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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배 전도자
요 3:22~30 2019-03-31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바울 사도는 디모데에게 “어리석고 무식한 변론을 버리라 이에서 다툼이 나는 줄 앎이라”(딤후2:23)라는 권고를 주고 있고 이것은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여전히 유효한 당부의 말씀이다. 지혜의 왕이었던 솔로몬 역시 같은 당부를 주고 있다. “길로 지나가다가 자기와 상관이 없는 다툼을 간섭하는 자는 개의 귀를 잡는 자와 같으니라”(잠26:17)

니고데모와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에 관한 가르침이 있은 후 사도 요한은 조금은 주변적인 상황을 삽입하고 있음을 오는 본문에서 읽을 수 있다. 침례자 요한의 세례를 사복음서에서 모두 언급하고 있는 내용이지만 예수님 주변의 침례에 관한 이야기는 오로지 이 요한복음에서반 읽을 수 있는 내용이기도 하다.

그러나 오늘의 주안점은 예수 그리스도의 앞에 보내져서 회개의 세례로 사람들을 준비시키기 위하여 먼저 보내심을 받은 침례자 요한의 자세가 오늘 우리에게 중요한 도전과 가르침을 주고 있다는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의 역할이 무엇인지를 잊어버리는 데서 사람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하고 안타까움을 끼치기도 하였지만 적어도 세례 요한은 여기까지 에서도 자신의 역할과 신분을 분명히 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오늘의 결론적인 이야기는 제목과 다르지 않다.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하니라”(30) 모든 사람이 자신의 역할과 신분을 변함없이 바로 깨닫고 행하며 살 수 있다면 그것 자체로도 어떤 경우에도 절망하지 않고 기뻐하고 감사하는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다.



Ⅰ. 세례 요한과 예수님의 제자들의 침례,(22~24)

“그 후에 예수께서 제자들과 유대 땅으로 가서 거기 함께 유하시며 세례를 베푸시더라, 요한도 살렘 가까운 애논에서 세례를 베푸니 거기 물이 많음이라 그러므로 사람들이 와서 세례를 받더라, 요한이 아직 옥에 갇히지 아니하였더라”

자신을 통한 복음서를 기록하고 있는 사도 요한은 주님의 니고데모와의 대화에서 물과 성령으로 거듭남의 중요함을 다룬 내용에 덧붙여 세례 요한과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의 세례의 실제적인 내용을 언급하고 있다.

“그 후에 예수께서 제자들과 유대 땅으로 가서 거기 함께 유하시며 세례를 베푸시더라”(22) 여기의 위치나 지형은 거론되지 않은 채 다만 제자들과 함께 주로 사역이 이루어졌던 갈릴리가 아닌 [유대] 지역에 계시면서 세례를 베푸신 것으로 기록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이 실제적으로는 주님께서 세례를 베푸신 것이 아니라 그의 제자들이 사람들에게 침례를 베풀었던 것으로 요한은 바로 뒷장인 4장에서 덧붙이고 있다. “예수께서 제자를 삼고 세례를 베푸시는 것이 요한보다 많다 하는 말을 바리새인들이 들은 줄을 주께서 아신지라, 예수께서 친히 세례를 베푸신 것이 아니요 제자들이 베푼 것이라”(요4:1~2)

또 이 세례는 분명히 주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후 승천하시기 전에 당부하셨던 침례와는 같지 않음을 이해할 수 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는 침례자 요한을 하나님께서 보내신 사자임을 인정하셨다. (마11:11,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 요한보다 큰 이가 일어남이 없도다 그러나 천국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그보다 크니라; 눅7:28)

또 자신이 침례를 받으시고 시험을 받으신 후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외치셨던 첫 증거도 세례 요한과 다르지 않으셨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마3:2)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4:17) 그런 이유에서 주님께서 제자들을 통하여 베풀었던 침례도 역시 침례자 요한의 그것과 같은 것이었던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러한 내용과 함께 세례 요한에 대한 상황도 말하고 있다. “요한도 살렘 가까운 애논에서 세례를 베푸니 거기 물이 많음이라 그러므로 사람들이 와서 세례를 받더라”(23) 예수님의 제자들을 통한 세례에는 장소가 없고 요한이 침례 한 지역을 말하고 있는 것이 좀 다르긴 하지만 이 지명도 성경적으로는 분명한 장소가 아니라는 데서 상징적으로 이해 되기도 한다.

“요한도 살렘 가까운 애논에서 세례를 베푸니 거기 물이 많음이라 …”(23f) 하였는데 살렘은 우리가 아는 대로 예루살렘의 옛 이름으로 영원한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으로 상징되는 “이 멜기세덱은 살렘 왕이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라 … 그 이름을 해석하면 먼저는 의의 왕이요 그 다음은 살렘 왕이니 곧 평강의 왕이요”(히7:1~2)라는 기록에서 보는 데로 평화를 의미한다.

이렇게 낱말의 의미로 볼 때 “살렘[Σαλήμ, 평화, 애논[ἀινών, 샘]”라는 두 가지 이름이 의미하는 바는 하나님과 화평하고 영원한 샘으로 솟아나는 생명을 의미하는 상징으로 이해하는 경향이 많은 이유는 실재하지 않는 지명이라는 데서 그렇지만 “거기 물이 많음이라”는 설명이 덧붙여진 것은 역시 세례는 그냥 물을 뿌리는 것이기 보다 잠기는 침례가 복음의 완성 이전부터 보여지고 있다는 것이다.

“… 그러므로 사람들이 와서 세례를 받더라”(23) 비록 자신의 제자들을 예수 그리스도께 소개하고 보내는 요한이었지만 그럼에도 사람들은 여전히 자신의 역할에 충성하고 있는 요한을 존경하고 인정하였음을 본다.

“요한이 아직 옥에 갇히지 아니하였더라”(24) 나중에 요한은 헤롯이 자신의 동생의 아내 헤로디아를 빼앗아 자신의 아내를 삼은 것을 지적한 것으로 옥에 갇히게 되었지만[이는 요한이 헤롯에게 말하되 동생의 아내를 취한 것이 옳지 않다 하였음이라(막6:18; 눅3:19)] 이 때는 아직 그러기 전 이었음을 표현하고 있다.

사람의 거듭남의 핵심은 역시 회개에서부터 출발하고 회개는 가장 구체적으로는 침례를 통하여 였다는 사실을 복음이 완성되기 이전부터 였음을 확인하는 말씀이다.



Ⅱ. 불필요한 부추김,(25~26)

“이에 요한의 제자 중에서 한 유대인과 더불어 정결예식에 대하여 변론이 되었더니, 그들이 요한에게 가서 이르되 랍비여 선생님과 함께 요단 강 저편에 있던 이 곧 선생님이 증언하시던 이가 세례를 베풀매 사람이 다 그에게로 가더이다”

언제 어디서나 모든 이론이나 이해가 같지는 않은 것 같다. “이에 요한의 제자 중에서 한 유대인과 더불어 정결예식에 대하여 변론이 되었더니”(25)라고 상황설명을 하고 있는데 침례자 요한이 세례를 베풀던 그 자리에서도 요한의 세례를 인정하지 않았던 유대인과 더불어 논쟁이 있었던 것 같고, 그 논쟁의 주제는 바로 “정결예식”에 관한 것이었다.

여기 “유대인”이라고만 기록되고 있지만 아무래도 요한의 세례를 인정하지 못했던 종교지도자들로 이해되고, 같은 이 단어인 “ζήτησις”를 바울이 사용하는 것을 보면 바람직한 방향의 건설적인 “변론[ζήτησις, 조사, 탐구, 검사, 토론, 논쟁, 변론]”은 아니었던 것으로 이해된다.

“투기와 분쟁과 비방과 악한 생각이 나는 언쟁”(딤전6:4); “어리석고 무식한 변론”(딤후2:23) 등등으로 사용하는 것들을 보는 데서 이 단어가 신앙에 적용될 때는 바람직하게 사용되지 않은 것 같다.

아무리 하늘이 내려주신 생명의 이론에도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들은 언제나 있었고 또 앞으로도 있을 것이다. 그 논쟁의 주제가 “정결예식[ καθαρισμός, 깨끗이 함, 정화, 청결, 결례, 속죄]”인 것을 볼 때 침례자 요한이나 예수님의 제자들이 시행하고 있었던 세례에 대한 옳고 그름이나 정당성이나 그렇지 못한 것에 대한 논쟁 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이 “정결예식”에 대한 논쟁은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방향으로 전개된다. “그들이 요한에게 가서 이르되 랍비여 선생님과 함께 요단 강 저편에 있던 이 곧 선생님이 증언하시던 이가 세례를 베풀매 사람이 다 그에게로 가더이다”(26)

요한의 제자들과 더불어 논쟁하던 저들은 그 논쟁의 결론을 찾기보다는 갑자기 그들의 스승인 세례요한의 자존심을 건들어 보는 전혀 엉뚱한 방향으로 요한을 흔들어 보는 것으로 불똥이 튄다. 자신들이 요한을 존경하거나 믿지도 않으면서 “랍비여!”라는 칭호와 함께 상당히 경쟁심을 불어 일으킬 수 있는 말을 던진다.

“선생님과 함께 요단 강 저편에 있던 이 곧 선생님이 증언하시던 이” ‘당신과 함께 있었고 당신이 증언한 그 사람이 이제는 세례를 베풀고 있고, 당신에게 오던 사람들이 그, 사람에게로 몰려 갑니다.’라는 투로 은근히 경쟁의식을 부추기고 있다. 사실 사람들은 이런 경우에 그 사람의 본성이 튀어 나오기 마련이다.

이런 이유에서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시는 모습이 우리 일반 사람들이 시험 받을 때와 달랐음을 보게 된다. 세번의 사탄의 시험적 요구는 어쩌면 인간 속에 깊이 깔린 자존심과 명예욕을 부추기는 시험이었지만 역시 차분히 하나님의 말씀으로 그 시험을 이겨 내심을 본다.(마4:1~11; 눅4:1~13)

우리 함께 신앙하는 사람들 간에도 마귀는 이런 경쟁심을 부추기는 시험을 시도할 수 있기 때문에 늘 겸손의 자세가 필요하다. ‘당신은 아무개보다 못하다. 당신이 누구보다 낳은 것이 무엇인가!’라는 식의 시험에서도 흔들리지 않을 수 있다면, 이미 그것은 신앙에 상당히 장성한 사람이라고 해도 될 것이다.

특히 가르치는 사람에게 이런 시험은 치명적이다. “…사람이 다 그에게로 가더이다”(26b) 그것도 특히 이 말이 의미하는 바는 ‘당신에게 와야 할 사람, 당신에게 오던 사람들이 다 그 사람에게로 간다.’는 투로 그야말로 자존심을 긁어대는 시험의 방법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신앙에 있어서 자존심이 가장 치명적이다. 그런 이유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리스도인이 되려는 사람에게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 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마16:24; 막8:34) 요구하신 것이다.

언제나 나 자신이 죽어 없고 예수 그리스도만이 나의 삶을 살고 계신다면 이런 시험에서 넉넉히 이길 수 있는 것이 바로 바울 사도의 고백인데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2:20)는 신앙이다. 이 말은 무엇보다도 그런 의미로 우리가 소화를 해야만 할 것이다.

신앙에 있어 자신의 자존심이 시퍼렇게 살아 있는 한, 번번히 이런 시험에서 넘어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세례 요한은 확실히 하늘의 명령에 철저하게 순종하며 살고 사역하는 모습을 다음에서 보게 된다.



Ⅲ. 사역의 흥망성쇠(興亡盛衰),(27~30)

“요한이 대답하여 이르되 만일 하늘에서 주신 바 아니면 사람이 아무 것도 받을 수 없느니라, 내가 말한 바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요 그의 앞에 보내심을 받은 자라고 한 것을 증언할 자는 너희니라, 신부를 취하는 자는 신랑이나 서서 신랑의 음성을 듣는 친구가 크게 기뻐하나니 나는 이러한 기쁨으로 충만하였노라,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하니라”

이 역사 속에 흥왕 하고 쇠퇴하는 것은 그것이 비록 신앙의 사역일지라도 하늘에 의해서 라는 고백도 역시 요한에게서 배운다. “요한이 대답하여 이르되 만일 하늘에서 주신 바 아니면 사람이 아무 것도 받을 수 없느니라”(27) 이 말 한마디는 모든 세상사가 다 하나님의 뜻에 따라 움직인다는 고백이다.

그러나 이 말에 오해가 없어야 할 것은 하늘의 뜻만 있으니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이 절대 아니라는 경계이다. 요한은 이제까지 자신의 할 수 있는 것을 충실히 다해 왔다. 그럼에도 그의 고백은 ‘내가 최선을 다하였을 지라도 결과는 하늘에서 결재를 하실 것이다.’라는 고백이라는 데서 중요하다.

우리가 최선을 다하고 이 땅에서나 영원 속에서 받는 것도 하늘이 즉,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것을 받을 수 있다는 겸허한 자세가 신앙의 사람들에게 자연스러워야만 한다. 이러한 자세로서 의 요한의 고백이 “… 만일 하늘에서 주신 바 아니면 사람이 아무 것도 받을 수 없느니라”(27)는 것이다.

그러한 자세는 처음부터 였음을 연이어 말하고 있다. “내가 말한 바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요 그의 앞에 보내심을 받은 자라고 한 것을 증언할 자는 너희니라”(28) 이 말은 어쩌면 자신의 제자들에게 주는 교훈처럼 들린다. ‘행여라도 내가 그리스도라고 오해하고 따라왔다면 그분에게 로 가야할 것이다. 나는 처음부터 분명히 그렇게 말해 왔다.’라는 의미로 이해된다.

다음 두 절은 순서를 바꿔서 이해하는 것이 더 정확할 것 같다.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하니라”(30) 이 선언 이야말로 믿는 우리 모두의 신앙고백이 되어야 한다. 항상 이래야 할 자세가 거꾸로 되는 것이 문제이다. 항상 우리는 ‘나’ 자신이 중요하여 먼저가 된다.

누가 어떻게 되든 나는 그렇게 되어서는 안된다고 여긴다. 특히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하는 사람들도 그렇다. 그러나 이것은 분명히 나 자신이 너무 든든히 서있는 모습으로 신앙하는 모습에서는 바람직한 것이 아니다.

더 직접적으로 표현해서 예수 그리스도는 항상 나를 세우고 붙드는 분으로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이것은 바꿔져야만 한다. ‘나는 예수 그리스도를 이 역사와 사람들 속에 세우기 위해서 내가 존재하는 것이다.’라는 이해가 먼저 되어야 한다.

다는 아니겠지만 이 대한민국 속에 신앙하는 사람들 다수가 ‘내가 흥해야 예수가 높여진다.’고 오해하고 있고 또, 어쩌면 그렇게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그것은 요한의 고백처럼 거꾸로 바뀌어야 한다.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하니라”(30) 그래야 비로소 내가 세워지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영광을 받지 못하신다면 그리스도인의 영광이 어디에 있겠는가!

우리의 교회에, 우리의 사회에, 우리의 나라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흥하고 나는 쇠하는 은혜의 역사가 이루어질 때 비로소 신앙이 바로 서고 교회가 바로 서고 가정이 바로 서게 될 것이다.

그럼에도 이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하니라”(30)는 자세가 억지이거나 안타깝게 되어서는 안된다. 그것이 즐거워야만 한다. 이것 역시 침례자 요한의 자세에서 배울 수 있는 것이다. “신부를 취하는 자는 신랑이나 서서 신랑의 음성을 듣는 친구가 크게 기뻐하나니 나는 이러한 기쁨으로 충만하였노라”(29)

실제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교회의 머리요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의 신랑으로서 이 역사 속에 존재한다. 세례 요한은 교회의 완성 이전이었지만 이미 영적으로 이를 깨닫고 있었음을 그의 고백 속에서 확인하고 있는 것이다. “신부를 취하는 자는 신랑이나 서서 신랑의 음성을 듣는 친구가 크게 기뻐하나니 …”(29f)

이 땅에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 된 교회의 탄생을 위한 산파의 역할로서 신랑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나타내면서 그것이 자신의 기쁨이라고 고백하는 것이다. 사실 결혼을 하고 신부를 취하는 것은 신랑이지만 신랑의 진정한 친구들은 자신의 친구가 아름다운 신부를 취한다는 것 때문에 신랑의 기쁨에 참여하는 것이고 세례 요한은 그러한 기쁨으로 충만해 있다고 말한다.

이런 자세에서 역할 하기 때문에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하니라”(30)는 그의 고백은 억지가 아니라 실제적인 그의 기쁨이 되고 있음을 감격하며 고백하고 있는 것이다.

바울은 이런 자세를 자신의 동족인 유대인들이 구원에 들어 올 수 있다면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롬9:3)고 안타까워함을 고백하고 있다. 구원에 있어서는 누구에게나 어디에서나 자신이 먼저이고 나를 통한 다른 사람의 구원이 계속 되겠지만 자신은 자기 민족 구원의 마중물이 되고 죽어도 좋다는 고백이다.

빌립보교회나 이방인의 구원을 위해서도 그의 생각은 역시 다르지 않았다. “만일 너희 믿음의 제물과 섬김 위에 내가 나를 전제로 드릴지라도 나는 기뻐하고 너희 무리와 함께 기뻐하리니”(빌2:17) 우리 서로 그리스도인 간에도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하니라”(30)는 자세가 가능하다면 우리의 모습은 많이 달라질 수 있을 것이다.

또 우리 각자가 흘러가는 구원의 역사 속에 한 시점을 담당해야할 하나님의 일꾼 됨을 침례자 요한처럼 바로 깨달을 수 있다면 물러나야 할 때 물러날 수 있는 자세도 가질 것이다. 영원한 영광에서 상급을 기대하면서 이 제한 된 역사 속에서의 자기 역할을 수행했다고 요한처럼 의식할 수 있다면 많은 사람들에게 눈살을 찌푸리지 않게 자신의 역할의 한계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인생의 새롭게 됨은 언제나 좋은 것이다. 늘 불완전에서 온전으로의 회복은 우리의 삶을 신선하게 할 것이고, 그것은 하나님의 교훈과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에 우리는 맡기는 방법 밖에는 없다.

중심에 그리스도를 주로 삶고 사는 사람들은 어떤 부추김에도 침례자 요한처럼 흔들림이 없다

언제나 자신이 흥함 보다 주님의 흥함과 다른 이들의 흥함을 더 기뻐할 수 있는 신앙적 자세가 되어야 한다. 바울의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빌2:3)라는 권면도 이런 자세를 요구하는 것이다.

신앙의 성장은 나의 삶 속에 자신이 점점 작아지고 주님이 커지고 다른 지체가 커지는 것이다. 우리 모두의 삶 속에 그리스도가 커지고 나는 쇠하는 하늘의 변화가 함께 하시기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