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경말씀을 클릭하면 성경구절을 읽으실 수 있습니다.
이종배 전도자
요 3:31~36 2019-04-07
하나님이 보내신 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니,  
지난 v27~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증거하는 침례자 요한의 증거가 이 3장 마지막 부분까지 계속 되고 있는 내용을 읽게 된다. 요한은 비록 땅에서 났지만 하늘로부터 오신 하나님의 독생자의 신비를 성령의 조명으로 밝히 증거하는데 이것 조차도 땅에 집착하여 사는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하고 결과적으로 순종하지 못함으로 진노에 머무를 수 밖에 없다고 증언한다.

땅에서 나서 땅의 이치로만 사는 사람들은 절대로 위로부터 오신 이를 이해할 수 없고 순종할 수 없는 안타까움을 약속의 백성이라고 자부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서 보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라 비극적인 안타까움 일 수 밖에 없다.

하늘의 이치는 위로부터 거듭나지 않는 이상 절대로 이해가 불가능하기 때문에 니고데모 역시 이해하지 못했던 것이고, 이러한 물과 성령으로 거듭남이 비록 땅에서 난 사람들에게는 어리석게 보일지라도 하나님께로부터 주신 방법이기 때문에 유효한 생명의 다시 남이 되는 것을 세례 요한도 증거하고 있는 것이다.

요한은 계속해서 “위로부터, 하늘로부터”라는 땅의 사람들이 이해할 수 없는 말을 오늘 첫 부분에서도 증거하고 있고 나중에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8:23에서 “… 너희는 아래에서 났고 나는 위에서 났으며 너희는 이 세상에 속하였고 나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느니라” 말씀하시지만 역시 이해하지 못하고 받아들이지 못한다.

오병이어의 기적을 베푸신 후에도 “나는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나의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로라”(요6:51)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류에게 생명의 양식으로 먹혀 살리기 위하여 하늘로부터 오셨다고 말씀하지만 여기에 반응하는 이해는 여전히 땅에 속한 사람들의 이해일 뿐이었다. “이러므로 유대인들이 서로 다투어 가로되 이 사람이 어쩌 능히 제 살을 우리에게 주어 먹게 하겠느냐”(v52)

요한은 물론 예수 그리스도를 비롯하여 위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자들만이 비록 육신적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이지만 하늘의 것들을 바르게 증언할 수 있고 또 그런 자들에게 라야 성령을 한량없이 주시기 때문이라는 하늘의 증언자들에 관한 사실을 선포하고 있다.

이런 이유에서 왜,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한다고 하는 사람들이 항상 땅에서 만의 형통을 말하는 가를 비로소 이해하게 된다. 비록 하늘의 언어를 사용한다고 할지라도 하늘의 보내심을 받지 않고 성령으로 하지 않고는 신령한 것을 증거할 수 없다.

바울은 고린도교회를 향하여 이러한 신비를 증거하고 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리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아니하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고전12:3)

이런 이유에서 하늘의 신비를 이해하고 순간적이며 사라질 이 세상 즉, 땅의 것들보다 영원한 영광을 사모하며 기대할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감사의 이유를 가질 수 있다. 왜냐하면 하늘로부터 거듭나지 않는 한 이런 일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Ⅰ. 만물 위에 계신 분,(31)  “위로부터 오시는 이는 만물 위에 계시고 땅에서 난 이는 땅에 속하여 땅에 속한 것을 말하느니라 하늘로부터 오시는 이는 만물 위에 계시나니”

오늘의 첫번째 말씀은 세례 요한 자신조차도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에 비교될 수 없는 준비 시키는 자에 불과함을 하늘에서 오신 그리스도와 땅에서 난 자신의 위치를 비교하는 내용으로 증거하고 있다.

이 요한복음을 기록하고 있는 사도 요한도 예수 그리스도의 초월적인 위상(位相)을 주님께서 니고데모와의 대화에서 이미 증거한 바 있다. “내가 땅의 일을 말하여도 너희가 믿지 아니하거든 하물며 하늘 일을 말하면 어떻게 믿겠느냐, 하늘에서 내려온 자 곧 인자 외에는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느니라”(요3:12~13)

여기서 먼저 생각할 것은 “위로부터 오시는 이”와 “땅에서 난 이”의 비교이다. 당연히 ‘위로부터 오시는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것이고 ‘땅에서 난 이’ 아담 이후 이 역사 속에 낫던 모든 인류를 말하는 것이 자연스럽지만 여기에는 메시야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소개하러 보냄을 받은 선지자나 최종적으로는 예수 그리스도를 위한 준비자로 이 땅에 온 침례자 요한 자신을 포함하는 것이다.

그런데 “위로부터 오시는 이는 만물 위에 계시고 … 하늘로부터 오시는 이는 만물 위에 계시나니”라고 하여 무엇보다도 하늘로부터 오신 이의 위치를 설명하고 있다.

바울이 그리스도의 신성을 증거하는 골로새서에서 이러한 사실을 말한 바 있다. “그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요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니,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골1:15~17)

이러한 논리는 이미 사도 요한이 이 복음서를 시작하면서 선언했던 내용과 다르지 않은 확인이다.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요1:3)

교회론 이라고 하는 에베소서에서는 이러한 주님의 위상이 ‘이 세상에서부터 영원에까지 그리고 모든 이름 위에 비교될 수 없이 뛰어나다.’라고 증거한다. “모든 정사와 권세와 능력과 주관하는 자와 이 세상뿐 아니라 오는 세상에 일컫는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하시고”(엡1:21)

베드로 사도 역시 구속의 역사를 완성하심으로 이것이 확인되었다고 함께 증거하고 있다. “저는 하늘에 오르사 하나님 우편에 계시니 천사들과 권세들과 능력들이 저에게 순복하느니라”(벧전3:22)

다음으로 “… 땅에서 난 이는 땅에 속하여 땅에 속한 것을 말하느니라”(31m) 한 것은 아무리 하나님의 쓰임을 받는 사람일지라도 땅에서 난 사람은 그 한계를 넘어설 수 없음을 고백하는 것이다. 물론 이 말에는 세례 요한 자신을 포함시키고 있다. 아무리 신령하다고 한들 땅의 것으로 하늘의 것을 설명하는 데는 분명한 한계를 가질 수 밖에 없다.

예수 그리스도는 모든 선지자와 하나님께서 자신을 계시하기 위하여 사용하신 만물들과 선지자들과 이 땅의 것들과 비교될 수 없는 절대적인 분이심을 침례자 요한은 증거하고 있는 것이다.



Ⅱ. 하나님의 보내시는 이,(32~34)

“그가 친히 보고 들은 것을 증언하되 그의 증언을 받는 자가 없도다, 그의 증언을 받는 자는 하나님이 참되시다는 것을 인쳤느니라, 하나님이 보내신 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니 이는 하나님이 성령을 한량 없이 주심이니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직접 보시고 들은 것을 증거하시지만 역시 그러한 증거를 접한 경험이 없는 사람들은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한 것 때문에 거절해 버리는데 이것은 그분의 근본에 대한 믿음이나 확신이 있다면 크게 어려울 것도 없었을 것이다.

그분이 하나님께서 보내신 분이요, 하늘에서 인류의 구원을 위해 보내주신 분이라는 기본적인 주님의 뜻을 받아들이기만 해도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들이 비록 육신을 가진 우리에게 이해의 한계가 있음을 인정한다면 받아 들일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가 친히 보고 들은 것을 증언하되 그의 증언을 받는 자가 없도다”(32)라고 침례자 요한은 안타까워하는데 주님께서는 이미 니고데모에게 같은 말씀을 하신 바 있다.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우리 아는 것을 말하고 본 것을 증거하노라 그러나 너희가 우리 증거를 받지 아니하는도다”(v11)

이 글을 쓰고 있는 사도 요한도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주목하고 우리 손으로 만진 바라,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 …”(요일1:1, 3f)라고 확인해 주고 있다.

들은 것 만으로는 호소력이 적다. 왜냐하면 잘 못 들을 수도 있고 전하는 것을 들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본다고 하는 것은 자신이 직접 체험하는 것이기 때문에 진실 된 사람이 봤다고 하는 것에는 신빙성을 가질 수 있다. 그러나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은 세례 요한을 믿지 않고 받아 들이지 않았기 때문에 그가 증언하는 것을 믿지 못하는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 그의 증언을 받는 자가 없도다”(32b) 당시 종교지도자들의 계층은 여러 부류였다. 성전을 관리하고 있었던 제사장 계통의 사두개인들과 율법을 가르치고 지도하는 바리새인은 물론 옛적부터 전해 내려오는 성경을 필사 했던 서기관들과 그들의 연합체였던 산해드린공회 등등, 그러나 어느 부류들도 세례 요한의 증거를 받아 들이지 않았었다.

“그의 증언을 받는 자는 하나님이 참되시다는 것을 인쳤느니라”(33) 어쩌면 이것이 하나님의 긍휼과 사랑이요 믿음의 문제이다. 하나님의 존재와 거룩하심이나 진실성은 사람들의 인정이나 증거를 꼭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니지만, 하나님의 약속은 반드시 그분을 인정하고 받아 들일 때 유효하게 되기 때문에 하나님을 위해서가 아니라 사람을 위해서 그렇다. 이러한 사실은 나중 12:44~50에서 다시 자세하게 다루게 될 것이다.

사도 요한은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자는 자기 안에 증거가 있고 하나님을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자로 만드나니 이는 하나님께서 그 아들에 관하여 증거하신 증거를 믿지 아니하였음이라”(요일5:10) 하여 믿음으로 인정되는 증거를 확인하고 있다.

특히 여기 “인치다[, σφραγίζω, (도장을) 찍다에서 유래하지만 보전하다, 증명하다, 인봉하다]”라는 의미들로 하나님의 자녀 됨을 증명할 뿐만 아니라 지켜갈 것도 약속되고 있어서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바울이 에베소서에서 증거하는 “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엡1:13)라고 하는 것처럼 꼭 신비하게 만 이해할 필요는 없다. 성경을 통한 증거를 믿고 받아들이는 자들을 하나님은 하나님의 자녀라고 인치기 때문이다. 듣고, 믿고, 회개하고, 고백하고, 침례를 받음으로 이 모든 귀중한 약속은 우리의 것이 되는 것이다.

“하나님이 보내신 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니 이는 하나님이 성령을 한량 없이 주심이니라”(34) 이제 우리는 오늘 말씀의 중심에 이르렀다.

여기 ‘하나님이 보내신 이’는 첫째로는 이 말씀이 계속 “위로부터 오시는 이 … 하늘로부터 오시는 이”를 증거하고 있는 데서 예수 그리스도를 말하고 있는 것에 무리가 없고 예수 그리스도는 당연히 성령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늘 성령의 충만하신 분이라는 데서 확실하고, 이미 “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 데서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러라”(요1:16) 한 기록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둘째로는 이러한 증언을 하고 그것을 기록하는 세례 요한과 사도 요한 역시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고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기 때문에 역시 “하나님이 성령을 한량 없이 주심이니라”는 약속을 그대로 누리고 있다고 믿는다.

그러나 오늘 우리의 상황과 시대 속에서 이 말씀을 좀 더 가까이 이해해야 할 것 같다. 여기에 나타나는 두가지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니”와 “성령을 한량 없이 주심”이라는 사람과 하나님의 역사를 통해서 현재 우리 속에 “하나님이 보내신 이”를 역시 바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앞에서 “… 땅에서 난 이는 땅에 속하여 땅에 속한 것을 말하느니라 …”(31m)한 것처럼 하늘로부터 보내심을 받지않은 자는 오로지 “땅에 속하여 땅에 속한 것을 말하느니라”는 차이를 이해할 수가 있다.

저를 비롯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람들이 계속해사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때 비로소 하나님의 보내신 자라는 어렵지 않은 이해를 할 수 있다는 말이다. 물론 이것은 세상의 언어를 사용하는 것을 문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무엇을 말하든지 궁극적으로 사람들을 하늘에 합당한 존재들이 되도록 증거해야 한다는 의미이다.

이것 역시 하나님께서 “성령을 한량 없이 주심”으로 가능할 것은 너무나 분명한 사실이다. 하나님께서 성령을 한량없이 주시는 일꾼이 세상과 땅에서 만의 형통을 가르치고 증거하는 것은 생각해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신앙과 하나님의 약속은 흙에 속한 사람들, 땅에 속한 사람을 하늘에 맞는 사람으로 변화시켜가는 것이라는 데서 그렇다.

그러므로 오늘에 있어서 “하나님이 보내신 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니 이는 하나님이 성령을 한량 없이 주심이니라”(34)는 말씀은 하늘의 약속과 땅에서 낫지만 신령한 하나님의 약속에 바른 믿음으로 응답하고 순종하는 사람과의 상관관계를 보여주는 교훈이다.



Ⅲ. 영생을 가진 자와 진노 아래 머무는 자,(35~36)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사 만물을 다 그의 손에 주셨으니, 아들을 믿는 자에게는 영생이 있고 아들을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

이 말씀도 지난번의 v20~21의 결론처럼 하나님의 주신 언약과 이루신 역사에 반응하는 각 사람의 결과를 증거하는 것으로 마무리하고 있다.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사 만물을 다 그의 손에 주셨으니”(35) 이 말씀은 우리가 어디서 흔히 듣고 사용하던 말씀 그대로임을 이해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또 다른 보혜사이신 성령을 약속하신 후에 구원의 역사를 완성하시고 하늘로 승천하시기전에 제자들에게 복음전파의 사명을 맡기시면서 선언하셨던 말씀이다.

“예수께서 나아와 말씀하여 이르시되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마28:18) 땅에 속한 사람들을 하늘의 사람으로 변화시키는 일에 함께 하실 성령의 약속도 마찬가지이다. 이 모든 권세는 성령이 오심으로 사도들 속에 같은 권능을 행사하게 될 것을 약속하셨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행1:8)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사 만물을 다 그의 손에 주셨으니”(35) 이제 이 우주의 권세는 아버지 하나님 뿐만 아니라 아들에게도 다르지 않음을 인정하고 계시다. 이것은 기정사실 이었지만 역시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통하여 구속을 완성하신 후에 확인되었다.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빌2:10~11)

이런 이유 때문에 “아들을 믿는 자에게는 영생이 있고 아들을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36)는 약속과 결과를 볼 수 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이미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구속의 역사를 위해 오셔서 공생애를 시작하실 때 “하늘로서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마3:17) 하셨고 제자들과 변화산에 계실 때도 “…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마17:5) 증거하셨다.

여기 “영생이 있고”가 ‘영생이 있을 것이다’라는 미래 시제가 아니라 ἔχω(기본 동사, ‘붙잡다’에서 출발하여 ‘소유하다, 동반하다, 간직하다, 보관하다’)의 현재 직설 능동태 3인칭 단수인 ἔχει로 쓰인 점 역시 독특하다. 영생은 미래에 얻는 것이 아니라 현실에서 영생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영원에 연결됨을 확인하게 된다.

여기에 대조되는 표현은 “아들을 믿는 자에게는”과 “아들을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인데 그러므로 믿는 것은 당연히 순종이 따르는 것이고 순종하지 않는 것은 믿지 않기 때문이라는 어렵지 않은 공식으로 이해할 수 있다.

또 “아들을 믿는 자에게” 따르는 결과적 약속은 “영생이 있고” 라는 것이라면 “아들을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영생이 없고”에서 끝나지 않는다.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고 선언하고 있다.

절망의 형편에 있으면서도 사랑을 거역하는 사람은 용서받을 수 없다. 앞에서 이미 이런 경계 역시 증거 되었다. “…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v18b) 그러므로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거나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는 표현은 다르지 않다.

바울은 위에 즉, 하늘에 익숙해 지기 위해서는 땅의 지체를 죽이라고 까지 권면한다.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골3:5) 왜냐하면, 우리의 장래 소망이 이 땅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 있기 때문이라고 가르친다. “오직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서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빌3:20)

오후에 좀더 자세히 다루게 되겠지만 우리 각자의 추구하고 바라는 것들이 ‘우리가 어디에 더 가까운가!’ 나타내 보이는 것이다.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엣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골3: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