리시는 이 자연 우주가 그분의 영광을 찬양한다고 하는 말씀들을 본다.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의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시19:1) “해와 달아 찬양하며 광명한 별들아 찬양할지어다, 하늘의 하늘도 찬양하며 하늘 위에 있는 물들도 찬양할지어다”(시148:3~4)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 그러므로 그들이 핑계하지 못할지니라”(롬1:20) 그렇다. 자연이 창조주의 영광과 솜씨를 우리 사람보다 더 찬양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믿거나 의지하는 자세를 경계하는 교훈으로 주시는 말씀으로 마무리 하도록 하자.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무릇 사람을 믿으며 육신으로 그의 힘을 삼고 마음이 여호와에게서 떠난 그 사람은 저주를 받을 것이라”(렘17:5)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마는, 나 여호와는 심장을 살피며 폐부를 시험하고 각각 그의 행위와 그의 행실대로 보응하나니”(렘17:9~10)

하나님은 절대적으로 믿음을 주실 수 있는 영광과 진리와 은혜가 풍성하신 분이시다. 그러나 모든 사람은 코에 호흡만큼이나 신뢰할 수 없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구속의 역사를 완성하시면서까지도 육신의 부모나 형제들 제자들에게도 자신의 몸을 의탁하지 않으셨다.

[그런 이유에서 어머니와 형제들이 예수님을 찾을 때에도 그를 순종하며 따르는 자들을 가리키며 “나의 어머니와 나의 동생들을 보라”(마12:49; 막3:34) 하셨다.] 또 하나님의 아들이란 증거를 받으실 필요가 없으셨던 것은 사람을 아시고 사람의 속에 있는 것을 아셨기 때문이셨다.

오늘 예수님을 주와 그리스도로 하나님을 아버지로 믿고 사는 우리 믿음의 사람들에게도 함께 주는 교훈이다. 사람에게 철저하게 절망하지 않으면 예수 그리스도께 온전히 신뢰를 드릴 수 없다. 믿으시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