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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배 전도자
요 5:24~29 2019-06-16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25)거나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28)라는 말이 사람의 이성적(理性的)으로 이해가 될 수 있을까!

이런 말씀들이 요한의 표현대로 “이를 놀랍게 여기지 말라!”는 말처럼 깨닫기만 하면 놀랄만한 하나님의 사랑이요 은혜이지만, 불순종의 사람들에게는 반대로 절망으로 놀랄 수 밖에 없는 결과를 가져올 것이다.

또한 이 가르침이 앞에서 말했던 것처럼 “지금부터 하려는 이야기는 절대적인 진리로 너희들이 거절하면 멸망할 수밖에 없다!”라는 의미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라는 경계의 반복과 함께 반드시 순종해야 할 헌신을 요구하고 있다.

참으로 오묘하면서도 감사할 수 밖에 없는 생명의 선언이다. 육신적으로는 이해가 전혀 불가능하면서도 생명을 가지신 예수 그리스도의 신비가 그대로 그를 순종하는 자들에게 나타나는 은혜의 역사를 감격할 수 있다.

죽어있는 영혼들에게 생명의 호령과 그 생명의 선언에 반응하는 역사가 현세에서부터 말세의 역사 속에 있어질 것과 이 지금과 마지막 사이에 생명과 심판의 권한을 모두 가지신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아버지와의 함께 죽은 자들을 살리시는 부활의 역사를 다스리는 권능을 증거하신다.

또 이 말씀은 현재의 상황이 역시 미래와 영원까지 연결되는 것도 말씀하고 있어서 현재의 선택이 영원을 결정하는 참으로 귀중한 순종을 이해하게 된다.

아담의 범죄 후부터 하나님께서는 지속적으로 죄인들을 생명으로 부르시고 초청하셨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시기 전의 그러한 방법이나 모양은 “옛적에 선지자들을 통하여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히1:1) 라고 하였지만, 이제는 “이 모든 날 마지막에는 아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2)셨고 아들의 말씀은 곧 하나님 아버지의 말씀이라는 데서 최후통첩(最後通牒)이라고 말할 수 있다.

생명과 죽음의 결정은 하나님의 아들의 말씀을 듣는 것과 거절하는 순종과 불순종에서 결정되고 사망에 머물든지 생명으로 옮겨지는 운명이 될 것인데 그것은 먼 이야기가 아니라 지금 이순간에 이루어진다.



Ⅰ.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이다.(24~25)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오늘’ 듣고 순종하는 것이 중요하다. 언제나 미래는 지금의 선택이나 결정의 결과이다. 하나님은 바울을 통하여 “알지 못하던 시대에는 하나님이 간과하셨거니와 이제는 어디든지 사람에게 다 명하사 회개하라 하셨으니”(행17:30) 라고 인류를 향한 회개를 요청하고 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24f, 25f) 참으로 이 교훈은 가볍게 흘려 들어서는 안될 생명이 걸린 교훈이요 긴박한 결단을 요청하는 구세주의 초청이다. 다른 면에서는 참으로 여기 살 수 있는 길(방법)이 있다고 소개하시는 사랑의 음성이다.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24fm) 여기에도 아들과 아버지가 함께 거론되고 있다. 아들의 말을 듣는 것이 곧 아버지를 믿는 것임은 자연스러운 흐름이다. 앞에서 이미 “아들을 믿는 자에게는 영생이 있고 아들을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요3:36)는 가르침과 함께 이해할 수 있는 말씀이다.

그리고 “듣고 - 믿는” 것은 명령에 순종하는 행동으로 점점 나아가는 수순이다. 이 행동은 말씀에 반응하는 모습으로 듣지 않으려고 귀를 막아 버리면 소리가 있어도 들을 수 없고 거기에는 당연히 행동도 없다. 로마서10:14에서는 “…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라고 말씀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말씀이 없어서 듣지 못하는 것이 아님을 바울은 시편(시19:4)의 글을 통하여 다시 증거한다. “그러나 내가 말하노니 그들이 듣지 아니하였느냐 그렇지 아니하니 그 소리가 온 땅에 퍼졌고 그 말씀이 땅 끝까지 이르렀도다 하였느니라”(롬10:18)

이런 이유 때문에 잘 듣는 것 자체가 중요하다. “그러나 너희 눈은 봄으로, 너희 귀는 들음으로 복이 있도다”(마13:16)라고 주님께서 직접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들을 수 있을 때 듣는 것이 중요하다. 그리고 기쁘게 듣는 것은 기쁘게 믿는 것 즉, 순종함으로 연결되는 것이 복이다.

그리고 듣고 믿은 결과가 바로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24mb) 라는 약속이다. 듣고 순종함이 정죄에서 벗어나 이미 영생을 확보하게 된다. 이 원리는 복잡하지 않고 이해가 어렵지 않다. 하나님의 아들이 이미 죄의 저주를 다 십자가에서 감당하셨음이 완료이기 때문에 그 역사를 나의 죄를 위해 치뤄진 형벌이라고 인정한다면 이미 나의 죄의 처리도 완료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에서 현재의 순종은 당연히 과거에 완료하신 역사를 받아들이므로 “…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24b)는 완료형이 되는 것이다.

반대로 “그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요3:18) 한 것처럼 자신의 죄를 해결하기 위하여 희생되신 분을 믿지 않는 것 자체가 이미 심판을 받은 것이라는 증거이다.

그럼에도 적지 않은 사람들의 경계는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24)는 내용을 마법적(魔法的)으로 이해하지 말라는 것이다.

듣고 믿는 것이 각자에게 영생을 얻게 하고 저주의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기는 것이 사람들의 듣고 믿는 생각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나타나는 “듣고 - 믿는” 것이 모두 동사로서 전 인격적 순종으로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약속이라는 이유에서 그렇다.

“…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25) 서두에서 거론했던 대로 어떻게 죽은 자들이 들을 수 있는가 하는 의문이다.

그러므로 여기에 “죽은 자들”은 육체의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영적으로 죽은 즉,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져 있는 상태로 이해하는 것이 무리가 없다. 마치 마태복음8:22의 “예수께서 이르시되 죽은 자들이 그들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따르라 하시니라”신 말씀과 함께 이해할 수 있는 내용이다.

그런 이유에서 이 말씀을 그리스도께서 현세에 그 복음에 의하여 사람들을 영적(靈的)으로 거듭나게 하심을 의미한다고 이해한다.

여기서 사건의 시제가 ‘이 때라’에서부터 미래 시제로 쓰인(듣는-현재, 살아나리라-미래) “…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는 표현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심에서부터 복음의 완성 후의 주님의 다시 오실 때까지 복음에 바르게 반응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주시는 약속이다.



Ⅱ. 아버지와 아들이 함께 이 생명의 일은 하신다.(26~27)

“아버지께서 자기 속에 생명이 있음 같이 아들에게도 생명을 주어 그 속에 있게 하셨고, 또 인자 됨으로 말미암아 심판하는 권한을 주셨느니라”

여기 내용은 이미 지난 주에 함께 생각했던 앞의 v21~22에서 다룬 내용이기 때문에 다시 부연할 필요는 없을 것 같지만 하나님 아버지와 그리스도께서 생명 주시는 원리로 “아버지께서 죽은 자들을 일으켜 살리심 같이 아들도 자기가 원하는 자들을 살리느니라, 아버지께서 아무도 심판하지 아니하시고 심판을 다 아들에게 맡기셨으니”(21~22)라는 말씀의 확인이다.

두 곳의 말씀을 비교하며 이해 하는 것도 상당히 흥미 있는 과제가 될 것 같다. “아버지께서 자기 속에 생명이 있음 같이 아들에게도 생명을 주어 그 속에 있게 하셨고,”(26) 하신 것은 “아버지께서 죽은 자들을 일으켜 살리심 같이 아들도 자기가 원하는 자들을 살리느니라,”(22)는 말씀의 반복이면서 좀더 근본적인 표현으로 이해된다.

즉, 생명을 가지고 계시기 때문에 원하는 자들에게 생명을 주실 수 있다는 확인이 가능하다. 그러나 오해하지 말아야 하는 것은 본래 아들은 생명을 갖지 못했는데 받았다는 오해는 없어야 한다.

“또 인자 됨으로 말미암아 심판하는 권한을 주셨느니라”(27)의 말씀과 “아버지께서 아무도 심판하지 아니하시고 심판을 다 아들에게 맡기셨으니”(22)라는 말씀도 아들에게 심판하는 권세를 주셨다는 말씀과 심판을 다 아들에게 맡기셨다는 차이이지만 의미에 있어서 다르지 않고 맡기신 것 보다는 주셨다는 내용이 더 확실하여 헬라어 원문에서는 같은 단어로 쓰여져 있다. “주다, δίδωμι-didomi”의 과거 시제로 쓰여져 있어서 아버지께서 이미 아들에게 주셨음을 확인할 수 있다.

사실 하나님은 완벽하게 모든 것을 아시지만 그러함에도 어두움의 주관자들에게 조금의 오해의 빌미를 남기시지 않기 위하여 완벽한 사람이 되셔서 사람의 입장을 완벽하게 이해 하셨기 때문에 육신을 입으신 예수 그리스도께 심판의 권세를 주신 것은 더욱 완벽 하신 하나님의 사랑의 역사이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히4:15)

그리고 이렇게 아들에게 주어진 생명을 주는 권세는 이미 상고했던 대로 이 역사가 닫히기까지는 하나님의 백성들인 일꾼들에게 맡겨져 있다.



Ⅲ. 이 역사의 마지막 때의 현상.(28~29)

“이를 놀랍게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

앞의 v25에서는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하였지만 여기서는 죽어서 소멸된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온다”는 말씀으로 아직 일어나지 않은 미래 시제로 되어 있다는 차이를 본다.

바울 사도께서 주님의 재림이 임박했다고 믿으면서 이미 죽어있는 사람들에 대한 안타까움을 가진 데살로니가 교회의 성도들에게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 소리로 친히 하늘로부터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살전4:16) 라고 격려하는 내용과도 관련이 있다.

이것은 주님의 재림의 때에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들과 육신이 살아있을 동안에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음성 즉, 복음을 듣고도 외면해버린 불신자들에게 있게 될 육체의 부활을 주실 것을 예언하신다.

사도 요한은 그의 계시록에서 이를 보다 구체적으로 증거하고 있다. “또 내가 보니 죽은 자들이 큰 자나 작은 자나 그 보좌 앞에 서 있는데 책들이 펴 있고 또 다른 책이 펴졌으니 곧 생명책이라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으니, 바다가 그 가운데에서 죽은 자들을 내주고 또 사망과 음부도 그 가운데에서 죽은 자들을 내주매 각 사람이 자기의 행위대로 심판을 받고”(계20:12~13)

사실 이러한 미래의 일들이 정상적인 사람들에게 믿기지 못할 놀라운 일들이기 때문에 “이를 놀랍게 여기지 말라 …!”(28f) 하셨지만 앞에서도 이미 “… 또 그보다 더 큰 일을 보이사 너희로 놀랍게 여기게 하시리라,”(20b) 하신 것처럼 이러한 일들은 모두가 입을 딱 벌릴 수 밖에 없는 놀라운 일들이다.

하나님의 하시는 일들은 사람의 머리로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놀라운 일들뿐이기때문에 이왕에 놀라운 일에 자신을 믿음으로 맡기는 감격적인 놀라움을 경험하는 하나님의 백성들과 무시해 버렸던 일들이 현실로 벌어지는 것을 보며 땅을 치는 놀라움의 차이가 있을 것이다.

이러한 일들을 전혀 믿지 않고 비웃음으로 넘겨버리는 사람들이 누구일까! 아무래도 세상의 영광과 권세와 부귀를 가지고 하나님의 사랑의 초청을 비웃었던 사람들이 가장 절망함으로 놀랄 것인데 그러한 일을 이미 내다보시고 계시록에 “땅의 임금들과 왕족들과 장군들과 부자들과 강한 자들과 모든 종과 자유인이 굴과 산들의 바위 틈에 숨어, 산들과 바위에게 말하되 우리 위에 떨어져 보좌에 앉으신 이의 얼굴에서와 그 어린 양의 진노에서 우리를 가리라”(계6:15~16) 할 것을 예언하고 있다.

“…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28b) 이 역사 속에 나고 죽은 사람들은 사람의 숫자로 정확하게 계산이 불가능할 것이다. 그런데 그 하늘의 별처럼 바닷가의 모래알처럼 많은 사람들이 예외없이 ‘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온다고 성경은 예언하고 있다.

물론 이 사람들 모두는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한 사람들도 있고 불순종한 사람들이 더 많을 것인데 모두 그분의 음성을 듣게 될 것이고 그 상황은 안타깝게도 이 역사의 마지막에 이런 일이 있게 될 것이라는 것이 성경이 경계하는 교훈이다.

그래도 육신을 가지고 있을 때 그의 아들의 음성을 듣고 순종한 자들에게는 이 마지막의 음성은 두려움이 아니라 감격으로 듣게 될 것인데 그 이유는 역사의 마지막에 다시 오시는 그리스도는 구원의 기회는 끝나고 구원과 심판을 완벽하게 나누기 위하여 오시기 때문이다.

우리 믿음의 사람들이 이해하는 대로는 어린 아기로 베들레헴에 처음 오신 예수 그리스도는 스스로 죄를 해결할 수 없는 죄인들을 위해 죽기 위해서 즉, 죄인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오셨지만 마지막 다시 오시는 예수 그리스도는 이제 심판을 위하여 오신다.

이 사실을 가장 분명히 말씀하고 있는 내용이 히브리서9:28 말씀이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도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단번에 드리신 바 되셨고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하여 죄와 상관없이 자기를 바라는 자들에게 두 번째 나타나시리라”

이런 다시 오시는 목적이 분명 하기 때문에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29)고 모두가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듣고 죽음에서 일어나지만 두 가지의 분명한 구분이 있을 것을 말씀하신다.

독특한 것은 이 마지막의 예언에서 “선한 일을 행한 자”와 “악한 일을 행한 자”로 ‘행한 자’로 구분되고 있음이다. 많은 신앙의 사람들 조차 믿음은 관념적인 것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많은데 판결의 대상이 ‘행한 자’로 표현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는 대부분의 보상은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시되”(롬2:6)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가 행한 대로 갚아 주리라”(계22:12)고 약속되고 있다. 우리는 누구를 따르느냐 또는 어디에 줄을 서 있느냐에 따라 행하는 삶은 달라지게 되는 것이 사실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선한 일을 행한 자”와 “악한 일을 행한 자”의 간격은 무엇일까? 이것이 결과적으로는 ‘선’과 ‘악’으로 나타나지만 단순한 도덕과 윤리적 기준으로만 볼 수는 없다. 물론 수없이 나눈 대로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들도 분명히 도덕적인 덕목들이지만 단순히 상대적인 ‘선’과 ‘악’으로만 볼 수는 없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단순한 항목이 아니라 어느 쪽에서 살았는가 하는 삶의 흔적이 남긴 결과들이다. 빛을 따라 산 공개된 삶인가 어둠을 따라 산 감추고 싶은 삶의 차이 같은 것들이다.

여기 나타난 사상은, 그리스도인들이 현세에서 벌써 영생을 소유한다는 사실과 함께 또한 종말에도 부활의 영생을 받는다는 약속이다. 다음 6장은 오병이어(五餠二魚) 의 표적의 결과로 거론되는 내용이지만 이런 末世的인 현상들을 거론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v40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하시니라” v44 “… 오는 그를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리라” v54“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온 인류의 죄에 대한 대가는 하나님의 아들의 십자가의 희생을 통해서 이미 완전히 지불 되었다. 그런 이유에서 하나님의 아들의 명령을 순종하여 회개하고 고백하고 침례를 받으면 이미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회복은 현재 완료형이다. 그러한 순종이 주님께서 이 땅에 다시 오실 때까지 지속된다면 최후의 심판주로 오시는 하나님의 음성은 두려움이 아니라 감격과 영광이 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육신에 있을 때 순종하지 못하면 마지막 이 역사가 닫힐 때 비극적인 결과를 맞게 될 것을 생각해야만 한다. 언제나 하나님의 명령은 ‘다음에 그곳’이 아닌 ‘지금 이곳’에서 순종해야 할 과제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