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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배 전도자
요 3:16~21 2019-03-24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육신으로 와 계실 때 니고데모를 포함한 하나님의 말씀을 익히 알고 있다는 종교지도자들 조차도 주님의 나타나심을 결코 달가워하지 않았었다. 이유는 이미 그들이 하나님의 진리를 순종하고 행하고 있었다면 그렇게 되지 않았겠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관념적으로나 이성적으로만 이해할 뿐이고 오히려 육신의 유익을 위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악용하고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그들의 행동을 고무하고 칭찬하는 것은 거의 없었던 것으로 성경에 나타난다.

그런 입장이 되다 보니 그래도 긍정적으로 접근했던 니고데모 조차도 칭찬보다는 책망이 더 많았고 진리를 증거하시는 것들이 자신들이 알고 있는 것과는 거리가 있는 새로운 것으로만 말씀하시는 것 같은 오해와 함께 자신들의 종교를 허물려고 오신 것 같은 오해를 하고 그런 입장에서 계속 주님을 죽이려는 시도까지 하는 경우도 여러 번 이었음을 복음서들이 증거해 주고 있다.

“만일 그를 이대로 두면 모든 사람이 그를 믿을 것이요 그리고 로마인들이 와서 우리 땅과 민족을 빼앗아 가리라”(11:48) 하였고 당시의 제사장이었던 가야바라는 사람은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어서 온 민족이 망하지 않게 되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한 줄을 생각하지 아니하는도다”(11:50)라고까지 말했다.

이렇게 부정적이고 그들을 하나님께서 미워하신다고 생각하고 판단하는 그들의 오해 앞에서 사실에 있어서는 전혀 그런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자신을 보내신 것은 이스라엘뿐만 아니라 세상 전체를 구원하시려는 사랑이심을 증거하시고 그들을 책망하고 교훈 하심 자체가 하나님의 사랑의 속성에서 기인함을 말씀하시는 것이 오늘 내용의 전체이다.

앞에서 인용한 모세의 구리 뱀 조차가 믿음의 문제였었고 지금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려는 사랑을 믿고 받아들일 때 이 하나님의 사랑이 효력을 나타낼 수 있음을 증거하시는 내용이 “그를 믿는 자마다, 그를 믿는 자는, 믿지 아니하는 자는”이라는 표현들로 하나님의 사랑의 반응에 따라 다른 결과를 가져옴을 증거하신다.

하나님의 사랑에 반응하는 각 사람에 따라 열매가 다르게 나타나고 그것은 결과적으로 감춰질 수 없는 하나님의 빛의 역사로 나타날 수 밖에 없음도 마지막 부분에서 말씀하신다. 하나님은 빛이신 속성이 역사 속에 이러한 결과도 나타내심을 증거하고 계신다.



Ⅰ. 하나님의 사랑 실천.(16~17)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이 요한복음의 가장 핵심적인 교훈이고 하나님의 주체하실 수 없는 사랑의 역사를 증거하고 계신다. 이 역사 속에 하늘을 우러러 보다 근본적인 사람의 숙제를 풀어 내려는 사람들은 수없이 많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것이 실패 될 수 밖에 없었던 이유는 그것이 하나님을 제쳐두고 자신들의 가치와 방법으로 시도해 보려는 인간 위주의 종교적 노력 이었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에서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는 하나님의 자발적인 사랑의 실천이셨고 죄에 신음하며 죽어가는 인간의 비극을 두고 보실 수 없으셨던 하나님의 아픔이셨기 때문이다. 이 하나님의 사랑은 많은 사람들이 오해하는 것처럼 절대로 전시적이거나 공치사가 아니라 사실적이심을 너무나 분명히 드러내신다.

“하나님이 세상을 … 사랑하사”가 아니라 “이렇게 사랑하사”라고 요한을 통해서 증거하신다. “이처럼”이나 “이렇게”는 하나님의 사랑의 구체적인 행위를 증거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이 세상을 사랑하시는 구체적인 모습이 이렇게 나타났다.”고 보여주고 있다.

사랑은 관념적일 때 아무 역할도 할 수 없다. 사랑은 반드시 사랑하는 행동을 수반하게 되어 있어야 진정한 사랑이기 때문에 사람 간에도 ‘당신이 진정으로 나를 사랑한다면 이렇게 해 보셔요!’라고 구체적인 행동을 확인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그럼으로 하나님의 사랑하심의 “이렇게”가 바로 “독생자를 주셨으니”이다. 하나님은 온 우주의 창조자 이시고 섭리자로 모든 것을 다 가지고 계신 분이시기 때문에 그 많은 것들 중에 하나를 주신다고 해도 별로 귀중할 것이 없으신 분이시다.

다윗이 고백하는 대로 “여호와여 위대하심과 권능과 영광과 승리와 위엄이 다 주께 속하였사오니 천지에 있는 것이 다 주의 것이로소이다 여호와여 주권도 주께 속하였사오니 주는 높으사 만물의 머리이심이니이다”(대상29:11) 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유일하게 하나밖에 없는 것이 바로 “독생자[μονογενής, monogenẽs, (많은 여러 개 가운데 하나가 아니라) 유일한, 하나밖에 없는]”이다. 하나님은 무한하신 능력과 모든 것을 가지고 계시지만 정말 하나 밖에 없는 독생자를 주심으로 이 죄에 빠진 인류를 사랑하셨다고 표현한다.

또 하나 “주셨으니”도 의미에서는 다르지 않지만 그냥 손에 넘겨 주듯 주신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온 인류의 죄에 대해 분노하시는 하나님의 모든 공의를 실어 세상에서 가장 잔인하고 수치스러운 죄의 대가를 십자가에 치루게 하시고 공의를 거기에 쏟으셨다.

그러한 있을 수 없는 희생의 역사가 이루어졌기 때문에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16b)는 분명한 역사가 가능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것은 과거의 한 사람의 한 가지의 죄를 속할 때마다 흠 없는 어린양 한 마리가 죽었던 것으로는 이 역사 속에 모든 양이 다 죽는다고 해도 속죄가 불가능하기 때문에 창세전부터 마련하신 하나님의 방법 이셨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럼에도 이 효력은 과거 이스라엘과 같은 선택된 나라나 단체가 아니라 “믿는 자마다”라는 수용하고 받아 들이는 각 사람에게 나타나게 됨을 선언하신다. 이왕에 범죄한 사람은 예외없이 각각 멸망할 수밖에 없었는데 이것이 반전되어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는 확신을 주신 것이다.

다음 절의 내용도 다른 것이 아닌 이 언약의 확인이다.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17) 요즘 불신하는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신으로 오셨던 당시처럼 마치 주님을 이 세상을 심판하기 위해 보내신 것으로 오해하는 경향이 있지만 안타깝게도 그것은 전적으로 사랑에 대한 오해임을 알아야 할 것이다.

앞에서 말한 대로 하나님은 인류를 멸망시키실 의향이 절대로 아니라 하나님의 영원한 영광의 속성과 성품을 함께 누리기를 원하심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이는 확실히 천사들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아브라함의 자손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라”(히2:16)

하나님은 분명 공의의 하나님이시지만 공의와 전혀 다르지 않은 사랑을 가지고 계시기 때문에 자신의 독생자를 이 역사에 내려 보내신 것도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라는 약속을 확인해주고 있다.

더 중요한 것은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17b)는 방법적인 약속도 여기에 포함되고 있다. 이러한 하나님의 공의로운 약속 때문에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행4:12)는 말씀도 주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인류의 구원은 오로지 “그로 말미암아” 즉,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뿐이다. 이것이 창조주의 약속이요 이 우주를 운행하시는 분의 바꿀 수 없는 구원의 통로이다. 비록 어떤 사람들은 ‘왜, 예수 만을 통해서냐?’ 불만 할 수 있지만 사실에 있어서는 이런 불만 보다는 약속에 응답하는 것이 확신한 사랑을 받고 누리는 은혜일 것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모든 사람이 이러한 사랑과 은혜를 다 환영하고 즐거워하는 것이 아님을 다음 부분에서 보게 된다.



Ⅱ. 사랑에 반응하는 세상,(18~19)

“그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

죄에 대하여는 스스로 해결할 수 없어서 절망하는 인류를 위하여 유일하신 독생자를 주심으로 저주와 영원한 형벌에서 자유함을 얻음에 대한 확인을 주고 있다. “그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18f) 너무나 당연한 이치이다. 창조주께서 “너의 형벌을 나의 독생자에게 지웠다.” 말씀하시고 그 사랑의 역사에 “아멘!”이라고 응답하는 자들은 당연히 형벌을 통과한 것이 되기 때문에 일사부재리(一事不再理, non bis in idem) 원칙에 의하여 더 이상 형벌을 묻지 않는 것은 현행법에서도 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사랑을 사랑으로 누리지 못하는 안타까운 대상도 말씀하고 계신다. “…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18b)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는 그 이름 자체가 ‘야훼는 구원’, 풀어서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마1:21)라는 분명한 뜻과 약속을 가진다.

이것이 창조주요 인류를 존재하게 하신 구세주이신 하나님의 이루신 역사라면 이 외의 어떤 방법도 없다는 확신을 가질 수 있다. 그럼에도 안타까운 것은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다른 데로부터 구원에 대한 기대와 소망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사람이 만든 종교나 심지어는 외계外界로부터)

그러나 성경은 분명히 단언하여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18b)고 선언하였다. 이미 구원에 관한 한은 이 역사 속에서 완성해 놓으신 것이기 때문에 구원에 있어서도 완료일 뿐만 아니라 심판에 대해서도 완료형으로 쓰이고 있다.

구원에 대하여도 같은 요한복음에서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요5:24)는 약속을 읽어 볼 수 있다.

여기에 반대되는 반응에 대한 형벌도 이미 완료형인 것은 당연하다. “…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18b)

그러한 이유에 대하여 증거하고 있다.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19) 여기에서부터 다음 부분에서 상고할 내용까지는 계속 하나님의 사랑의 속성과 함께 나타나는 [빛]을 증거함을 본다.

사랑을 나타내고자 하는 것이 빛이라면 죄는 가리려고 하는 것이 어두움 임을 우리는 일반적으로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주님께서도 “예수께서 또 일러 가라사대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요8:12) 말씀하셨다.

세번째 단락에서 다루게 되겠지만 사랑과 미움의 삶의 상태는 바로 빛으로 나타날 것을 증거한다. 또 우리 역시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을 힘입기 전에는 어두움 이었음을 증거하고 있다. “너희가 전에는 어두움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엡5:8)

하나님은 죄의 캄캄한 어둠 속에 갇혀있는 인류를 빛으로 이끌어 내시기 위하여 자신의 독생자로 하여금 그 캄캄한 흑암을 맛보게 하셨다. 주님의 비유 가운데서도 죄와 미움에 대한 형벌을 묘사하시는 표현이 “임금이 사환들에게 말하되 그 수족을 결박하여 바깥 어두움에 내어 던지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마22:13) 증거 하셨다.

하나님의 사랑에 붙잡혀 빛에 사는 백성들에게 바울은 “밤이 깊고 낮이 가까왔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두움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롬13:12) 이 말씀은 “사랑을 입자”라는 말과 다르지 않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는 “너희는 열매 없는 어두움의 일에 참여하지 말고 도리어 책망하라”(엡5:11) 권면하고 있다.

독생자의 이름을 거절한 심판은 미래적이기 보다는 이미 계속되고 있기 때문에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19) 는 완료되어 진행됨으로 표현되고 있다.

구원은 자신의 행위를 보는 것이 아니라 눈을 들어 나를 위해 희생제물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 보는 것이라면 그것을 믿지 못하기 때문에 여전히 ‘자기 행위’만을 보며 두려워서 빛으로 나오지 못하는 것이 어두움을 사랑한 것이라는 표현이다. 만약에 주님의 엄청난 사랑과 희생을 알면서도 자신의 죄를 보면서 탄식하는 것은 어리석은 참으로 것이다.



Ⅲ. 모든 것을 그대로 드러내는 빛,(20~21) “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 행위가 드러날까 함이요, 진리를 따르는 자는 빛으로 오나니 이는 그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행한 것임을 나타내려 함이라 하시니라”

사실 빛만큼 진실한 것도 없다. 하나님의 속성이 빛이라고 하는 것은 그런 입장에서도 잘 어울리는 속성이다. 그런 모든 것이 빛을 다 좋아하는 사랑과 연결되어 있다.

이 내용은 바로 앞 v19의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19)는 내용의 해설이다.

빛이 없이는 어떤 생명도 존재할 수 없는데 심지어 나무들도 되도록이면 빛을 많이 볼 수 있는 쪽으로 가지를 뻗치며 자라가는데 왜, 사람들은 빛을 미워할까! 거기에 대한 해답이면서 안타까운 반응을 말씀하고 있다.

“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 행위가 드러날까 함이요”(20) 어쩌면 이 말씀은 죄인의 성품을 그대로 나타내고 있다. 어떤 경로나 방법이든지 우리의 창조자 이시요 사랑이요 빛이요 진리이신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유익이 됨이 분명하다.

여기서는 빛이신 하나님께로 오지 않는 사람들을 말하고 있다. “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아니하나니 …”(20f) 누가 빛으로 오는 것을 거절하는가 하면 “악을 행하는 자”라고 말하고 있고 그런 이유를 “… 이는 그 행위가 드러날까 함이요”(20b)라고 판단하고 있다.

어린아이들 조차 잘하는 것은 부모나 형제들에게 자랑하고 싶어하고 나타내고 싶어하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하지 말라고 한 잘못된 행동을 하고 나면 주위를 두리번거리고 누가 봤을까 두려워하는 것은 사람이면 누구나 같을 것이다.

앞에서 말했던 대로 하나님의 독생자의 희생을 확신하지 못하고 자신의 죄 만을 보고 있는 사람이면 절대로 빛으로 오려고 하지 않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그러나 이 무섭고 추한 죄를 하나님께서만 해결해 주실 수 있고 이것을 위하여 구체적으로 그 죄의 형벌을 대신 당하셨다는 사실을 의심치 않는다면 자신의 죄를 보기 보다는 모든 해결 받으려는 죄를 똘똘 뭉쳐 메고 빛으로 나올 수 있을 것이다.

이런 경험을 분명히 거친 사람이라야 하나님께서 마련하신 진리를 따라 끊임없이 빛으로 나오게 되어 있다. “진리를 따르는 자는 빛으로 오나니 이는 그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행한 것임을 나타내려 함이라 하시니라”(21)

그렇기 때문에 빛을 두려워하는 사람과 빛을 사랑하는 사람의 차이는 사람의 본질에 있어서는 전혀 다르지 않다. 이미 독생자를 통하여 죄를 해결 받은 사람이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진리를 따라 빛으로 나아 오는 것이고 이제부터는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사죄를 받고 행하는 선한 일들은 그것을 가능하게 사죄를 허락하신 하나님께 나타내려 할 것이다.

그렇다! 나 스스로는 평생을 힘쓰고 애써도 불가능한 일을 독생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루어 주셨기 때문에 비로소 빛이 부끄럽지 않고 선한 일을 행할 수 있는 능력을 갖게 되었음을 하나님과 사람들에게 나타내려는 것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자신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나를 나 되게 하신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과 은혜의 역사를 구체적으로는 나를 위하여 십자가에 고난 당하신 주님을 나타내고 자랑하게 되는 것이다.

사람의 머리로나 기준으로 헤아릴 수 없는 사랑이 부어졌다. 이 우주 가운데 가장 귀한 하나님께 하나 밖에 없는 독생자가 우리와 꼭 같은 사람이 되셔서 내가 당할 저주를 완벽하게 대신 치뤄 주셨다. 이것은 추호라도 세상을 심판하시거나 정죄하시기 위해서가 아니라 세상으로 구원을 얻게 하시려고 행하신 것이다.

이 놀라운 역사에도 불구하고 거기에 반응하는 각 사람의 자세에 따라서 생명이 되기도 하고 심판이 되기도 한다. 그러함에도 우리 스스로의 기준으로 하나님을 헤아리고 거절한다면 영원한 빛의 영광이 아니라 죄를 감추려고 하는 어두움에 버려질 뿐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의 부족함이 아니라 전적으로 자신의 책임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