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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배 전도자
요 4:27~38 2019-05-05
내게는 너희가 알지 못하는 먹을 양식이 있느니라,  
이 여인 자신의 모든 감추었던 것들이 주님께는 벌거벗은 것같이 드러나는 것은 히브리서 기자의 “지으신 것이 하나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우리의 결산을 받으실 이의 눈 앞에 만물이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느니라”(히4:13)는 고백처럼 죄인 된 인생이면 이 여인과 별반 다를 것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 여인은 이제 더 이상 부끄러움을 갖지 않고 오히려 그런 수치를 드러내신 주님을 선포하기 시작하는 것은 주님으로 인하여 변화 받은 모든 사람들의 일반적인 모습이다.

가련한 여인과 대화를 끝내자 제자들은 이내 점식 식사를 준비하여 다시 주님을 찾아보니 의외의 상황을 보게 되었지만 평소 주님을 따라 다니며 예수 그리스도를 봐왔던 제자들은 별 이상할 것도 없는 광경이었기에 달리 물을 것도 없이 식사를 권하지만 우리 주님은 이 상황을 통해서도 제자들과 우리들에게 중요한 교훈을 주신다. 나는 “너희가 알지 못하는 먹을 양식”이 있다고 …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양식은 다른 사람이 알지 못하는 하늘에서 주시는 것으로 우리 주님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하는 우리 모두가 누릴 수 있는 것임을 역시 바울의 사역 속에서도 나타나는 것을 보면 이해 되는 은혜이다. 우리는 “너희가 알지 못하는” 세상이 알지 못하는 하늘 양식을 먹어야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는 능력이 생긴다.

이런 확신으로 일반적 삶을 넘어서는 고백을 하고 있는 내용을 빌립보서에서 읽을 수 있다. “내가 …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4:11, 13) 마지막의 믿음의 승리자들에게 주님께서 약속하시는 것도 같은 이해임을 볼 수 있을 것이다. “…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감추었던 만나를 주고 …”(계2:17f) 어떤 조건에서든지 이기는 자들이 하나님의 주시는 하늘의 양식을 맛볼 수 있을 것이다.



Ⅰ.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28~30)

“여자가 물동이를 버려 두고 동네로 들어가서 사람들에게 이르되, 나의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와서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 하니, 그들이 동네에서 나와 예수께로 오더라”

자신의 어두운 삶 때문에 사람들의 눈을 피해 한 낮에 물 길러왔던 이 가련한 여인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후에는 완전히 담대해 지는 변화를 본다. 사람들 만나는 것을 꺼렸던 사람이 이제는 사람들을 찾아가는 그야말로 180도로 바뀐 삶을 본다.

당장에 가장 중요한 물을 긷는 일을 버려두고 사람들을 찾아 간 것 자체가 이 여자의 형편에서는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인데 “여자가 물동이를 버려 두고 동네로 들어가서 사람들에게 이르되”(28)라고 기록되고 있기 때문이다.

어쩌면 동네 아낙네들의 수다의 대상이었던 이 여인은 이제 그 수다의 대상이었던 자신의 수치를 전혀 들은 적도 없는데 말한 그리스도를 사람들에게 증거하기 시작한다. “나의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와서 보라…”(29f)

주님당시에는 절대사법권을 가지신 주님께서 용서를 선포하시면 용서되고 그 표시로 그 사람이 가졌던 고칠 수 없는 질병이 낳는 경우들도 복음서들에서 더러 본다. 대표적인 예가 공관복음들에 다 기록되고 있지만 마태복음9:2~8의 중풍병 환자의 경우이다.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v2)

옆에서 이를 지켜보던 종교지도자들의 비난도 있었지만 이런 사실들을 통해 주님께서 사죄의 권한을 가지신 것을 나타내기도 하셨는데 이 여인도 주님으로부터 이런 은혜를 입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스스로 자신의 죄나 수치를 자랑하고 떠벌릴 사람은 세상 속에서는 적어도 없는 일이지만 그 죄의 용서를 받은 사람들은 그 용서 받은 죄를 자백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당연히 용서받은 죄는 더이상 형벌을 받지도 않기 때문에 그럴 수 있다.

“…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29b) 여태껏 별로 행복하지도 못했고 자신의 수치로 인해 괴로워하던 이 여인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자신의 수치를 해결 받은 감격으로 그러한 삶을 가능하게 해주신 그리스도를 목청껏 자랑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자세야 말로 구원받은 삶의 대표적인 예이다.

“그들이 동네에서 나와 예수께로 오더라”(30) 아마 이런 여인이 아니라 그냥 평범한 사람이 그리스도를 전했다면 이런 반응은 없었을 것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바울은 “…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롬5:20b) 라고 증거하는 것이다.

착한 사람의 변화보다는 죄가 많은 사람의 변화는 더 극적이고 호소력이 있기 때문이다. 또 이런 이유에서 착하고 도덕적인 사람의 변화는 차이를 쉽게 볼 수 없는 것도 사실이다. ‘그 사람은 예수 믿기 전에도 본래부터 착했어!’ 바울 같이 철저하게 복음에 반대하던 사람의 변화는 이런 이유에서 큰 복음적 호소력을 갖는 것이다.

그런 이유에서 바울의 복음에 등장 이야말로 요즘 우리가 말하는 반전 중의 반전으로 하나님의 지혜에서 나온 이방 구원의 역사를 위하여 준비해 두신 히든카드(hidden card)였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유대의 교회들이 나를 얼굴로는 알지 못하고, 다만 우리를 박해하던 자가 전에 멸하려던 그 믿음을 지금 전한다 함을 듣고, 나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니라”(갈1:22~24)

진리에 대하여는 문외한(門外漢, outsider)이었고 예배나 경건에 대하여는 전혀 관계도 없던 이 여인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자 삶을 치료받고 그리스도의 증거자가 되었다면 오늘 우리 각자가 받은 은혜가 이 여자만 못하겠는가! 이제는 우리 각자의 차례이다.



Ⅱ. 나의 양식은 …,(31~34)

“그 사이에 제자들이 청하여 이르되 랍비여 잡수소서, 이르시되 내게는 너희가 알지 못하는 먹을 양식이 있느니라, 제자들이 서로 말하되 누가 잡수실 것을 갖다 드렸는가 하니,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

오늘 말씀의 첫 절(v27)에서 “이 때에 제자들이 돌아와서 예수께서 여자와 말씀하시는 것을 이상히 여겼으나 무엇을 구하시나이까 어찌하여 그와 말씀하시나이까 묻는 자가 없더라”는 약간은 어색한 분위기를 요한은 기록하고 있다. 여기 내용은 제자들조차도 예수님께서 여자와 대화하는 것이 자연스럽지는 못했던 것 같고 자신들이 먹을 것을 사러 동네로 들어 갔다 왔지만 무엇을 이 여인에게 요청하고 계셨는지 궁금하기는 하였지만 무슨 이유로 이 여자와 말씀하셨는지 묻지는 않았다는 상황 설명을 그대로 하고 있다.

이런 상황설명 다음에 여자가 한 행동을 기록한 후, 제자들과 나눈 말씀이 기록되고 있는데 이 또한 평상이 제자들이 겪어보지 못했던 주님의 교훈으로 이 상황을 통해서도 귀중한 가르침을 주신다.

“그 사이에 제자들이 청하여 이르되 랍비여 잡수소서”(31) 제자들이 음식을 사러 동네에 들어갔다가 구한 음식을 주님께 드리며 점심을 드실 것을 권하는 말씀으로 여기까지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반적인 모습이다.

그러나 여기에 답변하시는 주님의 말씀이 아직 육신적으로 이해하는 제자들에게는 궁금증을 가지게 하는 내용으로 물론 영적인 답변을 육신적으로 이해하기 때문이다. “이르시되 내게는 너희가 알지 못하는 먹을 양식이 있느니라”(32)

언제나 주님은 항상 가르침 속에서도 지극히 일상적인 사실을 가지고 영적인 교훈으로 이끌어 가시는 모습을 복음서들에서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지만, 역시 먹고 마시는 문제에 있어서 40일을 금식하신 후에도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마4:4; 신8:3) 시험하는 자에게 말씀하신 성경의 인용은 주님께는 사실이었음을 여기서 보이신다.

v34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너희가 알지 못하는 먹을 양식”에 대해서 말씀하시지만 우리가 주님을 맏형으로 섬기고 사는 같은 하나님의 일꾼이요 백성이라면 이 말씀을 당시의 제자들처럼 육신적으로만 이해해서는 안될 귀중한 교훈이다.

“제자들이 서로 말하되 누가 잡수실 것을 갖다 드렸는가 하니”(33) 여기 저기 물어서 어렵게 음식을 구해온 제자들은 역시 지극히 육신적인 이해로 주님의 말씀을 이해하고 있다. 아무래도 함께 음식을 사러 갔던 제자들이 서로 얼굴을 마주보며 “누가 잡수실 것을 갖다 드렸는가!” 라는 이해 밖에는 당시의 상황에서 달리 생각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여기에 대해 주님께서 “너희가 알지 못하는 먹을 양식”에 대해 설명해 주시지만 역시 육신적인 이해로는 여전히 불가능한 말씀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34)

여기에 말씀하시는 주님의 교훈은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면 참으로 바르게 이해하고 따르는 생명의 교훈이 되어야 한다.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항상 주시는 교훈 마다 “그의 나라와 뜻을 구하라!”하신 것과 다르지 않다.

믿음의 사람, 하나님을 사랑하는 천국백성이라면 자신의 구원받음에 감격과 함께 자신을 구원하여 하나님의 나라 백성이 되게 하신 뜻을 헤아리고 그 뜻을 이루려는 사랑의 의지가 있어야만 한다. 이것은 물론 사람마다 다를 것이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처럼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란 각자가 다르긴 해도 나를 거룩한 나라의 백성으로 거듭나게 하셔서 세상 속에 하나님의 백성으로 보내신 뜻을 행할 때 영혼이 만족과 기쁨을 얻고 늘 신령한 양식인 하나님의 위로부터 주시는 영적 식물을 사랑하게 될 것이다.

예전에 먹고 살 끼니를 제대로 챙기지 못할 때도 부모들은 자식들이 배부르게 한끼를 먹는 것 만으로도 기뻐했고, 자식 중에 하나라도 사회에 인정받는 자리에 선 것만 봐도 ‘나는 밥을 안 먹어도 배고프지 않다. 나는 이제 죽어도 한이 없다.’는 표현들을 더러 들었다.

반대로 어떤 일들이 잘 안 되고 어려움만 계속 닥쳐도 밥을 입에 대기조차 싫은 그런 경험도 더러 있을 것이다. 그래서 우리 표현이 ‘살 맛나는 세상’이라는 표현을 하기도 한다. 하나님의 백성들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라는 주님의 삶이 나의 것이 되어야 한다.

그럴 뿐만 아니라 “…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34b)하였는데 온전히 이룰 그의 일은 역시 “나를 보내신 이의 일” 즉, “하나님의 일”이라고 이해할 수 있고 대충 건성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라고 덧붙이고 있다.

“하나님의 일”이 무엇인가에 이해가 되어야 할 것 같다. 예수께서 예루살렘 올라가 십자가에 죽을 것을 예언하시는 주님께 베드로는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에게 미치지 아니하리이다” 라고 막아 서자 주님께서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마16:23; 막8:33) 책망하신 바 있다.

그런가 하면 벳세다의 언덕에서 오병이어(五餠二魚)의 기적을 행하신 후에 기적의 떡을 먹기 위해 자신에게 모여드는 군중들을 향하여 “썩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요6:27) 말씀하시자 다시 군중들이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오리이까”(v28) 묻자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v29) 말씀하심을 듣는다.

“하나님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라 하실 때 예수 그리스도를 온전히 믿고 순종하는 것이 나에게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뜻이고 일이며, 그 다음 이 변화된 나를 통하여 내 이웃으로부터 땅끝까지 ‘나에게 일어난 구원의 역사’를 이루기 위하여 행하는 것들이 바로 하나님의 일이다.

또 이것은 다른 사람이 알 수 없고 할 수 없는 육신으로는 “알지 못하는 먹을 양식”이라는 이해가 된다. 믿습니까!



Ⅲ. 눈을 들어 밭을 보라 추수하게 되었도다,(35~38)

“너희는 넉 달이 지나야 추수할 때가 이르겠다 하지 아니하느냐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눈을 들어 밭을 보라 희어져 추수하게 되었도다, 거두는 자가 이미 삯도 받고 영생에 이르는 열매를 모으나니 이는 뿌리는 자와 거두는 자가 함께 즐거워하게 하려 함이라, 그런즉 한 사람이 심고 다른 사람이 거둔다 하는 말이 옳도다, 내가 너희로 노력하지 아니한 것을 거두러 보내었노니 다른 사람들은 노력하였고 너희는 그들이 노력한 것에 참여하였느니라”

이 마지막 부분에서는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을 더 구체적으로 해설 하시는데 사람의 육신으로 이해할 수 없는 양식의 추수가 세상 것과 다른 것임을 해설해 주신다. 즉, 영적인 추수는 기한을 두지 않으며 이미 추수는 시작되었고 삯군들은 자기의 삯을 이미 받았다고 증거하신다.

“너희는 넉 달이 지나야 추수할 때가 이르겠다 하지 아니하느냐 …”(35f) 일반적으로 땅에 심는 곡식을 추수할 수 있는 기간이다. 물론 이보다 더 걸리거나 덜 걸리는 나무나 식물들도 있지만 기본적인 추수 기간이다.

“…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눈을 들어 밭을 보라 희어져 추수하게 되었도다”(35b)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추수의 끝날(히1:2 이 모든 날 마지막에는 아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즉, 추수의 때에 이 세상에 오셨고 이미 자신을 통하여 이루어질 구원의 역사를 내다보시면서 선언하시는 표현이다.

“거두는 자가 이미 삯도 받고 영생에 이르는 열매를 모으나니 이는 뿌리는 자와 거두는 자가 함께 즐거워하게 하려 함이라”(36) 세상의 추수와 다른 것이 바로 이것이다. 하나님의 복음의 씨앗 즉, 말씀을 뿌리는 자는 이미 자신이 구원의 삯을 받은 자들만이 가능하고 뿌린 자와 추수되어 하늘 나라의 알곡이 된 백성과 함께 기뻐하는 것도 천국의 추수(秋收)의 신비요 기쁨이다.

“그런즉 한 사람이 심고 다른 사람이 거둔다 하는 말이 옳도다”(37) OT의 모세나 선지자들을 비롯한 수많은 일꾼들은 뿌렸어도 사실 추수를 보지 못했지만 제자들을 비롯한 오늘 우리는 하나님의 수많은 일꾼들이 수고한 것을 거두는 기쁨에 참여하는 자들이 되었으니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사실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얻으리니”(창22:18) 라고 복음의 약속을 받은 믿음의 조상이지만 추수 때를 기대했던 아브라함을 두고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요8:56) 말씀하신다.

이런 믿음의 선진들의 기대와 안타까움은 여러 곳에 기록되고 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많은 선지자와 임금이 너희 보는 바를 보고자 하였으되 보지 못하였으며 너희 듣는 바를 듣고자 하였으되 듣지 못하였느니라”(눅10:24)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로라 증거하였으니”(히11:13) 그러나 당시의 제자들을 비롯한 오늘 우리들은 그들이 심은 것을 거두며 누리고 있는 것이다.

“내가 너희로 노력하지 아니한 것을 거두러 보내었노니 다른 사람들은 노력하였고 너희는 그들이 노력한 것에 참여하였느니라”(38) 이 말씀은 v37의 해설이다. “그런즉 한 사람이 심고 다른 사람이 거둔다 하는 말이 옳도다”(37)

어찌 보면 OT의 선지자들과 예수 그리스도까지도 십자가에서 모진 고통과 수치를 참으시면서 이 추수를 위하여 노력한 이들이다. 그러나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희로 노력하지 아니한 것을 거두러 보내었노니 …”(38f)라고 말씀하신다. 농부들의 수고의 대가는 오로지 추수다. [약5:7b … 보라 농부가 땅에서 나는 귀한 열매를 바라고 길이 참아 이른 비와 늦은 비를 기다리나니]

짓지 아니한 집과 심지않은 것을 거두게 하신 하나님의 은혜는 참으로 선물이다. 그럼에도 “내가 너희로 노력하지 아니한 것을 거두러 보내었노니 …”(38f)하는 말씀이 어디에선가 들은 말씀으로 기억나지 않는가! 바로 세상을 상징하는 이집트를 탈출해 나온 이스라엘백성에게 하셨던 같은 말씀이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을 향하여 네게 주리라 맹세하신 땅으로 너를 들어가게 하시고 … 네가 심지 아니한 포도원과 감람 나무를 차지하게 하사 네게 배불리 먹게 하실 때에”(신6:10~11) 물론 신명기의 약속은 보다 육신적인 것이었다면 이 말씀은 보다 영적인 약속이다.

“… 다른 사람들은 노력하였고 너희는 그들이 노력한 것에 참여 하였느니라”(38b) 수많은 믿음의 선진들이 투쟁하며 얻기를 소망했던 그것을 우리는 거저 은혜로 선물로 받게 되는 데서 “너희는 그들이 노력한 것에 참여 하였느니라” 말씀하고 있다.

사실로 신령한 구원에 관한한 절대적인 선물이고 은혜일 뿐이다. 죄인 된 사람 스스로는 일구고 거둘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택하시고 수많은 믿음의 선진들의 수고로 얻게 된 수고에 우리를 공로없이 참여하게 하였다. 할렐루야!

우리는 한 변화된 죄인의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를 경험했다. 그것은 오늘 변화 받은 나를 도전한다. “나를 변화 받게 한 예수 그리스도를 보라!”고 새로운 삶을 증거하도록 말이다.

오늘 나는 세상의 일이 잘 되지 않고 먹을 것이 없다고 해도 하늘로부터 오는 소망과 기쁨과 만족을 누리고 있는가!

오늘 우리가 복음을 전하여 새로운 생명을 얻는 것은 사실 믿음의 선진들의 수고에 참여하는 것이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의 은혜에 참여하는 감격을 누릴 수 있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