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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배 전도자
요 5:19~23 2019-06-09
심판을 다 아들에게 맡기셨으니,  
본래 한 마당으로 되어 있는 v19~29 부분을 신앙적 중요성에 비추어 두 부분[19~23 - 24~29]으로 상고하고자 하지만 사실 반복되는 것처럼 이해되는 부분도 적지 않다. 앞에서도 말한 바 있지만 어찌 보면 이 5장도 요한이 복음서를 기록한 중심과 같이 아버지와 아들이 하나라는 사실을 심도 있게 증거하고 있는 내용이다.

안식일 문제를 바르게 증거하시면서 한량없으신 긍휼의 하나님 되심을 나타내신 주님께서는 자신이 행하는 어떤 일도 자신의 원하는 일들이 아니라 자신을 보내신 아버지 하나님의 원하시는 것을 행하는 것이라 증거하신다.

약간 뒤에 가서 말씀하시는 것을 듣게 되지만 심지어 “내가 내 자의로 말한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나의 말할 것과 이를 것을 친히 명령하여 주셨으니”(요12:49) 라고 언어 활동조차도 아버지께서 명령하여 주신 것임을 증거하신다.

행동과 말 모두가 같다고 하는 것은 바로 같은 분임을 나타내는 것이다. 같은 분이 아니라면 이렇게 완벽하게 같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요즘 이런 이야기가 나오면 독일어인 도플갱어(doppelgänger, 이중으로 돌아다니는 사람)를 떠올리지만 이것과는 완전히 다르다.

그러면서도 이것이 강제적이거나 억지가 아니라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하시도다 내가 항상 그가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므로 나를 혼자 두지 아니하셨느니라”(요8:29)시는 선언 속에서도 이를 더욱 분명히 하신다.

이러한 증거는 앞으로 계속 이어지겠지만 언제나 아버지께서 보여주시는 것만을 행하며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것만을 아들도 행하는 하나의 역사와 함께, 아버지 하나님께서 죽은 자를 살리실 수 있는 것과 다르지 않게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원하는 자의 생명을 줄 수 있다는 생명의 주인이심을 선언하신다.

가장 최종적인 아버지와 같은 선언은 심판을 자신에게 맡기셨다는 증언이다. 이 우주와 세상의 창조가 시작(בראשׁית, ἀρχή)이라면 심판은 바로 최종적인 종말을 의미하는 말이다. 시작을 아들과 함께 하셨던 아버지 하나님은 이 역사를 닫는 최종의 판결을 아들에게 맡기셨음을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다.

오늘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바로 이러한 절대적인 권한을 가지신 분이 우리의 아버지시면서 구세주요 우리의 맏형이라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이미 이루어 놓으신 엄청난 구원의 은혜는 그분이 명령하시고 바라시는 것을 행하고 순종한다면 전혀 두려울 것도 의심할 필요도 없음을 감사할 수 있다.



Ⅰ. 같은 것을 행하신다.(19)‘’

“그러므로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들이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나니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그것을 아들도 그와 같이 행하느니라”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대상은 당연히 안식일을 범한다고 항의하는 유대인들일 것이다. 왜냐하면 앞에서 살핀 대로 38년된 병자를 고친 것과 이 가르침이 안식일에서 출발된 가르침이기 때문이다.

인간 사회 같다면 벌써 이러한 대화는 고성이 오갈만 한 상황이다. 세상에서 권위를 가졌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이 유대인들처럼 자신의 권위에 도전해 오는 대상에 다하여 참지 못함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이 우주의 절대권을 가지신 주님이심에도 자신들의 이권이나 가르침은 물론이고 자리에 도전이 된다고 생각하여 항의하는 이 유치하기 이를 데 없는 종교꾼들에게 너무나 차분히 말씀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보는 데서도 역시 우리 일반 사람과 같은 분이 아니심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19f) 자신을 박해하는 아랫사람을 용납할 수 있는 사람이 있는가! 사실 용납할 수 없는 행위이다. 이미 앞에서 요한은 이 사실을 증거한 바 있다.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1:11) 주님께서 베푸신 비유에서도 이런 내용을 더러 말씀하심을 다른 복음서들에서도 읽어 볼 수 있는 내용들이다.

마태복음에서만 봐도 20:1~16의 ‘포도원 품꾼의 비유’, 21:33~46 ‘포도원 농부의 비유’, 22:1~14 ‘혼인 잔치의 비유’, 25:14~30 ‘달란트의 비유’들 모두가 바로 유대인들이 공경하는 대상이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해시키시고 자 하는 사랑의 교훈들이었지만 저들은 받아들이기는커녕 오히려 더 격분하고 대항하는 결과들을 보이고 만다.

우리가 객관적인 입장에서 이런 내용들을 볼 때 하나님을 알고 섬긴다고 하는 사람들이 그렇게 간악하고 유치함을 볼 수 있다. 그럼에도 우리가 더욱 경계해야 하는 것은 오늘 우리가 그들과 다른가 하는 것을 헤아릴 필요가 있다. 창조주요 나를 위해 피 흘리신 구세주를 그 하신 일에 합당하게 대우해 드리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이제 주님은 좀더 진지하게 호소하신다. “…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19fm) 앞으로 이 한 마당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러한 표현을 반복하여 말씀하신다. 이러한 표현은 “지금부터 하려는 이야기는 절대적인 진리로 너희들이 거절하면 안된다.” 아니 “거절하면 멸망할 수밖에 없다!”라는 경고성 표현이다.

“… 아들이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나니 …”(19bm) 주님께서 이 세상에서 행하시는 하나하나가 하나님 아버지께서 하라고 명령하신 것이라는 사실을 확실히 하고 있는 말씀이다. 그러므로 그러한 사역을 방해하고 대항하는 것은 바로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하고 하나님을 섬긴다는 유대인들이 그들이 섬기는 하나님을 대항하는 행위임을 일깨워 주시는 것이다.

나중 주님께서는 “예수께서 외쳐 이르시되 나를 믿는 자는 나를 믿는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며, 나를 보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보는 것이니라”(요12:44~45) 증거하시고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보낸 자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이니라”(요13:20) 확인하신다.

“…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그것을 아들도 그와 같이 행하느니라”(19b)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창조의 사역에 있어서도 아버지와 함께 계시면서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요1:3) 하실 뿐만 아니라 구속의 역사에도 역시 주체가 되심을 확신할 수 있다. 이러한 내용은 바로 그분의 겸손과 함께 빌2:5~에서 증거되고 있다.

세상의 창조와 섭리에 변함없이 함께 하시는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를 친히 설명하심을 본다.



Ⅱ. 어떤 제한도 존재하지 않는 父子의 관계,(20~21)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사 자기가 행하시는 것을 다 아들에게 보이시고 또 그보다 더 큰 일을 보이사 너희로 놀랍게 여기게 하시리라, 아버지께서 죽은 자들을 일으켜 살리심 같이 아들도 자기가 원하는 자들을 살리느니라”

정상적인 부자(父子)의 관계는 바로 이런 창조주요 구세주이신 하나님과 아들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출발한다. 아버지는 아들이 공경을 드릴만큼 존경스럽고 그렇기 때문에 아버지를 공경하지만 아버지는 또 그 공경하는 아들을 사랑하게되는 사랑의 순환 관계를 하나님 아버지와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로부터 배우게 된다.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사 …”(20f) 비록 유대인들은 알지 못해서 하나님 아버지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푸대접하였지만 주님의 공생에 기간에도 하나님께서 몇 번씩이나 사람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직접 증거하신 사실은 복음서들에서 보게 된다.

예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시려고 침례를 받으시고 물에서 올라 오실 때 “하늘로부터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마3:17)하셨고 변화산상에서도 “말할 때에 홀연히 빛난 구름이 저희를 덮으며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서 가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 하는지라”(마17:5)고 기록되고 있다.

“… 자기가 행하시는 것을 다 아들에게 보이시고 …”(20m)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계획하신 것이나 예정하신 것들을 아들과 완벽하게 공유하시는 데 이러한 사실을 죄에 고통 하는 인생들을 향하여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초청하시면서 선언하신 바 있다.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마11:27)

요즘은 이런 것들을 네트워크를 공유한다고 한다. 어떤 아버지이든지 믿음직한 아들에게는 자신의 계획을 완전히 공유하고 숨기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반대로 믿음이 가지 않는 아들에게는 가진 것을 다 공유할 수 없을 것이다.

“… 또 그보다 더 큰 일을 보이사 너희로 놀랍게 여기게 하시리라”(20b) 뒤에 가서 다시 말씀하시지만 38년된 병자를 단번에 치료하신 일도 사람들에게 놀랄만한 일이지만 장차 죽은 사람을 살리는 일을 행하실 것에 대한 역사를 말씀하시는 것이다.

나사로처럼 죽은 지 나흘이 되어 썩어가는 사람을 살려내는 일은 놀랍게 여길 수 밖에 없는 생명의 역사였지만 간악한 사람들은 그런 엄청난 일을 보면서도 하나님의 아들을 공경하는 것으로 돌아서야 함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그 놀라운 표적의 증거인 나사로를 죽여 없애려는 어리석은 방법을 쓰려고 하니 절망적인 인생일 수밖에 없다.

그럼으로 이 38년된 병자를 고치신 것은 예고편에 불과하다는 말씀이다.

이제 이 v21에서는 보다 구체적으로 증거하고 있는데 헬라어 원문에는 21절 아버지 앞에 “왜 그런가 하면[γὰρ-gar]”이란 말이 기록되고 있다. “아버지께서 죽은 자들을 일으켜 살리심 같이 아들도 자기가 원하는 자들을 살리느니라”(21) 흙을 뭉쳐서 그 속에 생기를 불어넣어 생령이 되게 하신 하나님(창2:7)이시요 에스겔37장에 기록되고 있는 대로 골짜기의 무수한 뼈들에게 살과 힘줄을 입히고 생기를 명하여 그들에게 들어가게 하여 무수한 군대로 일으켜 세우시는 하나님이시다.

또 “죽은 자들을 일으켜 살리심 같이”란 육체적(肉體的)이며 영적(靈的)인 부활 모두를 포함하는 의미이고 특히 여기 쓰여진 “살리심 같이[ὥσπερ-hosper]”는 두 객체가 다른 시간대에 반복된 행동을 하는 것과 다르게 하나의 몸이 행동하는 의미로 보다 더 긴밀한 관계성을 나타내 주고 있다.

이런 역사는 다음 주에 다시 다루어지는 V26에도 나타나고 있다. “아버지께서 자기 속에 생명이 있음 같이 아들에게도 생명을 주어 그 속에 있게 하셨고” 이렇게 하나님과 동일한 생명을 가지고 계신 아들 예수 그리스도도 생명을 주시는 일이 결코 어려운 일이거나 생소한 일이 아니라 자연스러운 일일 뿐이다. “아들도 자기가 원하는 자들을 살리느니라”(21b)

예수 그리스도 당시는 물론이고 종말에 주님께서 재림하여 무수히 죽어있는 역사 속의 죽은 자들을 살리심의 제한은 없는데 그러한 내용은 다음 주에 좀더 구체적으로 다루게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 우주 가운데 가지신 모든 능력과 권한은 역시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동일하게 가지고 계시며 행하시는 데 제한이 없으시다. 아름다운 것은 하나님은 아버지의 영광스러운 위엄과 존귀를 아들에게 나타내시고 아들은 그 아버지를 완전히 순종하시고 그러한 아들을 지극히 사랑하시는 아버지는 자신의 모든 것을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게 동일하게 사용하도록 허락하시고 이러한 아름다운 조화로 이 죄악에 빠진 인류를 구원하시는 은혜의 역사를 이루어 가시는 것이다.

한가지 더 놀라운 사실은 이 믿기 어려운 사랑의 관계를 오늘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씻김을 받은 주님의 뜻을 순종하는 모든 백성들이 동일하게 죄인 구원에 사용하도록 허락 받았다는 사실이 바로 “예수께서 나아와 말씀하여 이르시되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마28:18~19) 하신 것인데 이것을 믿고 순종하는 사람은 사용할 수 있고 믿지 못하면 사용하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Ⅲ. 공경도 함께 받으신다.(22~23)

“아버지께서 아무도 심판하지 아니하시고 심판을 다 아들에게 맡기셨으니, 이는 모든 사람으로 아버지를 공경하는 것 같이 아들을 공경하게 하려 하심이라 아들을 공경하지 아니하는 자는 그를 보내신 아버지도 공경하지 아니하느니라”

비록 죄에 빠져 죽음의 저주로 죽어 있는 생명들이지만 이제 그 죽은 자들을 살려 구원으로 회복하는 일을 위하여 아버지와 아들이 사랑으로 함께 일하시며 생명을 주시는 일까지도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께 전혀 제한이 없으심을 앞에서 나눴다면, 최종적인 이 역사의 심판까지 아들에게 맡기셨다는 사실이다.

“아버지께서 아무도 심판하지 아니하시고 심판을 다 아들에게 맡기셨으니”(22) 이 구절 역시 위의 v21절을 설명하는 형태로 기록되고 있다. 여기에 심판은 당연히 옳고 그름의 판단으로 죄로 정죄 될 죽일 자와 의로 인정되어 영생으로 살릴 자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서두에서 말한 것처럼 심판은 언제나 최종적으로 어떤 사람의 행한 결과를 가지고 그 사람의 전체를 종결하는 창조주이신 하나님의 최종적인 권한으로 행할 수 있다. 그런 심판을 “… 다(모두) 아들에게 맡기셨으니” 라고 확인하신다. 그것도 “아버지께서 아무도 심판하지 아니하시고 …”하심으로 예외없이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 위임하셨음을 확인하고 계신다.

그리고 아들에게 위임하신 그 심판은 또한 동일하게 주님의 피로 거듭난 하늘의 사람들이 함께 누릴 약속이다. “성도가 세상을 판단할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세상도 너희에게 판단을 받겠거든 지극히 작은 일 판단하기를 감당하지 못하겠느냐, 우리가 천사를 판단할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고전6:2~3f) 성도의 품위나 권한을 가볍게 봐서는 절대로 안된다.

물론 이 사실도 뒤의 v27에서 “또 인자됨을 인하여 심판하는 권세를 주셨느니라”는 말씀에서도 다시 확인하고 있고 마태복음25:31~46에서 보다 자세하게 말씀하고 계시다. “인자가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올 때에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으리니 ~ 저희는 영벌에,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리라 하시니라”(31~46)

바울 사도의 부활의 장이라고 하는 고린도전서15장에서 모든 심판을 행한 후에는 다시 완성된 영적인 세계를 다시 아버지께 돌려 드릴 것이라 증거하고 있다. “그 후에는 마지막이니 그가 모든 통치와 모든 권세와 능력을 멸하시고 나라를 아버지 하나님께 바칠 때라”(24)

이렇게 아버지와 모든 면에서 한결 같으신 아들이기 때문에 오늘 마지막 절의 말씀은 어쩌면 당연하다고 보여지고 유대인들은 물론이고 모든 인류는 당연히 이러한 말씀에도 순종이 해야 할 것이다. “이는 모든 사람으로 아버지를 공경하는 것 같이 아들을 공경하게 하려 하심이라 아들을 공경하지 아니하는 자는 그를 보내신 아버지도 공경하지 아니하느니라”(23)

유대인들은 무지하고 어리석은 데서 이렇게 하지 못하고 유일하신 하나님은 인정하려 하면서도 독생하신 하나님을 알아보지 못했고 공경하지 않을 뿐 아니라 오히려 대적하고 말았다. 이미 상고했던 1:18에서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 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는 요한의 선언을 봤지만 안타깝게도 여기에 가장 민감하지 못했던 사람들이 인류를 위해 메시야의 계보로 선택되었던 하나님의 백성들이었다.

“이는 모든 사람으로 아버지를 공경하는 것 같이 아들을 공경하게 하려 하심이라 …”(23f) 창조와 섭리와 최종적인 심판까지도 아들에게 주신 이유를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다. 특히 이 말씀은 당시 이 말씀을 듣고있던 대상이었던 유대인들뿐만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를 공경하는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역시 그 경외감을 아들에게도 가지게 하신 것이다.

그러한 뜻에 합당하지 못한 것이 바로 “… 아들을 공경하지 아니하는 자는 그를 보내신 아버지도 공경하지 아니하느니라”(23b) 신앙에 관한한 죄인 된 인류는 직접 하나님을 대상할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은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중보자로 이 세상에 독생자를 보내 주셨다.

이 모든 이치는 만물의 이치와 다르지 않다.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아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그에게 영광이 세세에 있을지어다 아멘”(롬11:36) 보이는 세계는 물론이고 보이지 않는 영적 세계의 근본도 당연히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이다. 그리고 지금도 주로 말미암고 주님께로 돌아가게 되어 있다.

이러한 이치의 중보자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이러한 사실을 가르친 바 있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오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자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딤전2:5) 이런 이유에서 은혜와 구원의 통로도 예수 그리스도이지만 영광을 돌려드리는 통로도 다르지 않음을 가르치고 있다. “지혜로우신 하나님께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광이 세세무궁하도록 있을지어다 아멘”(롬16:27; 벧전4:11; 유1:25)

우리의 영육간에 필요한 모든 것들을 구하는 것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구할 때만 받을 수 있을 뿐 아니라 영광을 돌려 드리고 싶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드려야 비로소 받으신다.

이런 이유에서도 “… 아들을 공경하지 아니하는 자는 그를 보내신 아버지도 공경하지 아니하느니라”(23b)는 이치는 당연하다. 이를 좀더 확대하면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요일4:20)

하나님 아버지와 독생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사람으로서는 완전한 이해가 불가능하더라도 창조와 섭리와 역사의 마지막까지도 완벽하게 같은 분이시다.

이러한 사실을 완벽하게 계시하시고 최종적인 심판의 권한 까지도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께 완전히 맡기셨다.

이러한 하나님과 모든 면에서 다르지 않기 때문에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공경하지 않는 것을 아버지 하나님을 공경하지 않는 것과 다르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