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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배 전도자
요 4:1~14 2019-04-14
이 물을 마시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v1~2은 지난 3:22~30에서 인용한 바 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침례를 베푸신 것은 아니라 주님의 제자들에 의해서 였지만(2) 과거 유대인들과의 변론에서 침례자 요한이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하니라”(3:30) 고백한 바 있었다.

예수 그리스도쪽으로 모여드는 사람들이 더 많아졌다는 사실이 바리새인들에게 알려지고 그런 상황이 주님의 사역에 방해 받을 변수도 있을 것이기 때문에 남쪽에서의 활동보다 소외된 갈릴리 쪽으로 올라가시게 된 이유임을 요한은 기록하고 있다. “예수께서 제자를 삼고 세례를 베푸시는 것이 요한보다 많다 하는 말을 바리새인들이 들은 줄을 주께서 아신지라”(1)

방해꾼들의 성격을 아시기 때문에 갈릴리로 가시게 되는 과정에서 우리 주님은 하나님의 은혜에서 제외된 듯한 죄 많은 수가성의 여인과의 대화에서 생명수의 교훈과 더불어 올바른 예배를 우리에게 알게 하신 은혜의 역할을 접하게 된다.

모든 사람들이 더위를 피해 쉬고 있는 그 시간에도 제자들과 함께 복음을 위한 걸음을 쉬지 않으시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피해가는 장소를 친히 찾아가시고 어떤 차별도 가지지 않고 사람을 대하시는 주님의 사역은 오늘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부지런함과 성실함의 모범이시다.

인종이나 계급에 편견이 없이 누구에게든지 은혜를 구하기만 하면 거절하지 않으시는 주님의 마음을 여기서도 표현하는데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으리라”(10)는 말씀 역시 말 뿐이 아니라 진실임을 확신할 때 죄인의 간구도 외면치 않으신다면 그의 백성들의 기도에 당연히 응답하신다는 약속도 확인하게 된다.

어떤 사람이든지 목마른 것이 인생이라면 그 갈증은 주님께서 주시는 시원 함의 해갈 없이는 이 세상 어디서든지 채울 수 없는 갈증이라는 사실도 오늘 주님의 말씀에서 확인하게 된다. 어쩌면 세상의 사람들로부터 소외되고 제외된 사람들조차 주님을 바로 만날 수 있다면 사람들에게 절망하지 않을 근거를 이 말씀 역시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어쩌면 오늘 나 자신이 수가성의 여인 같이 사람들을 싫어할 정도로 소외된 존재일지라도 주님을 바로 만난다면 회복되고 그 회복을 사람들에게 자랑할 수 있는 데까지(v28~29) 이를 수 있음을 이 말씀을 통해서 확신할 수 있는 …



Ⅰ. 복음을 위한 주님의 행로,(3~6)

“유대를 떠나사 다시 갈릴리로 가실새, 사마리아를 통과하여야 하겠는지라, 사마리아에 있는 수가라 하는 동네에 이르시니 야곱이 그 아들 요셉에게 준 땅이 가깝고, 거기 또 야곱의 우물이 있더라 예수께서 길 가시다가 피곤하여 우물 곁에 그대로 앉으시니 때가 여섯 시쯤 되었더라, 사마리아 여자 한 사람이 물을 길으러 왔으매 예수께서 물을 좀 달라하시니, 이는 제자들이 먹을 것을 사러 그 동네에 들어갔음이러라”

어쩌면 이 첫 부분에서는 우리 주님의 신실하심을 엿볼 수 있고 우리가 그 주님의 제자들이라면 역시 그렇게 성실함과 편견을 갖지 않는 신실하심을 본 받는 일꾼으로 섬겨야 할 것이다.

바로 앞에까지 세례 요한의 사역과 선언 그리고 바리새인의 지도자인 니고데모와의 중요한 거듭남의 이치를 다루었다면 이 요한복음 속에서 구체적인 주님의 복음을 증거하시는 모습을 이렇게 시작하는 사도 요한은 그것도 많은 군중이 아닌 유대인들이 부정하게 여겨 접근조차 피하는 사마리아의 여인을 상대로 [물]에서 시작하여 신령한 예배로 나아가는 가르침을 기록하고 있다.

“유대를 떠나사 다시 갈릴리로 가실새”(3) 했는데 그 원인은 어쩌면 맨 처음 거론했던 불필요한 논쟁을 피하고 진정 복음이 필요한 사람들을 향하시는 모습을 전하고 있다. 주님께 세례 요한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고 있다는 사실을 바리새인들이 들었다고 하는 것을 예수님께서 들으시고 이스라엘로부터 소외되고 버려진 갈릴리로 가시는 과정을 기록하고 있다.

“사마리아를 통과하여야 하겠는지라”(4) 이 말씀 역시 일반적인 유대인들의 갈릴리행 여행 경로가 아닌 것은 너무나 잘 알려진 사실이다. 당시의 일반적인 종교 지도자였다면 ‘요단 동편을 돌아가야 하겠는지라’는 표현이 더 자연스러울 것이지만 우리 주님은 당시 사람들이 피해가는 곳을 들어가시는 것을 볼 때도 강도 만난 자의 이웃임을 보여주고 계신 것이다.

사마리아의 후손들이야 스스로 어떤 것을 잘못 해서가 아니라 과거의 불행한 역사의 영향으로 손해를 보고 있었던 것이고 의도가 아닐지라도 어쩌면 죄를 범하며 살고 있는 이 인류의 전형이라고 생각해 볼 수도 있다. 그런 이유를 아시는 주님이시기 때문에 모든 유대인들이 꺼리는 그곳을 마다하지 않고 지나는 경로처럼 찾아 들어 가신 것이다.

“사마리아에 있는 수가라 하는 동네에 이르시니 야곱이 그 아들 요셉에게 준 땅이 가깝고, 거기 또 야곱의 우물이 있더라”(5~6f) 이 내용은 주님께서 생수와 예배를 이 곳의 여인과 나눈 장소의 구체적인 위치를 나타내는 사도 요한의 배려일 것이다. 옛 지명으로는 야곱이 밧단아람에서 돌아와 하몰의 아들들인 세겜의 형제들에게서 100크시타를 주고 산(창33:19) 지역으로 나중 요셉의 자손들에게 주어진 땅으로 기록되고 있다.(수24:32)

“예수께서 길 가시다가 피곤하여 우물 곁에 그대로 앉으시니 때가 여섯 시쯤 되었더라”(6b) 이 내용은 주님의 부지런하심과 그러면서도 우리와 전혀 다름이 없는 육체를 가지셨던 사람됨을 가장 정확하게 보여주는 내용으로 요한은 전달해 주고 있다.

일반 사람들 같으면 이렇게 부지런할 필요는 없었을 것이다. 만약에 로마 식 시간 표시였다면 저녁 6시이겠지만 “제 육 시쯤 되었더라”(개역 한글)는 서수식의 시간 표기는 바로 유대인들의 시간 표시로 거기에 6시간을 더해야 현제의 시간제가 되는데 기록의 흐름이나 된 상황으로 볼 때 유대 시간 표시로 보는 것이 자연스럽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루 중 가장 더운 때인 정오(正午) 경에는 서늘한 곳에서 낮잠을 자기 때문에 이 수가성의 죄 많은 여인이 사람들이 주로 움직이지 않는 이 낮잠을 자고 있는 시간에 물을 길러 나왔고 예수님께서 유독 이 여인 만을 만날 수 있었다는 정황을 볼 때 더욱 그렇다. 또 이런 시간대에까지 주님께서는 쉬지 않으시고 피곤하실 정도로 하나님 아버지의 일을 위해 수고를 아끼지 않으시는 모습을 보면 우리가 참으로 게으를 수 없음도 배운다.

요한은 그러한 상황을 그림으로 보듯 우리에게 선명하게 전달해 준다. “사마리아 여자 한 사람이 물을 길으러 왔으매 예수께서 물을 좀 달라 하시니, 이는 제자들이 먹을 것을 사러 그 동네에 들어갔음 이러라”(7~8)

성경에서는 가끔 이렇게 우물가에 물 길러 나온 여인에게 물을 달라 하는 모습을 기록하고 있는데 가장 대표적인 예가 이삭의 안내인 리브가에게 아브라함의 종이 그렇게 기도하고 구체적으로 행동했던 내용을 창세기 24장에서 볼 수 있다. 그러나 주님의 요청은 당시로서는 일반적인 모습과는 다른 내용이었음을 이 여인의 다음의 반응 속에서 보게 되고 함께 동행하던 제자들은 점심 때의 시장기를 해결하기 위해서 그 동네에 먹을 음식을 사러 갔기 때문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비록 “예수께서 물을 좀 달라 하시니”라고 마치 자신의 필요 때문에 여인에게 간청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에 있어서는 이 요청은 바로 신령한 것이라고는 모르고 오히려 세상에 찌들어 살고 있는 이 여인의 전혀 새로운 삶을 위한 주님의 배려이셨다. 주님께서 “달라!”하실 때 거기에 바로 드릴 수만 있다면 주님께서는 항상 기대하는 것 이상으로 되돌려 주실 수 있음도 여기서 배울 수 있다.

이 첫 부분에서 배우는 것은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꺼리는 장소인 ①사마리아 통과, 그리고 ②사람들이 쉬는 시간에도 여행을 계속하시는 부지런 하심과 곤하고 갈증을 그대로 느끼셨던 주님의 지극한 인간 되심, 그리고 ③주시려고 달라고 하심, 이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실하심을 이 말씀에서도 배운다.



Ⅱ. 복잡한 현실과 주님의 선물,(9~10)

“사마리아 여자가 이르되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인 나에게 물을 달라 하나이까 하니 이는 유대인이 사마리아인과 상종하지 아니함이러라,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게 물 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 줄 알았더라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으리라”

요한복음에서 주님 사역의 여행에서 최초로 복음을 듣게 되는 여인은 주님께서 피곤하심으로 우물 곁에 앉아 계시다가 자신에게 다가와 물을 좀 달라 하시는 아직 이 여인은 알지 못하는 주님께 물동이를 기울여 마시게 하는 것이 아니라 항의부터 하고 있다. 그의 인생이 순탄하고 고르지 못한 이유도 이러한 자세에 어느정도는 영향이 있었을 것 같다.

“사마리아 여자가 이르되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인 나에게 물을 달라 하나이까 …”(9f)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자연적인 일이 아닌 일들이나 상황을 만날 때마다 그 이유를 찾고 묻는 것을 보는데 이 여인도 다르지 않았다. 상대가 누구인지도 모르고 이 여인은 따져 묻는 것부터 시작하였지만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미 여인의 운명과 삶을 알고 계셨음을 흐르는 내용에서 우리는 이해하게 된다.

어떤 경우에는 따져 묻는 것이 당연한 것이기도 하고 좋은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지만 우리 사람들 관계에서는 대부분 이러한 자세가 싸움의 시작이 되기도 하는데 그럼에도 이런 여인을 향하여 주님은 우리와는 다르게 반감보다는 복음을 전하는 접촉 점으로 삼으시는 것이 역시 우리와 다름을 보여 주신다.

이렇게 묻는 여자의 의도는 ‘순수 혈통이라고 으스대는 유대 사람인 당신이 어째 개처럼 취급하는 나 같은 여자에게 도움을 청하느냐!’라는 반감이 들어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사도 요한은 이렇게 된 배경을 덧붙임으로써 이 글을 읽는 우리들의 이해를 돕고자 하는 내용이 “… 이는 유대인이 사마리아인과 상종하지 아니함이러라”(9b)는 말씀이다.

물론 이 짧은 한마디에는 이스라엘과 유대의 파란만장한 길고 안타까운 역사가 놓여있다. 오늘 우리의 삶에 온전치 못함을 가지고 그리스도를 소개한다면 불신의 사람들은 이런 비슷한 질문을 해 올 수도 있을 것이다.

여기에 대한 주님의 반응은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게 물 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 줄 알았더라면 …”(10f)이라 하셨는데 여기에는 이 여인이 알았어야 할 두 가지 사실과 그것은 어쩌면 이 인류에 존재하는 모든 죄인들이 알아야만 할 과제임을 이해하게 된다.

먼저는 “하나님의 선물”을 알았더라면 이라는 말씀인데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들에게 예외없이 값없이 주시려는 선물을 알았으면 하는 하나님의 마음이면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심령을 담고 계시다. 하나님의 마음이요 뜻이라면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2:4)는 것이다.

바울을 통한 이 말씀은 이왕에 선물로 주어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희생을 통한 구원을 모든 사람이 유효하게 응답하기를 소원하는 하나님의 사랑의 마음이 나타나있다. 선물은 이미 주어졌고 그것을 받고 거절하는 것은 각자의 반응의 차이이지만 이왕에 선물이 선물 되기를 바라는 마음은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는 사람이라면 역시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것이 “네게 물 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 줄 알았더라면”인데 하나님의 선물이 전달될 통로를 말씀하시는 것이다. 인류 중 누구든지 각자가 예수 그리스도를 바로 이해하는 것 자체가 영원한 운명을 결정한다고 하는 데서 지금 이 여자를 비롯한 사람들 모두는 물론이고 특히 하나님을 믿고 따르는 사람들이라면 더욱 예수 그리스도를 바로 알고 순종할 수 있다면 영적 삶에 좀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을 것이다.

“…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으리라”(10b) 주님께는 모든 것이 있고 그 주님의 뜻을 순종하며 구하는 자들에게는 결코 거절하지 않으실 주님이시다. 이런 경험을 많이 해본 다윗은 “젊은 사자는 궁핍하여 주릴지라도 여호와를 찾는 자는 모든 좋은 것에 부족함이 없으리로다”(시34:10) 고백하고 있다.

죄로 얼룩진 이 세상은 어느 것 하나 만족할 수 있는 것이 없는 갈증 나는 삶을 살 수 밖에 없고 그럼에도 사랑의 하나님은 이 갈증 나는 세상에서 사람 스스로는 얻을 수 없는 영원한 생수를 값없이 선물로 허락하신 것을 믿고 누리고 사는 사람들이 바로 그리스도인들이다. 그러므로 우리 속에 아직도 갈증이 가시지 않았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선물을 온전히 누리고 있지 못한 증거일 것이다.

이 부분에서의 요점은 주님을 바로 알아야 구할 수 있고 주실 수 있다는 말씀이지만, 주님의 “…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으리라” 하셨는데 이 내용을 오늘 본문의 마지막 부분에서 보다 구체적으로 다루고 있다.



Ⅲ. 인생의 갈증과 주님의 생수,(11~14)

“여자가 이르되 주여 물 길을 그릇도 없고 이 우물은 깊은데 어디서 당신이 그 생수를 얻겠사옵나이까, 우리 조상 야곱이 이 우물을 우리에게 주셨고 또 여기서 자기와 자기 아들들과 짐승이 다 마셨는데 당신이 야곱보다 더 크니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이 물을 마시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주님께서 여자에게 자신을 알았더라면 오히려 자신에게 구하였을 뿐만 아니라 주었을 것이라는 말씀을 하시지만 신령한 것이 무엇임을 알리 없는 이 여인은 여전히 니고데모 같은 반문을 하고 있다. “여자가 이르되 주여 물 길을 그릇도 없고 이 우물은 깊은데 어디서 당신이 그 생수를 얻겠사옵나이까”(11) 여기서 여자는 “주여!”라고 예수님을 부르고는 있지만 이것은 ‘구세주’를 의미하는 우리와 같은 표현이 아니라 이스라엘에서는 흔히 사용하는 존칭에 불과하다.

영적인 이치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이 여인이 말하는 의미는 주께서 말씀하시는 [생수]를 자신이 길으러 온 물로 단순히 이해하고, 이스라엘의 우물들이 대부분 깊은 상황에서 어쩌면 ‘그 물을 스스로 구할 수 있었다면 왜 나에게 물을 달라 하나요?’ 라는 분위기를 풍기는 것은 이어지는 말 속에서도 드러난다.

“우리 조상 야곱이 이 우물을 우리에게 주셨고 또 여기서 자기와 자기 아들들과 짐승이 다 마셨는데 당신이 야곱보다 더 크니이까”(12) 과거의 자신들의 존경하는 조상인 야곱조차도 이 우물에서 물을 마셨는데 당신은 야곱과 다른 더 큰 능력이라도 있는가? 라는 의아심을 나타낸다.

특히 예수 그리스도는 두레박으로 길어야 하는 이 깊은 우물과 하늘로부터 선물로 주어질 생수를 이 13~14절을 통해서 비교하시는 것으로 이어지는데 여기에 대한 우리 주님의 답변은 점점 영적인 방향으로 나아가신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이 물을 마시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13) 우리는 때로 세상 속에서 모자라고 부족하여 인생의 갈증을 느낄 수 있다. 그것은 유한한 세상 속에서는 어쩔 수 없는 한계이다. 생수를 사서 마셔도 바닥이 나면 다시 사야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고 그러므로 육신적인 모자람을 느낄 수 밖에 없는 세상 속에서는 근본적인 갈증의 해소가 불가능함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이 무지한 여인과 우리에게 다시 일깨우신다.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14f) 같은 말씀을 벳세다의 언덕에서 기적의 떡으로 배 불린 후에도 말씀하셨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생명의 떡이요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6:35)

이것은 하나님의 선물이신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인지 아는 자들에게 허락하신 약속이다.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14f) 그리고 연이어 그 이유를 덧붙이신다. “…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14)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라는 통로를 통해 연결된 사람은 퍼오는 것이 아니라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그대로 넘치도록 누림을 의미한다.

주님께서는 항상 물의 부족함을 겪으며 살았던 광야생활을 기념하는 장막절 때에도 이와 같은 선언을 하셨고 사도 요한은 이를 보다 분명히 설명하였다.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사44:3)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 나오리라 하시니, 이는 그를 믿는 자들이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7:38~39f)

그러므로 오늘 내가 그리스도인으로 값없이 주시는 하늘의 생수를 누림으로 갈증이 없을 정도로 만족한 삶을 살고 있다면 주님의 약속하신 생수를 즐기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하늘의 백성이라고 하면서 여전히 갈증을 가지고 있다면, 과연 나 자신과 하나님과의 사이에 예수 그리스도로 연결되어 있으며 주님께서 주신 생수인 성령을 누리고 있는 사람인가 자신을 점검해봐야만 한다.

우리 가정에 들어오는 수도 물도 연결된 파이프에 녹이 쓸어 막히거나 다른 것으로 막히고 손상이 되면 집에서 물을 받아 쓰는 것이 불가능하게 되는 것과 다르지 않다. 우리 주님은 그를 믿고 회개하고 고백하고 순종하여 침례로 거듭난 사람들은 누구나 예외없이 성령을 선물로 주신다고 약속하셨다. 이제 그 약속을 누리고 못 누리고는 우리 각자의 책임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