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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배 전도자
요 4:23~26 2019-04-28
영과 진리로 예배,  
이 요한복음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신앙적 논의는 3장에서는 니고데모와 거듭남의 신비를 말씀하셨다면 이 4장에서는 생명수와 예배에 대하여 비천한 수가성의 여인과 나누게 되는 것도 결코 우연한 배열이 아닌 것 같다. 왜냐하면, 거듭난 사람만이 생명수를 공급받고 하나님께 바른 예배를 드릴 수 있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이 가장 일반적이면서도 귀중한 과제가 하나님을 바르게 예배 드리는 것임을 부정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면서도 참으로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예배를 드리고 있는가 살피는 것 보다는 자신의 생각이나 감정이 우선되는 예배를 하는 것 같다.

어떤 경우에는 우상에게 예배하는 것과 다름이 없는 하나님과의 교통이 아니라 그냥 드린다는 생각만으로 스스로가 만족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드리지 못하는 획일적인 예배를 드릴 수도 있다.

하나님께서는 예배를 명령하실 뿐만 아니라 그분께 드리는 예배가 어떠해야 할 것도 분명히 말씀해 주셨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에 감사하고 영광 드리기를 진심으로 원한다면 오늘 무엇으로 어떻게 예배해야 할 것도 이해하고 점검해봐야 할 것이다.

진정으로 일생을 통해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 아버지의 뜻을 순종하는 모범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런 귀중한 부분을 가르치신 대상이 당시에 예배자가 아니었던 사마리아 여인이었지만 그 여인을 통하여 우리에게 주시는 예배의 교훈이 대단히 중요하다.

이 인류 역사가 시작된 후 성경에 나타나는 최초의 예배자 아벨로부터 수많은 사람들이 창조주께 제사하고 예배하여 왔지만 어떻게 하는 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는 예배인지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시기 전까지는 적어도 분명히 가르침 받지를 못한 것이 사실이다.

비록 OT속에 율법으로 명령 된 보이는 물질적인 제사 즉, 짐승의 피와 태워 바치는 번제를 비롯한 수많은 제사형식들도 있었지만 임시적이며 상징적 이었을 뿐이었다. 그러한 제사형식들은 한번으로 완전한 제사를 드릴 모형에 불과했던 것이다.

믿음을 시작하면서 지금까지 수없이 하나님께 예배를 드려왔지만 오늘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의 예배를 점검하고 다시 하나님께서 명령하시고 가르치신 예배로 회복하는 교훈이 되었으면 한다.

특히 하나님께서 이런 바른 예배자를 찾으신다는 말씀이 우리에게 도전이 되는 것은 그런 예배자가 없거나 드물기 때문에 찾으신다[ζητέω, 구하다, 원하다, 바라다]는 말씀이 되기 때문이다. 이제 바른 예배는 확실히 명령 되었고 바라신다면 나머지는 예배하는 우리 모두의 책임이다.



Ⅰ. 예배 대상과 내용,(23~24)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

어쩌면 이 4장1~26절까지의 말씀이 여기에 귀결되어 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그런 이유에서 이 부분을 좀더 자세히 이해하기 위해서 대부분의 시간을 여기에 할애하고자 한다.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23ff) 주님께서 예배하는 자들과 예배하려는 자들에게 “참되게[ἀληθινόϛ, 진실한, 참된]” 라는 뒤에서 말하는 “진리로”라는 말씀과 같은 어근의 낱말을 앞에서부터 꺼내신다. 앞의 1:9절에서 이미 같은 단어를 주님께 대하여 사용한 바 있다.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

뒤에 가서 “진리로”라는 부분에서 좀더 자세히 이해하도록 하겠지만; 예배자에게 거짓이 있어서는 안된다는 경계로 꾸미지 않은 진실됨을 명령하시는 것이다. 아무리 외형적으로 그럴싸하게 꾸며도 하나님은 그런 외형을 기뻐하시는 것이 아니라 진실됨으로 나아오는 자를 받으시기 때문이다.

먼저는 “참되게” 드려야 하는 예배가 무엇인지부터 이해할 필요가 있다. “예배[προσκυνέω]”는 주인의 손을 핥는 개에서 유래하고, 경의의 표시로 대상에게 키스하다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는데 동양 특히, 페르시아인들에게서 무릎을 꿇고 이마를 땅에 닿도록 엎드리는 심오한 숭배의 표현이다.

NT에서는 경의를 표하기 위해서나 간청하기 위해서 또는 복종하기 위해서건 무릎을 꿇거나 엎드려서 탄원, 애원, 간청을 하는 것들로 나타나는데; 비교될 수 없는 높은 위엄의 존재들에게 경의를 표하기 위해 보여지는 표현이다. 이런 입장에서 영어의 “Worship”은 예배, 숭배, 흠모, 열렬한 사랑, 최고의 가치를 드리다. 등등의 의미로 쓰인다.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23m) 다음 절에서도 거론되지만 이것이야말로 예배의 내용, 흔히 요즘 말하는 contents 이다. OT 율법 시대의 제사법은 레위기에 기록되고 있다. 번제, 소제, 화목제, 속죄제, 속건제 수많은 제사와 함께 “… 이는 여호와께 향기로운 냄새니라,” 하였지만 역시 완전한 제사나 예배는 될 수 없는 그림자에 불과 했다.

이 v23의 “영과 진리로 예배”는 다음 절에서 자세히 다루겠지만 이렇게 “예배할 때가 오나니”라는 표현은 주님께서 이 말씀을 가르치실 때까지도 아직 이런 예배가 없었음을 전제로 하는 말씀이다.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음에도 사실 이러한 예배를 드리도록 가능하게 하는 것도 ‘시간이 지나면’이거나 ‘사람이 발견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 십자가에 드리시는 희생으로 가능해 질 것을 내다 보시는 표현이다.

무엇보다도 이렇게 예배할 때가 올 것인데 “곧 이 때라”고 말씀하신다. 역시 과거에는 이런 예배가 없었다는 의미와 함께 주님께서 “이 때라[νῦν, 지금, 현재, 여기서, 이후로 등등]”하셨으므로 “지금부터, 이후로는”이라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드려지는 예배의 요소가 비로소 “영과 진리”로 드려지는 예배가 될 것이라는 말씀이다.

보다 적극적인 의미는 “…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23b) 하여 하나님께서 이제는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ζητέω, 구하다, 원하다, 바라다]” 하셨으므로 여기에서도 “영과 진리”로 예배하지 않는 자들은 제외됨을 이해할 수 있다.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24) 어찌 보면 하나님께 영과 진리의 예배를 말씀하시면서 “예배하는 자”를 이 2절 속에 3번이나 반복해서 말씀하고 계심도 지나칠 수 없는 내용이다. 어떤 대상에게 또 많은 예배자들이 있지만 하나님께서는 자신에게 영으로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만을 인정하신다는 두려운 의미도 함께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먼저 바른 예배의 대상을 말씀하시면서 “하나님은 영이시니” 하신 내용이다. 하나님은 물질로 구성된 우상으로 만든 신이 아니시기 때문에 당연히 그분께 최고의 가치를 드리는 것도 보이는 세상의 가치나 재료가 될 수 없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하나님은 보이는 물질로 구성된 사람과 같은 존재가 아니시기 때문에 늙거나 낡아질 수 없는 분이라는 것도 역시 이해된다. 이런 이유에서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는 이치가 어울리는 것이다. 물론 앞에서 약간 거론했던 대로 OT의 마당에서는 이러한 물질에 익숙해 있는 사람들에게 물질적인 제사를 드리게 하셨지만 그것은 한시적이고 완전한 제사의 모형일 뿐이라는 것도 이해할 수 있다.

그렇다면 과연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는 내용대로 “영과 진리”가 무엇이며 어떤 성격의 것인가를 바로 이해할 필요를 느낀다.

“영[πνεῦμα, NT에 385회(사도행전70회)바람 즉, 공기의 흐름에서 ‘숨, 미풍, 영혼, 영, 생동하는 원리, 기질, 천사, 마귀, 하나님, 그리스도의 영, 성령’]” 인간의 몸을 살게 만드는 생동하는 원리, 물질로 만들어진 육체가 아닌 필수적인 어떤 것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그렇지만 수식하는 내용에 따라서는 하나님께 속한 신령한 것일 수도 있고 마귀 사탄을 의미하는가 하면(하나님의, 그리스도의, 어둠의, 사람의 등등) 사람의 정신세계나 삶과 더불어서도 표현되는 그야말로 다양한 의미들을 NT성경에서 볼 수 있다.

여기서 사용될 때는 이미 앞의 v22에서 말씀하셨던 대로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라는 장소적이거나 물질적인 제사와 반대되는 요소를 말씀하신 것이면서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영과 더불어 드리는 예배여야함을 지적하시는 것이다.

[요3:6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니] 말씀하셨지만 결국 육으로 난 사람 그대로는 영적인 예배 자체가 불가능하기 때문에 하늘로부터 다시 거듭나서 새로운 피조물이 된 사람 속에 함께 하시는 성령의 감동과 함께 드려지는 예배여야 함을 말씀하시는 내용이다.

“진리[ἀληθεία, NT에 110회(요한복음 25회)진리, 사실, 참되게, 진실성]” 잘못의 반대로 그리스도교의 본질과 사실을 의미하는 것으로 앞의 ‘영으로’라는 표현이 보여지지 않는 것이라면 ‘진리로’는 “…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노니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라”(22b)의 말씀을 전제로 하신 말씀이다.

“아는 것을 예배하노니”라는 말씀은 인류 구원을 계시하신 OT의 모든 기록된 말씀을 유대인들만이 알고 있기 때문에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라”고 덧붙이시는 것이다. 이 구원이 완료된 오늘날에는 이제 계시된 완벽한 영적 교훈이 주어졌기 때문에 ‘알지 못해 잘못 예배하였다.’는 변명은 더 이상 호소력이 없다.

나중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들이 받은 계시와 말씀이 있고 주님께서 오셔서 그것을 확증하시는 데도 자신을 대적하고 거역하는 유대인들에게 “내가 와서 그들에게 말하지 아니하였더라면 죄가 없었으려니와 지금은 그 죄를 핑계할 수 없느니라”(요15:22)고 말씀하시는 것도 이와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바울 사도는 이방인들에게 구원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만 가능하다고 말한 다음에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 그러므로 그들이 핑계하지 못할지니라”(롬1:20)고 선언하고 있는 것도 다르지 않다.

자연을 통한 계시를 주셨을 뿐 아니라 최종적으로[히1:2 이 모든 날 마지막에는 아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완전한 구원 계시의 완성으로 이 땅에 오신 그리스도를 거역하면 더 이상 핑계할 수 없다는 말을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영과 진리의 예배”는 이런 이유에서도 일반 사람들이 만든 종교와 구별이 되는 것이다.

범죄한 사람의 이성과 생각이나 감정에서 나온 어떤 것도 아닌, 완전히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지고 하나님께서 마련하신 새로운 것으로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예배는 사람이 드리고 은혜를 누리지만 사람에게 맞추거나 사람을 위한 이벤트가 되어서는 안된다.

하나님께 드리는 온전한 예배는 세상에 존재하는 어떤 물질이 아니라; 예배자가 반드시 죄사함을 얻고 회복된 하나님의 성령과 함께 성경 속에서 계시하신 사실을 그대로 순종하여 드리는 것이다.



Ⅱ. 참된 예배의 안내자,(25~26)

“여자가 이르되 메시야 곧 그리스도라 하는 이가 오실 줄을 내가 아노니 그가 오시면 모든 것을 우리에게 알려 주시리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게 말하는 내가 그라 하시니라”

이렇게 말씀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교훈을 완전히 이해했는지 모르지만 이 사마리아 여인은 그래도 주워들은 표현인지는 몰라도 이러한 예배가 언제 어떻게 가능 할까를 바르게 고백하고 있다.

“여자가 이르되 메시야 곧 그리스도라 하는 이가 오실 줄을 내가 아노니[εἴδω, 확신하다, 이해하다, 알고 있다.] …”(25f) 하였는데 비록 서로 상종은 하지 않았지만 유대인과 같은 성경을 갖고 있었던 사마리아 사람들도 모세가 신명기18:15, 증거한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 가운데 네 형제 중에서 너를 위하여 나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일으키시리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을지니라”(v18도 같은 의미)한 이 말씀을 근거로 같은 메시야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 일반적인 것이었다.

어찌 보면 이 죄 많은 여인조차도 이런 기대와 소망을 가지고 있었던 것을 보면 유대인을 통해 오실 메시야는 역시 온 인류의 구원자임에 틀림이 없다. 이런 이유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고 소망하는 것은 어떤 사람일지라도 당연한 것이고 요즘 우리가 쉽게 표현하는 대로 유대인들처럼 “죄인인 주제에” 라고 비웃을 수 없는 사실이 바로 예수님 당시 매국노라고 비웃음을 받던 세무서장 이었던 삭개오(눅19:1~10)같은 사람을 보면 실증이 된다.

비록 유대인들은 세리와 창기들이 예수님 주위에 모여드는 것을 보고 비웃었지만 주님은 사람들에게서는 이미 따돌림 당하는 바로 그런 사람들을 위해서 오셨음을 확신할 수 있다.

“… 그가 오시면 모든 것을 우리에게 알려 주시리이다”(25b) 라고 여인은 진지하게 메시야에 대한 소망과 기대를 주님께 고백하고 있다. 아직 영적인 눈이 감겨있는 여인이었지만 그리스도에 대한 미래의 영적 회복을 기다리는 마음만은 자신에게 구구절절함을 듣는다. 여기에 “모든 것”이란 당연히 예배의 바른 이해와 가르침을 의미하고 있는 것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이런 간절함을 이해하신 주님은 주저없이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게 말하는 내가 그라 하시니라”(26)고 자신을 소개하신다. 여기서도 우리 주님의 긍휼과 사랑을 다시 확인할 수 있는데 우물가에서 만난 이미 남편을 6씩이나 바꿔치며 살아가는 무질서하고 기준이 없는 여인에게 자신을 거리낌없이 그대로 내주시는 모습이다.

히브리서 기자는 완전한 계시자로 하나님이시면서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면서 OT성경과 함께 천사와 모세를 비교하기도 하지만 이 주님께서 OT의 여러 선지자들과 제사장들과 왕들의 결론으로 소개하고 있다.

죄 진 사람이 하나님을 바르게 만날 수 있는 통로는 과거 어느 역사나 종교에도 없었지만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께서 인류를 위하여 친히 한번으로 완전한 제사를 드리시고[히10:14 그가 거룩하게 된 자들을 한 번의 제사로 영원히 온전하게 하셨느니라, 10, 12, 9:12] 그 제사로 인하여 하나님을 만나고 예배할 수 있는 통로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 한 분 뿐이심을 히브리서는 증거한다.

그런 이유에서 베드로 사도 역시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행4:12)고 자신을 둘러싼 유대인들에게 선언하였다.



Ⅲ. 오늘 나(우리)의 예배는?

우리는 예배의 대상과 내용은 물론이고 “영과 진리의 예배”가 어떤 것인가를 주님께서 직접 주신 말씀으로 나누었다. 그러나 어떤 이론이나 바른 교훈이라도 그것이 우리 자신에게 적용되지 않으면 그것은 소위 말하는 공염불(空念佛) 또는 사상누각(沙上樓閣)이 될 수밖에 없다.

그런 이유에서 오늘 이 귀중한 교훈이 오늘 우리 신앙의 삶에 그대로 적용되고 있는가 살피는 것으로 말씀을 마무리 하고자 한다. 만약에 우리가 하나님께 예배를 드린다고 하면서도 이러한 가르침이 그대로 적용되지 않는다면 하나님께서 예배를 받으시는지 그렇지 않은지를 확신할 수 없고 그야말로 ‘헛된 예배’를 드리고 있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특히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것을 듣지 않는다면 아무리 많은 제사를 드려도 의미를 두지 않으신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사무엘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의 목소리를 청종하는 것을 좋아하심 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 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니”(삼상15:22)

오늘 우리의 예배는 둘 중의 하나일 것이다.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영과 진리로 드리는 참된 예배이든지 아니면 형식이 어떠하든지 우상숭배와 다름이 없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v22)하는 것 중에 하나를 행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교회 전체와 개인의 문제일 수도 있는데 아무리 교회가 바른 예배를 드리고 있다고 할지라도 개인이 그렇지 못하다면 그 사람에게 있어서는 바른 예배가 되지 못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오늘 우리 대한민국의 교회들은 흔히 말하기를 ‘예배가 회복되어야 한다.’라고 한다. 이것은 바른 말이다. 그러나 이것은 또한 어디로 회복 되야 하는가 라는 과제를 갖는다. 사실 신앙과 삶의 출발이 예배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이 사마리아 여인처럼 혼돈할 필요는 없는 이유는 이제는 모든 영적인 원리가 제공되었고 순종하려고만 하면 어려움이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주님께서 말씀하신 우리가 본 받아야 할 바른 “영과 진리의 예배”의 모형을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판단해 볼 때 바로 십자가에서 구속을 완성하시고 하늘로 승천하신 후 성령께서 오셔서 시작된 예루살렘의 예배가 될 것이다. 그러므로 예언된 교회의 완성인 NT교회의 모습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비록 역사가 흐르고 문화가 바뀌어도 본받아야 할 예배는 역시 초기 교회가 모형인 것을 부정할 사람은 없다.

오순절 이후의 예배는 성령과 함께 하는 사도들의 가르침과 함께 “주님의 죽으심을 기념”(고전11:23~26)하는 만찬과 함께 찬양과 기도가 중심이 되어 있고 이러한 교회의 역사가 흐르면서 매주의 첫날에 [주님의 희생을 기념하기 위해] 모이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 주간의 첫날에 우리가 떡을 떼려 하여 모였더니 …”(행20:7)

완성된 예배는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를 감당하시고 죽으셨다가 사망의 어두움을 이긴 그 승리의 부활의 날인 [안식 후 첫날, 또는 그 주간의 첫날]에 유월절을 비롯한 모든 짐승의 제사의 완성으로 희생되신 우리 주님의 희생을 기념하는 것이 복음으로 주어진 예배의 중심이 되어야 함을 확인하게 된다.

그러나 이 시대의 예배는 과거 중세까지 있었던 가톨릭의 미사에 말씀은 없고 성사만 있었던 것에 반대하여 말씀이 예배의 중심이 되어야 한다는 프로테스탄트적 반감으로 귀중한 주님의 희생을 기념하는 것에서 말씀을 선포하는 것으로 예배의 중심이 바뀌어 버렸다.

“영과 진리의 예배” 라고 할 때 사람의 입장이나 감정보다 중요한 것이 거룩하신 하나님의 성령과 계시된 주님의 말씀으로 드리는 “예배”임을 확인했다면 이 가르침에 순종하는 것이 바른 예배일 것이다.

예배시간에 단순히 이렇게 명령하신 것들을 순종하면 예배를 완전히 드리는 것은 아니다. 드려진 예배 속에서 확인된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에 자신의 삶을 비쳐보고 깨달은 것과 받은 은혜를 지체들과 함께 삶에서 나누면서 변화된 삶으로 날마다 나아가는 산제사로서의 예배(롬12:1~2)가 일상에 지속되어야만 한다.

공식적인 예배에서도 우리의 몸을 드리는 것이 되지만 “영과 진리의 예배”에서는 [주님의 한번으로 드려진 제사를 기념하라]는 명령을 받고 있고, 세상 속에서의 우리의 삶이 예배가 되는 것은 바로 우리의 일상의 움직임으로 영광을 돌리는 산 제사가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