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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배 전도자
요 3:1~8 2019-03-10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신앙에 있어서 사실 오늘의 제목만큼이나 예민한 표현도 드물 것이다. 다른 표현으로 ‘구원을 얻지 못할 것이다.’라는 표현과 같은 내용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표현은 건전치 못한 신앙의 사람들의 자주 사용하는 슬로건이 되기도 한다. 왜냐하면 그런 예민한 제목이 아니면 이 시대에 사람들의 귀와 눈을 집중시키지 못하기 때문이다.

성경에서도 이런 사건이 있었다. “어떤 사람들이 유대로부터 내려와서 형제들을 가르치되 너희가 모세의 법대로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능히 구원을 받지 못하리라 하니”(행15:1) 이 문제로 예루살렘 교회가 발칵 뒤집힐 정도의 이슈가 되었다.

죄인의 거듭 남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 후 승천하시기 전에도 제자들에게 당부하신 가장 중요한 명령이었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마28:19~20f)

유월절 羊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의 효력이 가장 사실적으로 발휘되는 하나님의 새 언약의 약속도 역시 거듭남이다. 이런 약속이 인간적으로 볼 때는 어리석은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사람보다 지혜롭고 하나님의 약하심이 사람보다 강하니라”(고전1:25) 중요한 것은 어떤 것이던 하나님의 약속은 어리석게 보여도 반드시 지켜지지 않으면 효과를 나타낼 수 없다는 것도 역시 성경이 우리에게 주는 약속이다.

거듭남의 영적 이치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직접 주신 교훈이며 복음의 완성된 역사 속에서 실증된 사실들이다. 거듭 남은 하나님의 영광에 들어가기 위해서라고 말하기도 하고 성령을 받기 위해서라고도 하는데 다른 이야기가 아니라 같은 말씀이다.

이것도 세상 사람들은 웃을 만한 말이긴 하지만 사람에게 가장 귀중한 것은 죄를 용서 받고 하나님의 약속에 적당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인생은 이 육신의 삶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육신의 삶은 다만 영원을 들어가는 관문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에서 극단적으로 표현하면 ‘인생은 망쳐도 괜찮다. 그러나 영원은 건져야 한다.’ 또 영원을 위하여 바르게 사는 사람은 현재의 인생도 하나님께서 보장해 주실 것이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이 세상은 멋지게 살아보려고 애쓰면서도 영원을 멋지게 살아보려는 노력은 하는 사람들이 적다. 이 세상에 살아남기 위해서 취직을 해보려고 애쓰면서도 다음의 생에 대한 준비는 별로 하지 않는 것도 사람의 영적인 어리석음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Ⅰ. 종교의 비굴함과 용기,(1~2)

이 귀중한 영적 원리를 확인하는 계기를 제공한 사람은 당신의 이스라엘의 산헤드린 공회원이요 이스라엘 유대교의 양대 산맥이라 할 수 있는 바리새인 중의 한 사람인 니고데모[Νικόδημος, 백성중에서 승리하는, 정복자, 승리자]였다. “바리새인 중에 니고데모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유대인의 지도자라”(1)

“그가 밤에 예수께 와서 이르되 …”(2ff) 왜, 밤에 주님을 찾아왔는지, 무엇을 위해서 주님을 찾았는지 이유는 기록되고 있지는 않지만 당시의 상황을 통해서 짐작할 수 있는 것은 당시 유대교에 옳지 못함을 지적하셨던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부정적인 이유 때문에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한 것임을 이해할 수 있고 그럼에도 자신들의 종교로 인한 편협성을 갖고 있지 않은 사람으로 요한은 기록하고 있다.(요7:50, 19:39)

“… 랍비여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인 줄 아나이다 …”(2m) 꺼내고자 했던 주제가 무엇이었든지 아부(阿附)하는 것 같은 이 표현도 어쩌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대부분의 바리새인들과 부딪히고 계셨기 때문에 자신은 주님을 존경한다는 자세로 여겨진다.

“…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아니하시면 당신이 행하시는 이 표적을 아무도 할 수 없음이니이다”(2b) 다른 종교지도자들이나 바리새인들이 주님께 대하여 어떤 반응을 가지던 자신은 예수 그리스도를 하늘에서 보내신 분이요 그 증거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행하시는 표적이라고 고백하는 것이다.

사실 당시의 상황에서 이러한 고백을 드릴 수 있었던 것도 인간적인 입장이나 문화나 사회적인 입장에서 불가능한 고백이었다. 당시의 이스라엘 종교 지도자들은 한결같이 예수 그리스도를 이단자로 거절하고 대적할 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예수를 그리스도로 인정하는 사람들은 유대교에서 출교를 시켜서 국가적인 혜택에서 완전히 제외시켰음을 본다.(9:22, 12:42)

이런 분위기 속에서 비록 밤일지라도 예수 그리스도를 찾아와 이와 같은 고백을 드릴 수 있었던 것은 대단한 용기와 결단이 필요한 상황이었을 것이다. 항상 예수님 부근에는 병을 고치기 위한 일반 사람들이거나 심지어는 올무를 걸기 위한 당시 종교 지도자의 하수인들조차 많은 사람들이 왕래하고 있었고 그런 사람의 눈에 뜨인다면 자신의 명예나 지위는 하루아침에 잃을 수고 있는 상황이었다.

이런 조건 속에서 니고데모의 취한 행동은 영적으로 대단히 도전적인 용기를 가진 사람으로 본 받을만한 사람이었다. 바른 신앙은 항상 생명을 바치는 용기가 필요함은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신 바이다.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마16:25; 막8:35; 눅9:24)



Ⅱ. 거듭나지 아니하면 …,(3~5)

어렵게 찾아와서 주님께 “랍비여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인 줄 아나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아니하시면 당신이 행하시는 이 표적을 아무도 할 수 없음이니이다”(2)라는 고백을 드리는 니고데모에게 주님은 東問西答과 같은 답변을 주신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3) 이 표현은 어쩌면 니고데모가 비록 유대교의 지도자요 선생일지라도 바른 천국을 보고있지 못하다는 책망과 같은 말씀일 수도 있는데 그것은 거듭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OT속에서는 깊이 감춰져 있지만 복음의 완성 후에 강조되고 있는 내용은 사람이 태어난 자연인으로서는 영적인 하나님의 약속에 대해서만은 절대로 어떤 접근도 불가능하다는 사실이다. 자연인으로 천국이 보인다고 하는 것은 불가능한 것일 뿐만 아니라 봤다고 해도 거짓된 것들이다.[回生者 證言]

뒤에6~7의 부분에서 좀더 생각을 해 보겠지만 육으로 난 자연인은 영적인 하나님의 나라가 절대로 보여지지 않고 거듭날 것을 명령하시는 하나님의 요구는 바로 그런 때문이다. 肉身的인 視覺과 靈的인 시각은 전혀 다른 것이기 때문에 영적으로 거듭나야 한다는 것이다.

앞에서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마28:19~20f) 명령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은 이러한 이유 때문임을 이해할 수 있다. 이 명령의 원리는 순서가 바뀔 수 없다.

이러한 명령은 이 땅에 교회가 탄생하면서부터 사도행전 속에 그대로 실천되어졌음을 본다. 최초의 오순절날 베드로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니”(행2:38)라는 메시지를 듣고 순종한 사람들은 당장에 이 명령을 따르는 모습이 “그 말을 받은 사람들은 세례를 받으매 이 날에 신도의 수가 삼천이나 더하더라”(행2:41)

이것은 군중이나 개인(행8:37~38)은 물론이고 家庭들도 마찬가지였다. “그와 그 집이 다 세례를 받고 …”(루디아-행16:15f) “그 밤 그 시각에 간수가 … 자기와 그 온 가족이 다 세례를 받은 후”(행16:33) 가족 간에도 영적인 이해가 다 다를 수 있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희생을 자신의 것으로 믿고 받아들일 수 있다면 예외없이 침례를 받았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백성으로 즉, 영적으로 거듭남이 없다면 하나님의 영적인 이치가 육으로 난 사람에게는 이해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있게 하기 위해서’는 영적으로 반드시 거듭남이 먼저이며; 그런 다음에 하나님의 삶의 원리를 가르침이 비로소 바로 이해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가르침에도 “니고데모가 이르되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사옵나이까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사옵나이까”(4) 이것이 바로 거듭나지못한 사람이 영적인 이치를 이해하는 전형적인 모습니다. 주님의 영적인 가르침에 부조화는 바로 肉身的인 반응이 나타남을 보게 된다.

이스라엘 종교의 스승이요 지도자라고 하는 니고데모에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5)고 다시 말씀하신다.

우리가 다음 주에 나누는v9~에서 보면 이렇게 말씀을 해 주심에도 여전히 니고데모는 같은 반응을 보이고 있다. “왜, 그럴까!” 그렇다. 거듭나지 못했기 때문에 하늘의 이치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을 이 대화 자체에서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 영적인 두가지 이치의 말씀에 동일하게 강조되고 있는 주님의 말씀이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라는 표현이다. 이것은 사람으로서 바꿀 수 없고 지켜야만 하는 원리임을 강조하기 위해서이다.

“…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5m) 여기서 성령으로 나는 것은 영적으로 이해가 되는데 ‘물로 난다고 하는 것이 어떻게 영적일 수 있는가?’ 하는 의문이 생기는 것은 당연하다. 분명한 것은 ‘물’이 어떤 신비한 능력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마련하신 방법이기 때문에 영적일 수 있는 것이다. 이 역시 육신적으로는 이해가 불가능한 이치이다.

‘설마, 물 속에 한번 들어 갔다가 나오는 것이 하늘나라에 들어가고 못 들어가는 이유가 될까!’ 육신적으로 충분히 그렇게 오해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은 어떤 하늘 나라의 신비한 방법이 아니라 언제나 사람이 가능한 것들을 통하여 순종을 요구하심으로 역시 공의로우신 사랑의 하나님이심을 이해하게 된다.

우리는 “물과 성령으로” 나는 것이 두 번의 횟수가 필요하다고 오해할 수 있지만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행2:37)라고 구원을 요청하는 오순절날 천하각지에서 모여든 유대인들에게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니”(v38)라는 약속에서 확인할 수 있다.

말씀에 순종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는 것이었고 거기에 따른 결과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니”라는 약속은 同時的임을 이해할 수 있다. 물론 이 세례를 받는 순종은 자신의 옛사람을 물 속에 장사 지내고 부활하는 귀중한 이치를 로마서6:3~6에 분명히 기록하고 있다.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냐,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도 되리라”

우리는 영지주의자들에게 우리와 같은 육신으로 이 땅에 임하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확인시키는 서신이 같은 요한 사도가 기록한 요한일서에서 귀중한 증거를 접하게 된다.

“이는 물과 피로 임하신 이시니 곧 예수 그리스도시라 물로만 아니요 물과 피로 임하셨고 증언하는 이는 성령이시니 성령은 진리니라, 증언하는 이가 셋이니, 성령과 물과 피라 또한 이 셋은 합하여 하나이니라”(5:6~8)

이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이신 사실을 증거하는 것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세례와 십자가의 피 흘리심, 그리고 함께하신 진리의 영이신 성령을 증거하는 교훈으로 이해하지만 오늘 거듭남의 이치로도 이해할 수 있는 말씀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피 흘리심이 죄인 된 사람에게 효력을 미치는 것은 바로 ‘물’로 임을 확인하는 교훈이다. ‘피’와 ‘성령’은 하나님 편의 약속이면서 증거라면 ‘물’은 바로 죄의 사람이 죽고 거듭나는 믿음의 결정적인 순종의 증거로 보이는 사람들과 영적인 증거가 되는 것이다.

그런 이치는 바로 창조주요 구세주이신 하나님 아버지의 구원을 위한 명령으로 “…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5m)이라는 단서를 주셨고 육신의 보기에는 사뭇 어리석어 보이기 까지 하지만 이 약속 만큼이나 분명히 나타나는 명령이나 사실은 복음의 완성 후에 없었다.

바울은 이 사실을 이스라엘 백성이 되는 조건인 할례와 더불어 견주면서 확인해주고 있다. “또 그 안에서 너희가 손으로 하지 아니한 할례를 받았으니 곧 육의 몸을 벗는 것이요 그리스도의 할례니라, 너희가 세례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되고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그를 일으키신 하나님의 역사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 안에서 함께 일으키심을 받았느니라”(골2:11~12)



Ⅲ. 사람의 이해가 불가능한 거듭남,(6~8)

여태껏 설명을 한다고 했지만 육신적으로 이해가 쉽지는 않은 것처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니고데모에게 이 부분을 다시 설명해 주신다.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니”(6) 조금 이해를 돕는다면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는 속담과 같다. 사람은 사람을 낳고, 소는 소를 낳고, 돼지는 돼지를 낳게 되어 있는 것처럼 영적으로 난 것은 육신의 이치로 이해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을 순종하는 것뿐이다.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놀랍게 여기지 말라”(7) 이스라엘의 종교적 지도자로 할례를 거쳐 이미 이스라엘 즉, 하나님의 약속에 있는 아브라함의 가문이요 후손이라고 확신하는 니고데모에게 “누구를 막론하고 거듭나야만 한다.”는 주님의 말씀에 혼란을 겪을 만한 일이었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생각하고 판단해서 이해가 안될 뿐이지 이것은 만들어진 이야기가 아니라 분명한 사실이다. 나중 v12에서는 “내가 땅의 일을 말하여도 너희가 믿지 아니하거든 하물며 하늘의 일을 말하면 어떻게 믿겠느냐”고 주님은 안타까워하신다.

오늘 말씀의 최종적으로는 이 우리 세상에 일어나는 기후 변화의 이치를 통해서 다시 이해를 도우려 하신다.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는 들어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도 다 그러하니라”(8)

이 비유는 이해를 돕기 위한 것이기 때문에 그렇게 신비하게 이해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독특한 성경적 표현 중의 하나가 ‘바람’이나 ‘성령’을 의미하는 단어가 같은 [πνεῦμα, 바람, 호흡, 영, 정신 등등 (NT 385회) ← πνέω, (바람이) 불다, 숨쉬다]라는 낱말로 쓰여있다.

바람을 일으키고 기후를 움직이시는 하나님께서는 바람이 어디서 시작되고 어디에까지 부는지를 아시겠지만 사람들은 바람을 느끼면서도 바람의 시작과 끝을 절대로 이해할 수 없는 것처럼 영적이 이치가 그렇다고 말씀하신다.

요즘은 수퍼 컴퓨터와 기상 인공위성을 비롯한 최첨단 장비들을 통해서 우리 나라를 스치고 지나가는 태풍의 발생 장소와 진로, 그리고 소멸될 지점까지 어느정도는 예측을 해 내기도 한다. 그럼에도 진로를 예고 했다가 빗나가기가 십상이다.

그러나 바람이 분다는 사실을 가장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은 그 바람이 불면서 일으키는 현상들이다. 나뭇가지가 흔들리고 여름에는 시원하고 겨울에는 바람 때문에 추위를 더 느끼기도 한다. 그럼에도 바람의 시작과 끝을 일반적으로 모르는 것처럼 “성령으로 난 사람도 다 그러하니라” 한 것이다.

영적인 거듭남의 변화는 외형적으로 나타나는 어떤 모습보다도(코가 높아지거나 눈이 커지지 않는다.) 성령의 이끌림을 받는 거듭난 사람의 인간적으로 알 수 없는 변화이다. 이것이 바로 삶에 나타나는 성령의 열매들이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갈5:22~23) 언제부터 였는지 모르지만 육신적이고 정욕적인 성품이 바뀐 道德的으로도 흠잡을 데가 없는 그런 사람이 되어 있는 우리를 보면서 사람들이 놀랄 수 있다면 이런 거듭남이 주변의 사람들에게도 분명히 큰 영향을 끼칠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의 구원과 사랑의 이치,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를 바로 이해하려면 나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에 하나가 되는 하나님의 명령 이신 침례를 통하여 거듭나야 바로 이해될 수가 있어서 가르침을 받을 수 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 거듭남이 먼저이고 그 후에야 비로소 하나님의 생명의 이치가 거듭난 사람들 속에 함께 와 계시는 성령을 통하여 이해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