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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배 전도자
요 4:46~54 2019-05-19
자기와 그 온 집안이 다 믿으니라,  
사마리아 수가성의 여인과의 만남은 그 성 전체를 복음으로 변화시키는 은혜의 역사였다면 오늘 이어지는 말씀은 한 가정의 은혜 체험과 믿음으로 이끈 놀라운 역사를 기록하고 있다. 이 요한복음에 기록되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주되심을 나타내기 위해 정선된 7가지의 표적(σημεῖον) 중에 두번째의 이적이면서 사람 사랑의 한계를 체험케 하는 동시에 하나님 사랑의 위대성을 다시 한번 증명하는 귀중한 말씀이다.

또 하나 독특한 것은 성경 속에서 주님께서는 각자의 바라는 형태에 따라 역사하시면서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신 것이 대부분이지만 이 사건은 기적을 바라는 사람의 기대와 다르게 예수님 나름대로의 역사로 이 아들을 치료하셨다는 사실이다.

이 왕의 신하인 사람은 “내려오셔서 내 아들의 병을 고쳐 주소서!”(47)라고 간청을 드렸지만 예수님은 “너희는 표적과 기사를 보지 못하면 도무지 믿지 아니하리라”(48) 말씀하셨고 다시 이 사람은 다급한 나머지 “주여 내 아이가 죽기 전에 내려오소서!”라고 부탁 드리지만 주님은 다시 “가라 네 아들이 살아 있다”(50) 말씀 하시는 것으로 완전한 치료를 이루신다.

복음이 완성되기 전에는 사람마다 각자 다른 형태의 믿음을 가지고 있었고 그들의 믿음의 형태로 응답하셨던 주님이시지만 이 사건의 경우에는 주님의 생명을 가진 자로서의 권위를 말씀으로 나타내심으로 태초에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신 조물주 되심을 나타내신다.

나중 11장에서 보겠지만 같은 입장에 있던 나사로의 경우는 이 왕의 신하의 아들의 경우와는 다름을 볼 수 있다. 마르다와 마리아는 일부러 사람을 보내 “주여 보시옵소서 사랑하시는 자가 병들었나이다”(3b) 간청을 드렸지만 이 왕의 신하의 아들의 경우와 같이 “나사로는 치료되었다”고 말씀 한마디로 치료하지 않으셨다.

마태복음8:5~13의 백부장의 하인의 경우에는 반대로는 “내가 가서 고쳐 주리라”(7) 말씀하시지만 오히려 백부장이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그러면 내 하인이 낫겠사옵나이다”(8) 하였기 때문에 주님께서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보지 못하였노라”(10b)고 그 믿음을 칭찬하신 경우 와도 많이 다르다.

이제 복음이 완성된 오늘에는 이런 형태의 치료 역사는 기대하기는 어렵고 “… 그들은 주의 이름으로 기름을 바르며 그를 위하여 기도할지니라,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 주께서 그를 일으키시리라”(약5:14b~15f)는 말씀이 주어지고 있다.

사람에 있어 무엇보다 무서운 질병은 죄의 저주이고 이 치료야 말로 가장 긴박하고 중요한 치료로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 주님께서 십자가를 지셨고 “…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사53:5b)라는 약속이 이루어졌다. 그러므로 이 가장 무서운 저주의 죄를 치료받은 방법은 모든 사람에게 다르지 않다. 듣고, 믿고, 회개하고, 고백하고, 침례를 받으므로 깨끗이 치료 받을 수 있다.

이 왕의 신하의 아들의 치료로 “자기와 그 온 집안이 다 믿으니라”(53b)의 역사가 우리 교회와 모든 가정들에 그대로 이루어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



Ⅰ. 생명을 위한 간청(46~47)

“예수께서 다시 갈릴리 가나에 이르시니 전에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곳이라 왕의 신하가 있어 그의 아들이 가버나움에서 병들었더니, 그가 예수께서 유대로부터 갈릴리로 오셨다는 것을 듣고 가서 청하되 내려오셔서 내 아들의 병을 고쳐 주소서 하니 그가 거의 죽게 되었음이라”

갈릴리에 가신 주님께서는 전에 그 어머니와 함께 혼인집에서 물로 포도주를 만드셨던 가나에 다시 가신 것으로 본문은 “예수께서 다시 갈릴리 가나에 이르시니 전에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곳이라… ”(46f)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그곳에서 또 하나의 안타까운 상황을 접하게 된다.

“… 왕의 신하가 있어 그의 아들이 가버나움에서 병들었더니”(46b)라 기록되는데 여기 왕의 신하란 누가복음3:1에 나타나는 대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실 때의 헤롯 대왕[BC39~AD4. 9명의 아내 중 안디바와 아켈라오(말타케-Malthace), 빌립(마리암네-Mariamne)]의 막네 아들인 헤롯 안디바라는 사람으로 갈릴리를 통치한 분봉 왕이었다.

또 다른 분봉 왕이었던 갈릴리 북동쪽 이두래와 드라고닛 지방의 통치자인 배다른 이복형제 빌립의 아내 헤로디아를 빼앗아 자신의 아내로 삼았고 이 헤로디아의 미움으로 헤롯의 생일날 살로메라는 빌립에게서 난 딸이 춤을 잘 춰서 무엇이든지 주겠다고 약속하는 헤롯의 허락을 받고 침례 요한을 죽이게 된 이야기도 공관복음에서 기록되고 있는 인물이다.(마14:1~12; 막6:14~29; 눅9:7~9)

“그가 예수께서 유대로부터 갈릴리로 오셨다는 것을 듣고 …”(47f) 왜 예수님의 움직임을 이렇게 알고 있는지는 여러가지 짐작이 가능하겠지만 일단의 그의 주님께 대한 태도로 볼 때 예수 그리스도께서 유대에서 갈릴리로 오셨음을 이미 알고 있었다.

“… 가서 청하되 내려오셔서 내 아들의 병을 고쳐 주소서 하니 …”(47m) 그의 집이 가버나움에 있고 이 신하는 가나에까지 와서 주님께 아들을 고쳐 주도록 요청했다는 요한의 기록이다. 가나는 갈릴리 서쪽의 약간 아래에 위치해 있다면 가버나움은 갈릴리바다의 북쪽에 위치해 있어서 두 곳의 간격은 약 32Km가 조금 넘는 거리로 교통이 지금 같지 못한 당시로서는 상당히 먼 거리였다.

이렇게 직접 주님을 찾아 간청하는 이유를 “… 그가 거의 죽게 되었음이라”(47b)고 기록하고 있다. 우리 성경에는 그냥 “아들[ὁ υἱὸς]”이라고만 번역되어 있지만 헬라어 원문에는 앞에 관사가 붙어 있는 것으로 짐작할 때 외아들일 것으로 이해된다.

이 헤롯 왕의 신하 중의 한사람이라면 권력이 막강한 인물이었을 것임에도 자신의 아들이 병들어 죽어가는 데는 아무 힘도 쓸 수 없었음을 보면서 세상의 권력의 헛됨을 새삼 보게 된다. 권세와 세상의 힘이 생명을 지킬 수 없음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이다.

길어야 100년을 살 인생의 죽음에도 사람은 예외없이 이렇게 마음을 들인다면 영원 속에서 잃어질 사랑하는 이들의 생명에 대해서는 얼마나 더 애타야 할까를 생각하게 하는 도전을 준다.



Ⅱ. 시간과 공간에 제한을 받지 않으시는 주님,(48~50)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표적과 기사를 보지 못하면 도무지 믿지 아니하리라, 신하가 이르되 주여 내 아이가 죽기 전에 내려오소서,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라 네 아들이 살아 있다 하시니 그 사람이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믿고 가더니”

이 왕의 신하가 “내려오셔서 내 아들의 병을 고쳐 주소서!”(46)라는 요청을 들으신 예수님은 “너희는 표적과 기사를 보지 못하면 도무지 믿지 아니하리라”(48) 하셨는데 이것이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인 것 같지는 않다. 당시의 주님을 따랐던 많은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되심에는 관심이 없고 다만 그분이 행하는 이적을 보고자 하는 사람들이 더 많았던 것 같다.

사람들은 자연적인 상황의 흐름에는 관심이 적지만 자연 질서를 거스르는 것 같은 마술에는 흥미를 가지는 것은 우리의 시대에도 흔히 보는 사실이다. 더욱이 마술이 사실이 아니라는 전제를 가지고도 그것을 보고자 하는 것을 보면 그야말로 사실적으로 자연 질서를 거스르는 이적을 보이신 주님의 기적행하심에는 관심이 많았던 것 같다.

여기에는 당시의 헤롯 왕조차도 예외가 아니었음을 성경은 기록하고 있다. “헤롯이 예수를 보고 매우 기뻐하니 이는 그의 소문을 들었으므로 보고자 한 지 오래였고 또한 무엇이나 이적 행하심을 볼까 바랐던 연고러라”(눅23:8)

사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행하시는 이적은 그 분이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보내신 메시야 라는 사실을 증거하기 위한 것인데 안타깝게도 사람들은 이적을 행하심으로 하늘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고 그리스도를 증거하기 위한 그 기적에만 관심을 가졌음을 보는 것이다.

이런 딱한 사실을 보고 들으신 주님은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희에게 말하였으되 믿지 아니하는도다 내가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행하는 일들이 나를 증거하는 것이거늘”(요10:25)이라고 안타까워 하신다. 죄악으로 소경이 되어 있는 인류는 유대인들조차도 결국 메시야를 알아보지 못하고 단지 그분이 행하시는 이적에 만 관심이 있었던 것은 안타까움이다.

좀 어려운 표현일지 모르지만 핵심을 보지 못하고 주변만 보았기 때문에 불신을 갖게 되는데 이것은 비단 이적에 국한된 이야기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희생 정신만 보면서 그분의 메시야 됨을 볼 수 없다면 마찬가지로 안타까운 일이다. 더 확대를 하면 주님의 주시는 치료나 복에는 관심을 가지면서 영원 속의 구원에는 관심이 없는 것도 다르지 않다.

가장 중요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영원한 죄의 형벌에서 나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오셨고 그 일을 위하여 십자가를 지시고 죽으실 뿐 아니라 부활하셔서 하나님 우편으로 가셨다가 이 역사의 마지막에 다시 오실 것이라는 사실이다.

주님께서 “너희는 표적과 기사를 보지 못하면 도무지 믿지 아니하리라”(48) 하신 말씀 자체가 아들을 기적적으로 고침 받기를 원하면서도 자신의 그리스도 됨을 알아보지 못하는 이 왕의 신하를 향한 안타까움 일 수도 있는 것이 이어지는 다음 절의 내용을 봐서도 이해가 된다.

“신하가 이르되 주여 내 아이가 죽기 전에 내려오소서”(49) 아직 어설픈 이 신하의 믿음의 한계를 나타내고 있는 모습이다. 사람의 힘으로는 치료가 불가능하기 때문에 주님께 요청을 드리는 것이라면 “내 아이가 죽기 전에 내려오소서” 라는 것 자체가 너무나 인간적인 믿음이다.

의술로 고칠 수 없는 것을 고칠 수 있음을 믿는다면 사실 죽어가는 절망의 상태이건 마침내 죽어 있던 분명히 차이가 없을 것임에도 이 신하는 자신의 가진 지식으로 “죽기 전에”만 살릴 수 있다는 생각이다. 이 신하를 탓할 것이 아니라 우리도 이런 믿음의 한계를 보일 때가 더러 있다. “… 전에 해 주십시오!”라고 말이다.

분명한 것은 죽기 전이나 죽어 있는 것이나 생명을 가지신 주님께는 차이가 없고 이런 일은 성경 속에 여러 번 나타나는 사실들이다. 우리 스스로 기도하면서 주님의 능력을 제한 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

이러한 안타까움에 주님은 능력으로 선언 하신다. “가라 네 아들이 살아 있다”(50) 여기서도 역시 하나님의 능력의 당부는 “가라”는 명령이셨다. 이것은 적어도 왕의 신하는 물론이고 우리 모두에게 주시면 명령이다. “가라” 즉, 믿음의 행동을 명령하신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마28:19)라는 계명과 같다.

여기에 대한 이 왕의 신하의 믿음은 전진하였다. “… 그 사람이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믿고 가더니”(50b) 이제 이 왕의 신하의 믿음이 주님으로 말미암아 채워졌다. 비록 주님을 향해 “내 아이가 죽기 전에 내려오소서!” 라고 청하였지만 “가라 네 아들이 살아 있다”(50)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명령을 들으면서 그의 인간적 믿음의 한계는 채워진 것이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의지하기 위해서는 주님은 시간과 공간뿐 아니라 어떤 상황의 제한도 받지 않으시는 창조주 라는 사실과 함께 우리의 연약한 믿음에도 불구하고 변함없는 긍휼과 사랑을 끊지 않으시는 사랑의 하나님이라는 사실부터 확신할 필요가 있다.



Ⅲ. 자기와 그 온 집안이 다 믿으니라,(51~54)

“내려가는 길에서 그 종들이 오다가 만나서 아이가 살아 있다 하거늘, 그 낫기 시작한 때를 물은즉 어제 일곱 시에 열기가 떨어졌나이다 하는지라, 그의 아버지가 예수께서 네 아들이 살아 있다 말씀하신 그 때인 줄 알고 자기와 그 온 집안이 다 믿으니라, 이것은 예수께서 유대에서 갈릴리로 오신 후에 행하신 두번째 표적이니라”

“가라 네 아들이 살아 있다”(50)는 주님의 말씀을 확인하는 데는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내려가는 길에서 그 종들이 오다가 만나서 아이가 살아 있다 하거늘”(51) 죽을 것 같은 아이의 병이 순식간에 나아버린 신비를 그 아이의 치료를 구하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께로 간 주인에게 빨리 알리기 위하여 한 종은 주님께 왔던 왕의 신하가 되돌아갈 즈음에 출발을 했을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 아이의 나은 것이 예수님의 능력 때문이라고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에 어쩌면 이 종은 ‘어쨌거나 아이가 나았으니 더 이상 예수님을 모시고 올 필요가 없다.’고 알리기 위해서 였을 수도 있다.

그런 이유에서 “그 낫기 시작한 때를 물은 즉 …”(52f)하는 이 왕의 신하는 주님으로부터 들은 “가라 네 아들이 살아 있다”(50)는 확신을 종들에게 확인하고 있는 내용이다. “… 어제 일곱 시에 열기가 떨어졌나이다 하는지라”(52b) 물론 여기 ‘일곱 시’는 우리 시간으로 계산하면 오후 한시이고 바로 주님께서 “가라 네 아들이 살아 있다”(50)는 말씀을 들을 때였음을 이 사람은 헤아리게 된다.

“그의 아버지가 예수께서 네 아들이 살아 있다 말씀하신 그 때인 줄 알고 …”(53f)라는 다음 구절의 내용이 이를 분명히 해 준다. 이 왕의 신하는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의 한치의 오차도 없음을 헤아리면서 더욱 믿음이 튼튼해 진 것으로 나타난다.

사실 지금도 고통 당하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도 이런 약속이 그대로 주어진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욕심을 부려 보기도 하지만 지금은 그런 명령을 하실 주님께서 우리 곁에 그 때와 같이 육신으로 계시지 않고 다만 기도로 구하라는 약속을 주셨다.

오늘도 치료를 위해 기도하긴 하지만 하나님의 능력이 사라지거나 감소된 것은 아님에도 불구하고 이 표적 자체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아들 메시야 이심을 우리에게 증거하기 위한 것이었기 때문에 이 표적의 역할은 다 한 것이라는 확신을 가질 필요가 있다.

사도 요한도 단 일곱 가지의 표적을 기록하였지만 이 사실은 두 곳에서 확인하고 있다. “예수께서 행하신 일이 이외에도 많으니 만일 낱낱이 기록된다면 이 세상이라도 이 기록된 책을 두기에 부족할 줄 아노라”(요21:25)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서 이 책에 기록되지 아니한 다른 표적도 많이 행하셨으나,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요20:30~31)

이 이적의 목적은 그 가족들에게도 역할을 다하고 있다. “… 자기와 그 온 집안이 다 믿으니라”(53b) 하나님께서 그분의 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시고 수많은 이적과 표적으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보내신 구세주이심을 나타내기 위한 것이기 때문에 모든 최종적인 목적은 그것이 사람을 통해서 이건 표적이건 모든 것을 통해서 반드시 믿음으로 채워져야 한다. (찬357후렴) “믿음이 이기네 믿음이 이기네, 주 예수를 믿음이 온 세상 이기네”

성경은 위대한 사도와 같은 일꾼들조차도 우리의 믿음을 위해서라고 그대로 선언한다. “그런즉 아볼로는 무엇이며 바울은 무엇이냐 그들은 주께서 각각 주신 대로 너희로 하여금 믿게 한 사역자들이니라”(고전3:5)

그러므로 성경의 기록과 교회와 하나님의 종들과 믿음 안에 주어진 모든 것들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영원한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하기 위해서 임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이것은 예수께서 유대에서 갈릴리로 오신 후에 행하신 두번째 표적이니라”(54)라고 오늘 말씀은 마무리 되고 있다. 바로 다음 장에서는 다시 예루살렘 양문(羊門) 곁에서 이루어지는 세번째 표적을 보게 되겠지만 사도 요한은 이 갈릴리에서 이루어진 두번째 표적을 밝히고 있고 그 다음의 네번째와 다섯 번째 표적도 역시 갈릴리에서 이루어지는 표적들이다.

결국 사도 요한이 다른 복음서들의 갈릴리 사역을 기록한 것에 보충하여 주님의 유대 사역을 기록하고 있지만 역시 행하신 표적들 대부분이 갈릴리에서 였음을 부정하지 않는다. 그런 이유에서도 오늘 말씀을 마무리하면서 “이것은 예수께서 유대에서 갈릴리로 오신 후에 행하신 두번째 표적이니라”(54)라고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생명의 주인이시고 생명을 친히 주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지상의 거리가 그의 능력과 사랑을 나타내기에 장애가 되지 않는다.

“내려오셔서 내 아들의 병을 고쳐 주소서”(47m) 자신의 신분을 벗어버린 간청, 사람의 위기는 주님을 보다 가까이 필요로 하는 절박한 시기이다.

믿음을 위하여 오늘 우리에 주어진 모든 것들은 그것이 본문에 나타나는 표적이건 사람이건 치료의 역사이건 그런 것들자체보다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상의 구세주요 나의 구세주이심을 믿게 하기 위한 도구들 임을 확신할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