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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배 전도자
요 5:9b~18 2019-06-02
주께서 안식일을 복되게 하여,  
38년이나 불편한 질병으로 고통받던 한 인생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사람 대우도 제대로 받지 못하고 누워있던 묶임에서 드디어 자유 함을 얻었다. 이것은 그 자신 뿐만 아니라 가족이나 온 나라와 인류가 기뻐해야 할 일이다.

그럼에도 이것이 사회적인 법률이나 인간관계의 법률도 아닌 종교의 계율을 어긴 것이라는 것 때문에 당사자나 유대인들은 물론이고 그 고귀한 치료를 해 주신 주님에게 까지 어려움을 가져오는 이유가 되는 모순을 당시의 종교 속에서 발견하게 된다.

서릿발같이 차가운 계율 종교의 모순을 여기서 보게 되고 적어도 하나님을 섬기는 신앙이 이런 형태로 가는 것은 우리에게 구원을 주시기 위해 십자가를 져 주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결코 기뻐하지 않으실 것임을 헤아리게 된다. 우리는 성경 속에서 가끔 이렇게 사랑과 법의 관계가 대치되는 것들을 보게 된다.

또 다시 이런 모순처럼 보이는 상황을 대하게 되면서 오늘 우리의 신앙이 어떠해야 하는가 하는 생각을 해보게 되는데 진정한 구원의 법은 적어도 이런 모순이 생기지 않음을 알아야 한다. 언제나 사랑이 중심이고 그 사랑으로 해결할 수 없는 범법의 문제를 다스리는 것이 법이라고 여러 번 말씀을 나눈 바 있다.

“알 것은 이것이니 율법은 옳은 사람을 위하여 세운 것이 아니요 오직 불법한 자와 복종하지 아니하는 자와 경건하지 아니한 자와 죄인과 거룩하지 아니한 자와 망령된 자와 … 거짓말하는 자와 거짓 맹세하는 자와 기타 바른 교훈을 거스르는 자를 위함이니”(딤전1:9~10)

분명히 하나님의 법은 주님께서 직접 말씀하신 바대로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첫째는 이것이니 이스라엘아 들으라 주 곧 우리 하나님은 유일한 주시라,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요, 둘째는 이것이니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라 이보다 더 큰 계명이 없느니라”(막12:29~31)

이러한 율법 정신은 창세 이후로 이 역사가 끝날 때까지 바뀌지 않을 것이다.(마5:18) 언제나 사랑이 아닌 것들에서 문제는 발생하고 사랑을 잃게 되는 데서 법으로 갈 수밖에 없다.

결국 이 문제의 답변을 우리 주님께서는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17) 선언하시고 그 변함없이 일하시는 하나님 아버지와 자신이 하나라는 가르침이 당시의 종교지도자들에게는 더 큰 혼란을 끼치는 것도 본다. “유대인들이 이로 말미암아 더욱 예수를 죽이고자 하니 이는 안식일을 범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자기의 친아버지라 하여 자기를 하나님과 동등으로 삼으심이러라”(18)

주님께서 “또 이르시되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니”(막2:27) 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안식일 법은 분명히 사람을 위하여 만들어진 것이지만 본래 만들어진 법이 주체와 객체가 바뀌어서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 있는 것같이 뒤집힌 하나님의 법의 잘못된 적용은 그 때나 지금이나 경계해야 될 신앙의 과제이다.

그리고 이렇게 철저하게 사람을 위해 법을 주신 하나님 아버지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는 다른 분이 아닌 같은 분 이심도 바르게 이해하는 것이 참으로 중요하다.



Ⅰ. 안식일의 선한 행동,(9b~13)

“이 날은 안식일이니, 유대인들이 병 나은 사람에게 이르되 안식일인데 네가 자리를 들고 가는 것이 옳지 아니하니라, 대답하되 나를 낫게 한 그가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더라 하니, 그들이 묻되 너더러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한 사람이 누구냐 하되, 고침을 받은 사람은 그가 누구인지 알지 못하니 이는 거기 사람이 많으므로 예수께서 이미 피하셨음이라”

예수님께서 병 고치시는 일을 안식일에 자주 하신 것으로 늘 유대종교지도자들에게 항의를 받으시곤 하셨다. 물론 주님께서 사람들이 모인 날을 찾으셨기 때문에 대부분 안식일에 그렇게 하셨다고 보여진다. 그런데 이 38년된 병자가 낳은 날도 “이 날은 안식일이니”(9b)라고 기록되고 있다.

“유대인들이 병 나은 사람에게 이르되 안식일인데 네가 자리를 들고 가는 것이 옳지 아니하니라”(10) 이 사람은 38년이나 누워있다가 걷는 것 자체가 너무나 놀랍고 신기해서 안식일이라는 사실조차 잊은 것으로 보인다. 사도행전 3장 미문의 앉은뱅이였던 사람이 다시 걷게 된 것을 봐도 이해가 된다. “뛰어 서서 걸으며 그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가면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송하니”(v8) 그러나 그것을 지켜본 유대인들의 시선은 곱지 않았다.

그러나 이 날듯이 기쁜 병자였던 사람은 “나를 낫게 한 그가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더라”(11)고 답변하면서 역시 대수롭지 않게 답변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여기에서 가만 둘 유대인들이 아니다. “너더러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한 사람이 누구냐”(12) 물론 유대인들이 이 사람이 전에 38년동안 환자로 누워있던 사람인지는 몰라던 것 같지만 이 고침 받은 사람도 자신에게 일어난 믿을 수 없는 일 때문에 자신을 치료한 사람조차 기억하고 있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사람들이 놀랄만한 치유의 역사를 이루시고 도 대부분 자신을 치료자로 나타내는 것을 경계하셨음을 여러 기록 속에서 볼 수 있다. 왜냐하면, 불필요한 종교지도자들과의 충돌을 피하시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고침을 받은 사람은 그가 누구인지 알지 못하니 이는 거기 사람이 많으므로 예수께서 이미 피하셨음이라”(13) 사람들은 대부분 자신에게 일어난 믿을 수 없는 치료나 은혜를 입게 되면 그 일을 잊지 못하고 평생을 갚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그런 면에서 이 사람은 좀 다른 면이 있다.

시간 관계상 안식일 계명은 다 다를 수 없지만 왜, 우리가 왜, 안식일이 아닌 주님의 날에 예배를 드리는 가는 간략하게 살필 필요가 있다. 왜, 우리는 주님의 날 예배를 드리고 주님의 날 대부분의 신앙의 행동을 하는가?

안식일은 이미 우리에게는 의미가 없고 그 정신은 계승되었기 때문에 복음의 완성으로 우리에게는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으로 말미암아 이미 새로운 날이 주어졌음을 이미 OT에서부터 약속되고 있다. “건축자가 버린 돌이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이는 여호와께서 행하신 것이요 우리 눈에 기이한 바로다, 이 날은 여호와께서 정하신 것이라 이 날에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리로다”(시118:22~24)

하나님께서 이루신 예수 그리스도를 교회의 머리로 세우신 희생의 역사로 말미암아 새롭게 주어진 기쁨의 날이 바로 주님의 날임을 예언하고 있는 말씀이다.

안식일 계명은 인간관계 이전의 하나님께 대한 계명의 마지막에 기록되고 있다.(출20:8~11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 그렇지만 이 안식일 계명은 해석되고 확대 되었을 뿐만 아니라 실제로 어긴 사람들을 죽인 기록(민15:32~36)도 있기 때문에 확대해석 되었을 가능성도 없지 않다.

그러나 예수께서 오셔서 비로소 안식일을 바르게 해석해 주시고 친히 안식일이 무엇인가를 보여주심을 몇 곳에서 참고하도록 하자.

먼저는 같은 이 요한복음 속에서의 내용이다. 7:22~23에서 “모세가 너희에게 할례를 행했으니 (그러나 할례는 모세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조상들에게서 난 것이라) 그러므로 너희가 안식일에도 사람에게 할례를 행하느니라, 모세의 율법을 범하지 아니하려고 사람이 안식일에도 할례를 받는 일이 있거든 내가 안식일에 사람의 전신을 건전하게 한 것으로 너희가 내게 노여워하느냐” 말씀하시면서 질병에서 노임을 받는 일은 안식일이라고 중단될 수 없음을 가르치셨다.

다른 한 곳은 마태복음12장에서 보면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 중에 어떤 사람이 양 한 마리가 있어 안식일에 구덩이에 빠졌으면 끌어내지 않겠느냐”(11) 말씀하심으로 역시 질병같은 고통에서 놓이는 것은 인식일에라도 옳다는 말씀과 함께 가장 중요한 가르심을 v5에서 주신다. “또 안식일에 제사장들이 성전 안에서 안식을 범하여도 죄가 없음을 너희가 율법에서 읽지 못하였느냐”

여기에 주님께서 직접 말씀하신 가장 귀중한 이치를 깨닫는다. “제사장들이 성전 안에서 안식을 범하여도 죄가 없음”이라는 이치는 바로 성전 되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제사장 된 하나님의 백성들이 ‘안식일에 일하지 말라!’는 부정적 계명이 죄가 되지 않는다는 귀중한 이치로 “이러므로 인자는 안식일에도 주인이니라”(막2:28) 말씀하신 주님의 증거가 옳다.

그렇다면 OT에서도 안식일의 진정한 가치가 무엇인가를 확인할 필요가 있다. “하나님이 그 일곱째 날을 복되게 하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그 날에 안식하셨음이니라”(창2:3) “이는 엿새 동안에 나 여호와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고 일곱째 날에 쉬었음이라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안식일을 ‘복되게 하여 그 날을 거룩하게 하였느니라’”(출20:11)

안식일의 핵심은 바로 여기에 말씀하시는 대로 “그 일곱째 날을 복되게 하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안식일을 복되게 하여 그 날을 거룩하게 하였느니라”는 귀한 약속이다.

결국 복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신 날이 오리려 정죄의 날로 굳어버린 자의적 성경해석을 주님께서 깨닫게 하시려고 의도적으로 안식일에 불치의 병자들을 고치시는 선행을 행하신 것일 수도 있다. 안식일과 주님의 날의 이해는 오늘 오후시간에 한번 더 나누는 것으로 하자.

선하시고 인자하신 사랑의 하나님께서 주시는 모든 명령은 사람을 정죄하거나 멸망시키시려는 의중이 아니시고 살리고자하는 긍휼이 중심 이심을 이해한다면 이런 잘못된 오해는 없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고 포로 되어간 자신의 백성들을 향한 탄식이 이렇다. “…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니 나는 악인이 죽는 것을 기뻐하지 아니하고 악인이 그의 길에서 돌이켜 떠나 사는 것을 기뻐하노라… ”(겔33:11, 18:32)

하나님의 말씀을 밝은 빛으로 이해해서 주시고자하는 사랑과 생명을 풍성히 누리는 …



Ⅱ. 고치신 예수와 만남,(14~15)

“그 후에 예수께서 성전에서 그 사람을 만나 이르시되 보라 네가 나았으니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게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하시니, 그 사람이 유대인들에게 가서 자기를 고친 이는 예수라 하니라”

자신의 반평생의 비극을 단번에 치료해 주신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보지 못하는 언 듯 보기에는 너무나 배은망덕한 이 사람에 대한 오해는 이 부분에서 완전히 해소될 수 있는데, 그렇게 이해할 수 있는 이유는 이 사람이 두번째 주님을 만난 장소가 성전이었기 때문이다.

성문 밖 못 가에서 자신의 스스로는 어찌해 볼 수 없는 인생을 끌어안고 탄식하던 이 사람이 하나님의 긍휼과 사랑으로 치유 받았음을 믿었기 때문에 이 사람은 성전을 찾아 갔을 것이고 거기서 비로소 자신을 치료해 주신 주님을 확인하게 된다.

“그 후에 예수께서 성전에서 그 사람을 만나 …”(14f) 그렇다. 다른 곳이 아닌 성전에서 주님을 뵙는 것을 보면 비록 천사가 휘저어 움직이는 물에 들어가서 낳지는 못했지만 자신을 치료하신 분이 하나님이심을 확신했기 때문에 성전을 찾았을 것이라는 이해가 가능하게 된다.

성전에서 만난 예수 그리스도는 이 사람에게 미래를 위한 경계의 말씀까지 주신다. “… 보라 네가 나았으니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게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14b) 어떤 사람들은 은혜를 맛보았음에도 그 은혜를 바로 관리하지 못해서 베드로의 권면처럼 “참된 속담에 이르기를 개가 그 토하였던 것에 돌아가고 돼지가 씻었다가 더러운 구덩이에 도로 누웠다 하는 말이 그들에게 응하였도다”(벧후2:22)라는 비극적인 결과가 될 수도 있음을 경고하신 것이다.

이제 이 사람은 당당히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자랑한다. “그 사람이 유대인들에게 가서 자기를 고친 이는 예수라 하니라”(15) 이 말씀도 오해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유대인들에게 고자질하는 내용으로 들릴 수 있다. ‘나에게 안식일을 번하게 한 사람이 예수’라는 식으로 말이다.

그러나 그의 진행되는 행동으로 볼 때 38년된 불치병을 고쳐주신 분이 예수이심을 증거하는 것이분명하다. 이 요한복음에 기록된 표적이 적지만 비슷한 예는 9장에서도 볼 수 있다. 나면서 시각 장애자였던 자신에게 진흙을 이겨 눈에 바르고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 하여 눈을 뜬 사람은 나중 유대인들로부터 쫓겨나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게 된다. “예수께서 … 네가 인자를 믿느냐!”(35)물으셨고 그 사람은 “주여 그가 누구시오니이까 내가 믿고자 하나이다.”(36) 하였다.

다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네가 그를 보았거니와 지금 너와 말하는 자가 그이니라”(37) 말씀 하시자 “주여 내가 믿나이다 하고 절하는지라”(38) 라는 믿음의 진전을 보는 것과 다르지 않다.

우리 모두는 나를 영원한 죄의 형벌과 저주에서 치료해 주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있다면 그 은혜를 잊지 않기 위해서라도 수시로 주님을 불러 찬양하고 기도하는 삶을 계속해야 당연할 것이다.



Ⅲ. 선한 일에 박해,(16~18)

“그러므로 안식일에 이러한 일을 행하신다 하여 유대인들이 예수를 박해하게 된지라,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하시매, 유대인들이 이로 말미암아 더욱 예수를 죽이고자 하니 이는 안식일을 범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자기의 친아버지라 하여 자기를 하나님과 동등으로 삼으심이러라”

어쩌면 이 복음서를 기록하고 있는 요한의 입장에서는 앞의 이야기들보다 더욱 중요한 내용일 수 있다. 왜냐하면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바로 온 인류가 고대하고 기다리던 바로 그 메시야 이심을 증거하기 위해서 이 서신을 쓰고 있기 때문이다.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요20:31)

이 주님의 선하신 역사는 엉뚱한 방향으로 불똥이 튀는 것을 본다. “그러므로 안식일에 이러한 일을 행하신다 하여 유대인들이 예수를 박해하게 된지라”(16) 선한 일을 하는 것이 칭찬의 대상이 아니라 박해의 이유가 되는 것은 역시 당시의 상황이 비정상적인 상태를 잘 나타내 주고 있다.

거기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은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17) 앞에서 살폈던 대로 창조의 사역을 끝내신 후에 안식하셨다는 말씀은 창조를 완료하셨다는 의미이지 그 창조된 우주와 자연의 운행을 정지시키신 것은 아님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그래서 이 두가지를 표현하기를 ‘창조’와 ‘섭리’로 표현한다. 하나님의 최초의 안식도 창조는 끝내셨지만 운행하시는 섭리는 중단되지 않았음을 이해할 수 있다.

결국 간악한 사람에 의해 해석된 안식일은 무엇이든지 하는 것을 정죄하였지만 그 안식 속에서도 불편을 회복하는 선한 섭리는 우주 질서를 섭리하시는 것처럼 중단할 수 없는 창조주 되신 아버지 하나님과 독생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멈출 수 없는 사역이기 때문이다.

이미 1:1~3에서도 이 우주의 창조를 하나님과 말씀과 함께 이루신 역사임을 증거하였지만 좀더 구체적으로 다루고 있는 바울을 통한 증거는 이를 더욱 분명히 이해하게 한다. “만물이 그에게서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왕권들이나 주권들이나 통치자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골1:16)

그러므로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17)는 주님의 증거는 사실적이고 분명한 독생자의 선언이다.

그럼에도 여기에 나타나는 반응은 불신의 전형적인 적대행위이다. “유대인들이 이로 말미암아 더욱 예수를 죽이고자 하니 …”(18f) 안식일을 무엇이든 할 수 없는 부동자세로 이해하고 그렇게 가르치는 데도 자신들의 종교적 권위에 복종하지 않고 자신들의 입장을 곤란하게 만든다고 판단되는 예수 그리스도를 죽이고자 하는데 더욱 눈이 붉어진다.

이러한 저들의 반응의 이유를 기록하는 것으로 요한은 오늘 우리의 다루는 내용을 마무리하고 있다. “… 이는 안식일을 범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자기의 친 아버지라 하여 자기를 하나님과 동등으로 삼으심 이러라”(18b)

이유는 분명히 두가지이다. ①안식일을 범한다. ②자기를 하나님과 같이 삼으심. 저들이 죽이려고 하는 두 가지 모두 객관적인 입장에서 볼 때는 사실 오해 중의 오해임이 분명하다.

나중 예수께서 이런 사악한 사람들에게 직접적으로 물으셨다. “…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여러 가지 선한 일로 너희에게 보였거늘 그 중에 어떤 일로 나를 돌로 치려 하느냐”(요10:32)

그런 다음에 저들의 바른 선택을 위해 덧붙이시는 말씀이 “만일 내가 내 아버지의 일을 행하지 아니하거든 나를 믿지 말려니와, 내가 행하거든 나를 믿지 아니할지라도 그 일은 믿으라 그러면 너희가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음을 깨달아 알리라 하시니”(요10:37~38)

어떤 선한 증거도 불신의 자세로 접근해 오는 사람에게는 증거가 되지 못한다. 그런 이유에서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것도 “행한 것을 믿으라, 그러면 깨달아 알리라”는 신앙 원리를 설명하시는 것이다.

안식일을 비롯한 하나님의 말씀들의 바른 이해가 이래서 대단히 중요하다. 또 우리는 선한 일을 행하면서도 보이는 면에서는 오해를 받을 수도 있음을 주님에게서 배운다.

고침 받은 이 사람에게서는 자신의 치료의 출처를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라고 믿었기 때문에 성전을 찾았고 거기서 주님을 만나 더욱 믿음을 확실히 하고 고백하는 삶을 배운다.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 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사55:6)

우리가 선한 일을 하기 때문에 반드시 칭찬을 기대할 수 없다. 주님께서도 이런 대우를 받으셨다면 우리야 더욱 그럴 수 있지 않겠는가 하는 각오로 선을 행하고 복음을 전해야 한다. 거기에 대한 보상은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갚으실 것이다.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마5:11~12f) 믿으시기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