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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배 전도자
요 3:9~15 2019-03-17
어찌 그러한 일이 있을 수 있나이까?  
자연인이 하늘로부터 거듭 난다는 주님의 말씀에 당시의 성경적인 바탕을 분명히 가지고 있던 니고데모 조차도 의아해 하는 것은 그만큼 사람들에게 익숙하지 않은 이론이고 더욱이 세상에는 없는 논리일 수밖에 없었다.

OT성경에 익숙해 있는 성경을 가르치는 지도자가 이것을 이해하지 못했다고 하는 것은 율법에는 분명히 나타나 있지 않은 전혀 새로운 계시였음을 의미하고 그런 이유에서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를 통해서 말씀하신 바 있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새 언약을 맺으리라, 이 언약은 내가 그들의 조상들의 손을 잡고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에 맺은 것과 같지 아니할 것은 …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과 맺을 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들의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렘31:31~33)

하늘에서 오신 분이 땅에서 난 사람에게 말씀하시는 것을 완벽하게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고 볼 수밖에 없다. 땅에 존재할 수 없는 이런 이론을 아무리 땅의 것을 비유하여 말한다고 할지라도 이해를 제대로 하지 못하는 것이 어쩌면 더 자연스러울 것이다.

사람이 거듭나야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있다는 말씀과 물과 성령으로 나야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는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에 “어찌 그러한 일이 있을 수 있나이까?”(9b)라는 질문은 육으로 난 니고데모를 비롯한 세상의 모든 지식을 가진 사람들이 물을 수 있는 질문이고 그것은 사람의 이해의 한계를 넘어서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임을 증거 하시는데 결국 예수 그리스도 자신의 희생이 바탕이 되어야함을 증거하신다.



Ⅰ. 세상의 지식으로는 알 수 없다.(9~10)

“니고데모가 대답하여 이르되 어찌 그러한 일이 있을 수 있나이까, 예수께서 그에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의 선생으로서 이러한 것들을 알지 못하느냐”

사실 육신을 입고 있고 지구의 인력의 법칙 때문에 땅에서 발을 땔 수 없는 인생이 하늘로부터 다시 난다는 것은 사람의 생각이나 과학적 이론으로도 불가능한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이것을 누가 말하고 있는가를 바로 이해한다면 즉, 이 만류인력(萬有引力)의 법칙을 만드시고 사람을 지으셨을 뿐만 아니라 절대적인 신뢰를 가지고 계신 분이 하시는 말씀이라면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니고데모가 앞에 v2서 말한 대로 “랍비여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인 줄 아나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아니하시면 당신이 행하시는 이 표적을 아무도 할 수 없음이니이다”라는 고백을 진심으로 드렸다면 “어찌 그러한 일이 있을 수 있나이까”(9)라는 의구심은 어울리지 않는 말이다.

어쩌면 영적인 대부분의 이치가 사람의 일반 지식으로는 이해가 되지 않는 것들이다. 이에 대한 바울을 통한 가르침은 “우리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사람의 지혜가 가르친 말로 아니하고 오직 성령께서 가르치신 것으로 하니 영적인 일은 영적인 것으로 분별하느니라,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들을 받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것들이 그에게는 어리석게 보임이요, 또 그는 그것들을 알 수도 없나니 그러한 일은 영적으로 분별되기 때문이라”(고전2:13~14)고 증거하고 있다.

아무리 총명하고 지식을 많이 가진 사람이라도 하나님께서 계시로 주신 것들은 성령의 지도가 없이는 이해가 불가능함을 성경 자체에서 증거하고 있다.

“…어찌 그러한 일이 있을 수 있나이까?”라는 니고데모의 반박은 ‘그런 일은 불가능한 일입니다.’라는 의미로 이해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항상 사람으로서는 불가능하지만 하나님께 불가능한 일은 있을 수 없다.

마태복음19:16~ 예수님은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묻는 부자 청년에게 마지막으로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는 말씀에 재물이 많으므로 이 말씀을 듣고 근심하며 가는 청년을 두고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려우니라” 말씀하시자 제자들이 몹시 놀라 “그렇다면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으리이까?” 묻자, 주님께서 다시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 증거하셨다.

구원 얻는 일 자체가 사람으로서는 불가능하지만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기 때문에 가능한 것처럼, 육으로 난 사람이 하늘로부터 거듭나게 하는 법은 사람이 만든 종교적 법칙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친히 마련하신 신령한 방법이다.

그런 사실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직접 지적하신다. “예수께서 그에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의 선생으로서 이러한 것들을 알지 못하느냐”(10) 이스라엘 하면 하나님을 아는 백성이고 무엇보다도 성경을 아는 사람들인데 그 이스라엘의 랍비쯤 된다면 영적인 이치를 당연히 알고 있어야 함에도 니고데모도 땅에서 난 사람이기 때문에 성령으로 다시 나지 않는 이상 깨닫지 못하는 것이다.

어쩌면 주님께서 니고데모에게 말씀하신 내용은 동일하게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는 나에게 묻고 계신 것처럼 들린다. “예수께서 나에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는 왕 같은 제사장이라고 하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이러한 것들을 알지 못하느냐?”(10)

이런 이유에서 우리가 진리이신 주님을 아는 것부터 이기 때문에 “…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으로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요8:31b~32) 가르치셨다. 이런 믿음의 이치를 어렵지 않게 이해하고 다른 사람들에게도 자연스럽게 가르칠 수 있는 준비된 일꾼이요 하나님의 백성으로 남아야 할 것이다.



Ⅱ. 하늘의 일이다.(11~12)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우리는 아는 것을 말하고 본 것을 증언하노라 그러나 너희가 우리의 증언을 받지 아니하는도다, 내가 땅의 일을 말하여도 너희가 믿지 아니하거든 하물며 하늘의 일을 말하면 어떻게 믿겠느냐”

예수 그리스도께서 없는 일을 말씀하시거나 지어 만든 이야기를 하고 계심도 아님에도 불구하고 니고데모는 물론이고 당시의 하나님의 말씀인 구약성경을 어느정도 알고 있는 종교적인 지식을 가졌다고 하는 사람들도 주님의 가르침을 이해하는 사람들은 없었다.

다만 예수 그리스도를 이스라엘에 준비시킨 침례자 요한이나 극단적인 경우에는 오히려 귀신들린 사람들만이 주님을 알아보고 인정했다. 심지어는 3년을 데리고 다니시면서 가르치고 보여준 제자들까지도 여전히 그들에게 성령이 오시기 전까지는 의아해 할 뿐 이었음을 볼 수 있다.

이런 이유에서 주님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우리는 아는 것을 말하고 본 것을 증언하노라 그러나 너희가 우리의 증언을 받지 아니하는도다”(11)라는 말씀은 비단 니고데모에게만 하시는 말씀이 아니라 당시의 불신하는 이스라엘 백성의 종교지도자들을 향한 안타까운 탄식 이셨을 것이다.

여기에 “우리는 아는 것을 말하고 본 것을 증언하노라” 하셨던 [우리]에 대한 여러가지 이해들이 있기는 했지만 예수님과 같은 취급을 받았던 역시 하늘로부터 메시야의 길을 예비하라고 보냄을 받았던 세례요한이나 선지자들과 함께 하시는 말씀이라고 이해된다.

특히 침례자 요한도 하나님께서 보내셨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향하여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1:29, 36)라고 선언하였지만 그것을 받아들이는 종교지도자들은 없었다.

요한은 그것이 자신의 감정적인 생각을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 “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 나를 보내어 물로 세례를 베풀라 하신 그이가 나에게 말씀하시되 성령이 내려서 누구 위에든지 머무는 것을 보거든 그가 곧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는 이인 줄 알라 하셨기에, 내가 보고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언하였노라”(1:33~34)고 설명하기까지 한다.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우리는 아는 것을 말하고 본 것을 증언하노라…”(11f)시는 주님의 증거는 오늘도 우리는 확신하고 전할지라도 역시 육으로만 난 사람들이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것일 수도 있다. ‘예수님께서 증거 하셔도 사람들이 받아 들이지 못하는 것을 우리야 더 어렵지 않겠는가!’ 위로를 삼고 전하라 했으니 순종하면 그만이다. 그 결과는 들은 사람들과 하나님과의 문제일 것이기 때문이다.

“… 그러나 너희가 우리의 증언을 받지 아니하는도다”(11b) 알고 본 것을 증거하는 사람은 분명한 ‘증인’이지만 증인의 증거를 무시한다면 더 이상 어떤 증거도 호소력을 잃게 되는 것이므로 극단적으로 방법이 없다는 말씀이다.

“내가 땅의 일을 말하여도 너희가 믿지 아니하거든 하물며 하늘의 일을 말하면 어떻게 믿겠느냐”(12) 아는 것과 본 것을 증거함에 있어서 땅의 적절한 내용과 비유를 들어서 설명을 해도 이해를 못하기 때문에 그들에게 하늘의 이치를 깨닫는 것을 기대할 수 없다는 안타까움이다.

이 요한복음에서 계속 이런 부딪힘을 볼 수 있는데 특히 8장에 가서는 더 극명하게 논쟁하는 내용들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어떤 경우에서는 성경과 사실을 들어 말씀하심에도 돌아오는 답변은 전혀 이해하지 못한 내용들 뿐이었다. 지난 번에도 말한 바 있지만 하나님은 사람들이 전혀 알아들을 수 없는 신비한 말씀만을 증거하시는 분이 아니시다.

그런 말씀을 하시고 나서 “내가 땅의 일을 말하여도 너희가 믿지 아니하거든 …”(12f)이라고 저들에게 핑계를 대실 주님이 결코 아니시다. 언어가 다르거나 낱말이나 문맥을 이해하지 못해서가 아니라 불신하려는 자세로 달려드는 사람들은 사실 설득시킬 방법이 없다.

“… 하늘의 일을 말하면 어떻게 믿겠느냐”(12b) 서로의 같은 접촉 점이 없다면 대화는 불가능할 뿐이다. 아무리 하늘의 신령한 이야기를 한다고 해도 받아들여 질 수 없음을 탄식하신다.

우리 주님은 여기에 좀더 사실적인 역사적 예를 들어서 자신이 사실 불신하는 그들을 위해 오셨음을 증거하는 것이 마지막이면서 결론적인 가르침이다.



Ⅲ. 인자가 들림으로 가능해졌다.(13~15)

“하늘에서 내려온 자 곧 인자 외에는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느니라,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니고데모의 이해의 불가능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다만 형벌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알게 하는 것이 더 중요한 주님의 가르침이다. 그러므로 “어찌 그러한 일이 있을 수 있나이까?”(9b)라는 질문에 대한 보다 본질적인 답변을 주시려고 자신의 희생을 증거하신다.

먼저는 “하늘에서 내려온 자 곧 인자 외에는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느니라”(13)는 우리 입장에서 조금은 어려운 말씀을 하신다. 특히 내려 오신 것은 이해가 되는데 ‘올라간 자’가 동사(verb) 시재(tense)가 미래형이 아니라 완료형으로 쓰여졌다고 하는 것이다.

성경 속에서는 하늘에 올라간 두 사람이 있다. 곧 ‘에녹’(창5:24)과 ‘엘리야’(왕하2:11)이다. 그러나 이들은 한결 같이 땅에서 나서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사람에 불과할 뿐이다. 그러나 “하늘에서 내려온 자 곧 인자 외에는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느니라”(13)는 말씀은 ‘내려온 자(ἀναβαίνω)’와 ‘올라간 자(καταβαίνω)’가 좀 어려운 표현이 될 지 모르지만 동격(apposition)으로 하늘을 오르내릴 수 있는 분이심을 의미한다.

이런 이유 때문에서 KJV 같은 경우는 “No one has ascended to heaven but He who came down from heaven, that is, the Son of Man who is in heaven. 하늘에서 내려온 자 곧 하늘에 있는 인자 외에는 하늘에 올라간 자가 아무도 없느니라.”고 번역을 하고 있다.

사람들과 다른 차원의 하늘에 주로 계시는 분 이심에도 사람을 위해서 낮아지시고 사람이 당할 수 있는 온 갓 제약(restriction)을 다 감당하시는 이유는 땅에서 나서 흙으로 끝날 뿐만 아니라 그러한 결과마저 형벌일 수 밖에 없는 죄인 된 인간을 처음 하늘의 생기를 불어넣어 생령(living being)이 되게 하셨던 첫 창조를 회복하시려는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이 절정에 이른 것이 바로 독생자를 통한 구속의 역사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인류를 구원하시려는 사랑의 역사를 가장 분명히 기록한 성경을 일고 가르친다고 하는 이스라엘의 선생인 니고데모 조차도 이것을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어찌 그러한 일이 있을 수 있나이까?”라고 반문하고 있으니 주님의 안타까움이 오죽 했겠는가!

이제 좀더 사실적인 가르침으로 다시 니고데모에게 접근하신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14) 이 사건은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너무나 유명한 사건이었기 때문에 이스라엘 사람이면 아니 성경을 읽는 사람이면 모르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민21:4~9)

이 사건의 발단은 사람들에게 있어서 가장 일반적인 상황 속에서 있었던 사건이라는 데서 가장 보편적인 예가 될 것 같다. “백성이 호르 산에서 출발하여 홍해 길을 따라 에돔 땅을 우회하려 하였다가 길로 말미암아 백성의 마음이 상하니라”(민21:4) 기록되고 있다.

편하게 바로 갈 수 없고 돌아가야만 할 입장인데 그 길조차 평탄치 못한 상황이 요즘 표현으로 저들을 짜증나게 하였다. 인생을 가는 인생길이 거칠 때 불만을 토하는 것과 다르지 않은 표현이다. 이런 거친 행보가 저들의 불평으로 이어졌다. “백성이 하나님과 모세를 향하여 원망하되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해 내어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는가 이 곳에는 먹을 것도 없고 물도 없도다 우리 마음이 이 하찮은 음식을 싫어하노라 하매”(5)

길 하나가 불편한 것뿐이었는데 안타까운 것은 거기에다가 온 갓 불만을 다 갖다 붙여서 원망하고 있고 이것이 죄성(罪性)을 가진 사람들의 가장 일반적인 모습이라고 보여진다. 죄에 노예로 사는 사람들에게는 감사나 기쁨은 없고 오로지 불평과 원망과 핑계만 종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다.

이런 이유에서 천국의 백성들은 감사와 기쁨과 화해와 찬양이 충만 한 사람들이기 때문에 바울이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살전5:16~18)는 당부는 천국의 백성 다움을 회복하고 나타내라는 요청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불만이 가득한 상황에 나타날 수 있는 것은 바로 마귀 사탄이 기회를 잡을 수 있는 상징적인 모습에서 그곳에서는 불뱀들이 그 불평하는 백성들을 물어 죽였고 그제서야 백성들은 불평이 얼마나 자신들에게 좋지 않은 것임을 알고 회개하게 된다.

“우리가 여호와와 당신을 향하여 원망함으로 범죄하였사오니 여호와께 기도하여 이 뱀들을 우리에게서 떠나게 하소서”(7) 이런 회개의 응답으로 나온 치료 처방이 바로 불뱀과 같은 모양의 구리뱀을 만들어 장대에 높이 다는 것이었고 비록 불뱀에 물려서 퉁퉁 부어가던 사람도 이 하나님의 약속을 그대로 믿고 그 구리뱀을 쳐다 보는 사람은 예외없이 치료가 되었다.(민21:9)

이 사실적인 상황에서도 깨달아야 하는 것은 ‘구리뱀이 신기한 능력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안타깝게도 나중에 이스라엘은 히스기야 때까지 이 구리뱀을 버리지 못하고 그것을 숭배하는 잘못을 계속해 왔음을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볼 수 있다. 그럼에도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을 믿고 순종하는 사람들에게는 구원의 역사가 사실적으로 나타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런 역사적인 사실을 주님께서 인용하시면서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14) 하신 것은 모세의 구리뱀의 사건보다 비교될 수 없는 약속이라는 사실이다. 그 아무 생명의 능력이 없는 구리뱀도 이스라엘 백성을 죽음에서 구원하였다면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야 말로 얼마나 큰 능력이 있겠는가 하는 약속을 확신할 수 있다.

그럼에도 이 광야에서 구리뱀 사건은 이 역사 속에 하나님의 아들이 오셔서 십자가에 높이 달릴 것에 대한 예시(豫示)였다는 사실이다. 에덴에서 쫓겨난 이후 죄 짓기를 물 마시듯 하는 사람들은 결국 “옛 뱀 곧 마귀라고도 하고 사탄”(계12:9, 20:2)에게 물려 죽을 수 밖에 없는 운명이지만, 인류의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 높이 달리신 주님을 믿음으로 바라보고 순종하면 저주와 죽음의 뱀 독에서 해독될 수 있게 하셨다.

주님께서 이런 귀중한 이치를 말씀하시기를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15)는 이치를 설명하시는 것이다. 좀 더 진행하면서 이것이 운명을 결정하게 하는 분기점이 됨을 선언 하신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요5:24)

결국 세상의 최고의 지식이 “어찌 그러한 일이 있을 수 있나이까?”(9b)라는 거듭남의 영적인 질문에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희생으로 가능하심을 증거하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