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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배 전도자
요 5:1~9f 2019-05-26
네가 낫고자 하느냐?  
주로 예루살렘에서 행하신 주님의 역사를 기록하는 요한의 특성상 요한복음에서 나타나는 세번째 표적이지만 공관복음에는 나타나 있지 않는 자비와 긍휼의 역사를 기록하고 있는 내용이다.

예수님께서 왕의 신하를 고치신 후에 이어지는 내용이 단순히 “그 후에 유대인의 명절이 되어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니라”(1)는 기록으로 봐서는 “그 후에”라는 기간은 짐작할 수 없고 “유대인의 명절이 되어”라는 내용은 시기적으로 계산해 볼 때는 유월절을 지난 오순절인 것으로 짐작되지만 역시 정확한 이해는 할 수 없지만 다시 예루살렘으로 올라오신 것은 분명하다.

에덴 이후로 가장 인간을 괴롭혀 온 것은 질병이고 또 질병을 죄와 연관시키는 것은 어디에서나 일반적이었고 이런 입장에서 오랜 환자는 천시 당한 것이 사실이다. 알량한 인간의 긍휼과 치료는 한계가 있고 이권과 관련되어 대하는 것이 일반이지만 주님은 절망적인 상황에 처한 자들을 먼저 찾으시는 절대적 긍휼의 하나님이시다.

[자비(Βηθεσδά)의 연못]이라는 이름과는 어울리지 않게 38년동안이나 요행과 기적을 바라며 누워있던 버려진 인생이 생명의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긍휼의 역사로 치료를 받게 되지만 그것이 유대인들의 안식일에 이루어진 일이라서 또 다른 종교적 문제를 일으키고 그럼에도 이 치료받은 사람은 자신을 났게 해준 분이 예수 그리스도라는 사실조차 모르는 사뭇 기이한 현상을 대하게 된다.

우리 말에도 “긴 병에 효자 없다.”라는 표현이 있는 것처럼 병이 오래다 보면 처음 가졌던 연민이나 긍휼은 점점 무디어지고 그를 향해 가졌던 애정이나 기대는 점점 낡아져서 관심이 점점 쇠약해지는 것이 일반적인 사람들의 모습이고 그렇게 되면서 소망과 기대도 점점 적어지는 그것이 어쩌면 우리 알량한 사람의 사랑과 연민일 것이다.

그러나 우리 주님의 긍휼은 사람들의 그것과 달라서 가장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을 먼저 찾아 주시고 가지신 전능하신 능력과 권능으로 치료하심을 깨닫게 된다. 이런 구체적인 사랑의 역사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5:8) 하신 것과 같은 사랑의 역사를 본문에서 본다.

오늘도 역시 사랑과 긍휼의 한계성을 가진 버려진 인간 속에 찾아오시는 무한한 긍휼의 주님을 배우게 되는데 이렇게 다함이 없으신 사랑의 주님의 연민과 자비를 힘입어 우리의 영육(靈肉)의 고질적인 질병을 치료받고 생명의 주님을 증거하는 …

이 사건 속에 진행되는 치유의 역사와 거기에 따라오는 문제점과 해결점을 다음 시간과 함께 나눠 놓은 두 부분으로 생각하고자 한다.



Ⅰ. 여러 불편한 이들의 소원,(2~4)

“예루살렘에 있는 양문 곁에 히브리 말로 베데스다라 하는 못이 있는데 거기 행각 다섯이 있고, 그 안에 많은 병자, 맹인, 다리 저는 사람, 혈기 마른 사람들이 누워 (물의 움직임을 기다리니, 이는 천사가 가끔 못에 내려와 물을 움직이게 하는데 움직인 후에 먼저 들어가는 자는 어떤 병에 걸렸든지 낫게 됨이러라)”

이 역사와 상황 속에 가장 귀한 곳이 어쩌면 평화의 도성이라는 의미를 가진 예루살렘이라고 보여진다. 하나님께서 인간 세계에 관여하시고 죄로 단절되어 절망하는 사람들에게 자신과의 화해로 소망과 평화를 주신 중심이 되기 때문에 예루살렘은 이 지구촌에서 중요한 곳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런 예루살렘인데도 지금이나 그 때나 하나님의 절대적인 사랑이나 긍휼의 부족함 때문이 아니라 여전히 사람들의 죄성(罪性) 때문에 평화의 도성이 아니라 어둡고 안타까운 그 이름에 어울리지 못하는 모습이 전계 되고 있음을 본다.

“예루살렘에 있는 양문 곁에 히브리 말로 베데스다라 하는 못이 있는데 거기 행각 다섯이 있고”(2) 예루살렘에는 여러가지 이름을 붙인 성문들이 있었고 그 이름들은 아마도 주로 성에 드나드는 용도에 따라 붙여진 것 같다.

여부스 사람들로부터 이 예루살렘을 빼앗아 다윗 성이라고 이름 붙인(삼하5:6~9) 다윗 왕 때나 최고의 이스라엘의 영화를 이뤘던 솔로몬 때는 오히려 성전을 귀중하게 여겨서 그랬는지는 모르지만 별로 성문들의 이름이 구체적으로 거론되지는 않았던 것 같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범죄하여 바벨론의 포로 되었다가 돌아와 성벽을 재건하는 기록에서 성문의 이름들이 더러 거론되고 있고 오늘 본문에 거론되는 [양문]이라는 이름을 볼 수 있다.(느3:1, 32, 12:39) 재미난 표현은 “魚門(물고기 문)”까지 기록되고 있다.(느3:2, 12:39)

양문은 주로 성전 제사를 위하여 양을 몰고 들어갔던 문이고, 예수님 당시에도 이 문 부근에서는 제물에 쓸 양을 사고 파는 일까지 이루어지고 있어서 KJV 같은 번역들은 [sheep market-양시장]이라고 번역을 하고 있다.

이 양문 곁에는 “히브리 말로 베데스다라 하는 못이 있는데”(2m) “Βηθεσδά, 긍휼의 집, 자비의 집”을 의미하고 이 못은 표현되는 것으로 봐서는 간헐천(間歇泉, geyser)으로 여겨지는 온천으로 동서고금(東西古今)을 막론하고 이런 곳에는 질병이 치료되는 일 때문에 사람들이 모여들기 마련이고 그런 이유에서 행각 다섯이 세워져 있었을 것이다.

“그 안에 많은 병자, 맹인, 다리 저는 사람, 혈기 마른 사람들이 누워”(3f) 지금과 같은 의료시설을 생각할 수 없는 당시에는 쉽게 고치지 못하는 질병은 이런 곳에서 나음을 받았다는 피부병 환자들의 경험으로 아무래도 나병을 제외한 질병의 종류에 관계없이 몰려 들었을 것 같다.

의료기술이 발달한 지금에도 사람이 시도 때도 없이 몰리는 곳은 병원일 것이다. 가난한 사람들이 이 역사 속에 항상 있는 것처럼 몸이 불편한 사람들은 어느 나라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있는 것도 역시 죄의 영향으로 이 세상에 나타난 불편일 것이다.

이렇게 여러 종류의 병자들이 이곳에 누워있는 이유를 ( )에서 말하고 있다. “(물의 움직임을 기다리니, 이는 천사가 가끔 못에 내려와 물을 움직이게 하는데 움직인 후에 먼저 들어가는 자는 어떤 병에 걸렸든지 낫게 됨이러라)”(3b~4) 이 말씀이 초기의 사본들에서는 없는 것으로 난 외주를 달고 있는 것도 특징이다.

여기에 기록된 내용이 사도 요한이 직접 하는 이야기이기 보다는 그 때까지 이 베데스다 못에 전해져 내려온 전승이었던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무리가 없을 것이다. 이런 전해오는 이야기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많은 사람들이 그 혜택을 누리지 못했고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이기보다는 자신들의 노력이 더 큰 역할을 하고 있는 것[v7, 물이 움직일 때에 나를 못에 넣어 주는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으로 봐서 또 하나의 막연한 믿음으로 보여진다.

중요한 것은 이 환자가 언제부터 그곳에 있었는지 기록은 없지만 결국 그 베데스다 못의 신기한 능력이 아니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 치료를 받고 있다는 사실이다. 결국 어떤 전해오는 전설보다 가장 분명한 치료와 사죄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만이라는 확신을 우리는 여기서도 가지게 된다.

사람의 수명은 많이 연장되어 길어졌고 삶의 질은 많이 향상되었지만 이 지구촌 가운데, 더욱 우리의 가까이에 사랑하는 이들 가운데도 보다 온전한 치유가 필요한 사람들이 많고 긍휼을 구할 수밖에 없는 지체들이 있다는 안타까움이다.

영원한 죄의 저주인 영적 질병의 문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희생을 믿고 순종하므로 완전히 치료되었지만 아직도 죄의 영향아래 있는 육신은 여러가지 문제들로 괴로움을 겪고 있고 이 우주 자연 질서까지 새롭게 될 때까지는 아마 계속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Ⅱ. 오랜 환자의 소망과 원망,(5~7)

“거기 서른 여덟 해 된 병자가 있더라, 예수께서 그 누운 것을 보시고 병이 벌써 오래된 줄 아시고 이르시되 네가 낫고자 하느냐, 병자가 대답하되 주여 물이 움직일 때에 나를 못에 넣어 주는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

우리는 이 베데스다 못 가에 오랜 세월을 누워 있다가 주님을 만나 마침내 치료를 받고 그 안타까운 비극의 자리를 털고 가는 38년된 이 병자에 대한 안타까움과 의구심을 가질 수 밖에 없다. ‘이 사람의 가족들은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으면서 이 사람을 이지경에 버려 뒀을까?’하는 것과 치유를 받음에도 ‘거기 많은 환자들 중에 왜, 이 38년된 환자만 고치셨을까!’ 하는 질문들이다.

“거기 서른 여덟 해 된 병자가 있더라”(5) 어찌 보면 거의 버려진 인생처럼 보인다. 긍휼이라는 못 가에 긍휼을 입지 못하고 누워있는 버려진 인생이 고난을 위해 났다는 “사람은 고생을 위하여 났으니 불꽃이 위로 날아가는 것 같으니라”(욥5:7) 욥의 친구 엘리바스의 말처럼 그냥 던져진 인생으로 38년을 살고 있는 것 같다.

요즘 우리 나라에는 요양보호시설이 그런대로 되어 있어서 거두어 줄 수 있는 사람이 없으면 그나마 국가적인 돌봄시스템이 되어 있지만 아직도 이 지구촌에는 이런 불편하지만 막연한 가능성에 던져진 인생들이 많은 것으로 보인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그 많은 불편한 사람들 중에 “예수께서 그 누운 것을 보시고 병이 벌써 오래된 줄 아시고 …”(6f) 라는 최종적인 행운이다. 그 많은 나음을 기다리는 사람들 중에 예수 그리스도의 눈에 들어 온 것 자체로 이 사람에게는 최고의 횡재를 한 것이다.

다르지 않게 오늘 이 역사 속에 죄의 저주로 영원히 형벌 받을 수많은 사람들 중에 우리가 주님께 발견되어 은혜를 누리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여기 중요한 표현은 “예수께서 그 누운 것을 보시고 병이 벌써 오래된 줄 아시고 …”(6f)라는 표현이다. 주님께서 누구든지 그 분의 눈에 들어오고 아시게 되면 해결 받지못할 문제가 없다.

“… 네가 낫고자 하느냐”(6b) 어쩌면 주님은 너무나 당연한 것을 묻고 계시지 않는가 생각할 수도 있다. 예수님 일행이 여리고를 나가실 때 바디메오라는 시각장애자가 “…주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다윗의 자손이여”(막10:48b) 라고 소리지르며 달려온다. 주님은 이 시각 장애자에게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막10:46~52; 눅18:35~43; 마20:29~34)물으신다.

‘과연 주님께서 시각장애자에게 눈을 뜨고 싶은 것을 몰라서 그렇게 물으실까!’ 생각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왜, 이 38년된 병자에게 “… 네가 낫고자 하느냐”(6b)라는 질문이나 바디메오에게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51m) 물으실까? 이러한 주님의 물음은 “내가 너에게 바라는 것을 해 줄 수 있다고 믿느냐?”라는 믿음의 확인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오늘 주님은 우리에게도 이런 믿음을 확인하실 수 있다.

“병자가 대답하되 주여 물이 움직일 때에 나를 못에 넣어 주는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7)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 네가 낫고자 하느냐”(6b)라고 물으셨을 뿐인데 오래된 질병에 고통 하던 이 사람은 이렇게 원망과 불평이 가득 담겨있다.

어쩌면 생명의 주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경험이 없는 인생들이 이러지 않을까 이해된다. 이 병자의 원망은 두가지로 나타난다. “물이 움직일 때에 나를 못에 넣어 주는 사람이 없어”라고 도움을 주는 사람이 없다는 원망과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라는 경쟁에 뒤쳐지는 신세한탄이다.

사실 사람들의 불평을 분석하면 이 두가지가 대부분이다. ‘다른 사람들은 다 좋은 환경에 태어나고 공부도 많이 할 수 있고 유산도 많이 받고 건강한 몸으로 잘 살고 행복한데 왜 나는 이렇게 힘겹게 살아야 하는가!’ 어떤 어려움이든지 거기에 오래 붙잡혀 있다 보면 소망도 희미해지고 불평이 더 많이 쏟아지게 되는 것이 보통이다.

“물이 움직일 때에 나를 못에 넣어 주는 사람이 없어 …”(7f)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그런 비극적인 자신의 형편에 도움을 줄 사람이 없어서 아직까지 그러한 상태에 있을 수 밖에 없다고 주변과 사회를 은근히 원망하는 내용이다.

“…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7b) 정상적이라면 나는 못 가지만 다른 사람이라도 고침을 받는 것에 감사가 되어야 인간관계의 바른 모습이지만, 나는 못하는데 다른 사람이 하는 것은 봐주기 힘들다는 불평, 역시 깨어진 인간관계의 다른 면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결국 이 사람은 육신(肉身)뿐만 아니라 정신까지도 피폐(疲弊)된 인생으로 있었다.

아무래도 창조주를 알지 못하는 조물주와 깨어진 관계를 가진 일반적인 사람들의 모습이 이럴 것이다. 육신의 질병보다도 더 안타까운 질병은 정신이 뒤틀려 있고 영혼이 병들어 있는 인생이 더 불쌍한 생명이다.

그렇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신의 불편함에 대한 울분을 이웃에게서 찾고 조물주에게서 찾는다. 그럼에도 불행 중에 다행인 것은 이 가련한 인생이 주님의 눈에 들어왔다고 하는 사실이다.



Ⅲ. 주님의 치료 선언,(8~9f)

“예수께서 이르시되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시니, 그 사람이 곧 나아서 자리를 들고 걸어가니라”

아무래도 주님께 지적을 받기도 했지만 이 사람은 이스라엘에서 자선을 자랑하기 위한 종교지도자들의 만남은 과거에 있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어떤 사람도 이 38년간 질병에 잡혀있는 이 사람을 치료하지 못하고 그 많은 세월을 흘려야만 했다.

그런 인생 앞에 주님이 나타나셨다. “주여 물이 움직일 때에 나를 못에 넣어 주는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7)라고 탄식하는 이 사람에게 주님께서 앞뒤 가리지 않고 하신 말씀이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8) 선언하신다.

이 사람에게 38년의 경험상 이 주님의 선언은 결코 있을 수 없는 것을 명령하시는 것이다. ‘아니 이 상태에서 어떻게 걸으라는 말입니까?’라고 되물을 수 있었다. 어쩌면 ‘이 가련한 인생을 놀리시는 겁니까? 못에 먼저 들어가서 나음을 받고자 했지만 못하고 있는데 기는 것도 아니고 걸으라니요?’라고 반문할 수도 있는 형편이었다.

그럼에도 이 믿지 못할 일을 극복하고 마침내 주님의 명령에 복종하고 있는 이 사람을 볼 수 있다. “그 사람이 곧 나아서 자리를 들고 걸어가니라”(9f) 언제나 부족한 우리의 믿음은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채워짐을 잊지 말자.

지난 주의 왕의 신하의 “내 아이가 죽기 전에 내려오소서” 라는 간청에 “가라 네 아들이 살아 있다”(50)는 주님의 명령과 함께 “그 사람이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믿고 가더니”라는 상황과 다르지 않은 주님의 권능의 역사는 같은 믿음과 함께 역사함을 보는 것이다.

“네 병이 나았다!”라는 선언보다 한 걸음 앞선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8) 이러한 명령은 주님의 여러 치료의 역사에서 보게 되는 결과적 사실들이다.

저 유명한 친구 4사람과 중풍 병자의 치유에서도 “… 작은 자야 안심하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마9:2b; 막2:5b; 눅5:20b)는 보다 근본적인 주님의 선언이 종교지도자들에게 시비거리가 되었고 오늘 이 38년된 사람이 나은 것 역시 안식일에 이루어졌다는 사실 때문에 시비가 됨을 다음 내용에서 보게 될 것이다.

우리의 처지나 형편이 어떤 입장에 있든지 예수 그리스도께서 명령하시는 것을 즉각 순종함이 치료가 되고 생명이 됨을 깨닫는다. 주님의 명령은 어떤 시간과 조건을 넘어서는 창조주의 명령 이심을 우리는 믿고 순종해야 생명이 되는 것이다.

오늘 우리에게 명령하시는 많은 부분에서 우리는 변명하기에 바쁘다. ‘상황이 이렇고 시간이 이렇고 사람들이 이래서 지금은 안됩니다.’라고 명령을 순종하지 못하고 지체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그러나 우리가 핑계하는 만큼 그것은 주님의 은혜를 제한하고 있는 것임을 꼭 기억해야만 한다. 우리 주님은 우리에게 불가능한 것을 절대로 지시하실 분이 아니시다. 믿습니까?

오늘 우리의 주변에도 허울좋은 이름뿐인 일들이 더러 많다. [자비(Βηθεσδά)의 연못]이라는 이름아래 전혀 자비나 긍휼을 입지못하는 사건이나 상황이 많다. 종교도 이름뿐인 행사나 행사를 위한 행사는 사람들에게 생명을 끼치지 못한다. 신앙 속에 주님의 긍휼과 은혜를 맛보지 못하고 세월만 허송하는 일이나 사람들이 많다.

이렇게 주님의 생명을 누리지 못하는 사람들이 환경과 사람들을 탓하고 원망하고 불평하게 되는 것도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주님을 만났다고 하면서도 여전히 운명을 탓하고 너그럽지 못한 주변의 사람들을 핑계하면서 오랜 기간 누워있는 이 병자처럼 원망으로 가득 찬 종교인들이 많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인간이 포기해버린 절망의 상황에 절대적 긍휼로 찾아 오시는 근원적인 치료자이시다. 그리고 여기서도 치료의 역사는 “예수께서 가라사대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시니, 그 사람이 곧 나아서 자리를 들고 걸어가니라”(8~9)는 행동하는 믿음의 순종으로 채워졌다.

이 역시 예수님의 육신의 어머니 마리아의 “너희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요2:5)는 당부만이 해결의 실마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