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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배 전도자
요 5:30~38 2019-06-23
나를 위하여 증언하시는 이가 따로 있으니,  
오늘 본문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낱말이 어떤 것인가? 바로 “증언하다[μαρτυρέω, martyreo]”라는 동사와 같은 어근이지만 “증언, 증거[μαρτυρία, martyria]”라는 명사의 사용이다.(증언, 증거-10회) 증거를 가장 절실하게 필요로 하는 때는 언제인가! 바로 ‘심판’할 때이다. 모든 판단은 증거를 근거로 판단하게 되어 있는 것이 성경에서뿐만 아니라 민주주의의 사법의 근간이다.[증거 주의의 원칙]

[μαρτυρέω, 動. 증인이 되다, 증거하다, 깨우치다, (증거)내보이다, 기록해 놓다, 정직하게 보고를 하다, 잘 보고되다, 증명하다, 입증하다, 확증하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스스로 있는 자로서 누가 어떤 증거를 가져야 인정되는 그런 분이 아니시다. 그럼에도 자신을 증언하시는 하나님 아버지를 말씀하시는 것은 순전히 사람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서이다.

나타나는 이적이나 표적들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충분히 증거하고 있음에도 유대인들은 그 증거들을 증거로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주님께서는 그들이 인정할 수 있는 증거들을 통해서 이해 시키시려 하시지만 사실 증거를 증거로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증거가 증거의 역할을 제대로 할 수 없는 것이 사실이다.

나중 예수 그리스도를 사형으로 넘기기 위해서는 거짓 증인을 세우기도 하였지만(마26:60~61, 거짓 증인이 많이 왔으나 얻지 못하더니 후에 두 사람이 와서; 막14:57~59) 증거는 보이는 것으로만 입증되는 것이 아니고 보이지 않는 증거들도 있을 수 있다. 안타까운 것은 증거를 들이대도 그 증거를 받아들이지 않는 즉,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가장 가까운 증거는 침례자 요한이 그리스도를 증거한 것이고 주님께서 베푸시는 일들이 사람으로서는 행할 수 없는 역사나 일이고 또 하나님 아버지께서 친히 증거해 주고 계심을 확인 시키신다. “아버지께서 내게 주사 이루게 하시는 역사 곧 내가 하는 그 역사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나를 위하여 증언하는 것이요”(36) ‘역사나 일(ἔργον, ergon 표적의 대명사)’

율법에 사람을 죽이는 판결도 두 사람 이상이 증언하면 참이라고 인정할 수 있다고 “죽일 자를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의 증언으로 죽일 것이요 한 사람의 증언으로는 죽이지 말 것이며”(신17:6) 기록하고 있는 것과 같이 주님은 이러한 세 가지 이상의 사실들이 자신을 증거하고 있다고 말씀하신다.

그러므로 오늘과 다음 주에 연결되는 이 한마당의 말씀은 자신의 하나님 되심의 증거들과 그것 마저도 거절해 버리는 유대인들에 대한 탄식으로 이어진다. 물론 이 모든 증거들의 목적은 이 5장이 증언하고 있는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아버지와 같은 분이라는 사실이다. 증거가 부족해서가 아니라 증거를 무시해 버리는 자세가 비극이다.



Ⅰ. 주님의 심판이 의로우신 이유,(30~32)

“내가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노라 듣는 대로 심판하노니 나는 나의 뜻대로 하려 하지 않고 나를 보내신 이의 뜻대로 하려 하므로 내 심판은 의로우니라, 내가 만일 나를 위하여 증언하면 내 증언은 참되지 아니하되, 나를 위하여 증언하시는 이가 따로 있으니 나를 위하여 증언하시는 그 증언이 참인 줄 아노라”

여기 구체적으로 ‘심판’과 ‘증언’이 함께 기록되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행하시는 일이나 마지막 심판까지도 자신이 원하는 대로가 아니라 자신을 보내신 아버지의 뜻을 행하시는 것이기 때문에 자신의 욕심이나 감정으로 하시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증거 하신다.

뒤의 8:14에 말씀하신 것처럼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나를 위하여 증언하여도 내 증언이 참되니 나는 내가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 것을 알거니와 너희는 내가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 것을 알지 못하느니라”하셨는데 주님은 거짓된 사람들의 증언을 필요로 하지 않으시는 진리요 생명이시다.(14:6) 그럼에도 주님의 긍휼과 사랑은 거절하는 그들도 생명의 진리이신 자신을 찾기를 원하셔서 이런 증거를 주시는 것이다.

어떤 사람이든지 자기 스스로의 말로 자신을 인정하는 것은 인정하기 어렵지만 다른 사람들이 그 사람에 대해 말하는 것은 인정하게 되어 있다. 아무리 스스로 똑똑하다 거나 지혜롭다 거나 또, 어떤 한 사람만이 그 사람에 대해서 말한다 할지라도 받아들이는 것은 쉽지 않다.

그러나 최소한 두 세 사람이 말하는 것이 같다면 믿을 만 할 것이다.[객관성을 가지는가? 언제 누가 보아도 그러하다고 인정되는 성질] 지혜의 사람 솔로몬도 “송사에서는 먼저 온 사람의 말이 바른 것 같으나 그의 상대자가 와서 밝히느니라”(잠18:17)고 여러 사람의 증거가 중요함을 말하고 있다.

“내가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노라 듣는 대로 심판하노니 나는 나의 뜻대로 하려 하지 않고 나를 보내신 이의 뜻대로 하려 하므로 내 심판은 의로우니라”(30)는 말씀은 이미 앞에서 증언하신 “…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들이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나니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그것을 아들도 그와 같이 행하느니라”(19)는 말씀을 더 가까이 설명하시는 내용이다.

“내가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노라 …” 말씀하시는 것은 자신의 무능을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이 아닌 어떤 것도 하실 수 없다는 겸손이다. “듣는 대로 심판하노니” 이것은 아버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명령대로 100%로 순종하신다는 고백이다.

그러한 내용을 더욱 분명히 하시기 위하여 “나는 나의 뜻대로 하려 하지 않고 나를 보내신 이의 뜻대로 하려 하므로” 라는 말씀은 어떤 사람의 말이 아니라 독생 하신 하나님의 아들의 고백 이라는데 더욱 무게가 있다.

하나님의 아들이 이런 자세라면 그를 본받아야 할 ‘우리 사람이야 오죽 해야 하겠는가!’라는 고백을 드릴 수 밖에 없다. 이러한 결과가 “내 심판은 의로우니라,” 즉, 자신의 판단은 하나님 아버지와 같다는 고백이다.

“내가 만일 나를 위하여 증언하면 내 증언은 참되지 아니하되”(31) 분명히 육신을 입으신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렇게 말씀하실 때 땅에서 난 우리 자신들은 더욱 경계를 가질 필요가 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영적이지 못한 나의 고백이 되어야 한다. “내가 만일 나를 위하여 증언하면 내 증언은 참되지 아니하되”(31)

“나를 위하여 증언하시는 이가 따로 있으니 나를 위하여 증언하시는 그 증언이 참인 줄 아노라”(32) 우리는 앞에서도 말한바 있지만 수시로 여러 사람이 들을 수 있게 하늘에서 하나님 아버지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시는 사실들을 인용한 바 있다.

이렇게 철저하게 순종하시는 아들이셨기 때문에 침례를 받으시고 공생애를 시작하실 때 “하늘로부터 소리가 나기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하시니라”(막1:11; 눅3:22)하셨던 것이다.

죄로 인하여 거짓된 사람이 그리스도의 증인이 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하나님의 보내신 성령을 받는 것 밖에는 없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행1:8)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리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아니하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고전12:3)

그럼에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모든 증거는 빛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하나님 아버지의 증거이기 때문에 의로우시고 우리가 그 주님의 뜻을 100% 순종하고 그분의 편에서 행한다면 역시 참될 수 있다.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인정받고 싶은가? 예수 그리스도를 본 받으십시오!



Ⅱ. 침례자 요한의 증언,(33~35)

“너희가 요한에게 사람을 보내매 요한이 진리에 대하여 증언하였느니라, 그러나 나는 사람에게서 증언을 취하지 아니하노라 다만 이 말을 하는 것은 너희로 구원을 받게 하려 함이니라, 요한은 켜서 비추이는 등불이라 너희가 한때 그 빛에 즐거이 있기를 원하였거니와”

앞에서 하나님 아버지의 뜻만을 행하려 하기 때문에 자신의 판단은 의로우시며 바로 하나님 아버지께서 자신을 증언하신다는 말씀을 봤다. 이 부분에서는 그들과 좀더 가까이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한 요한의 증거를 말씀하시면서 땅에서의 증거는 한계가 있지만 그럼에도 요한의 증거는 예수 자신을 위한 것이기 보다는 죄인 된 사람들로 구원을 받게 하려는 것이라 말씀하신다.

침례자 요한의 증거는 이미 1:29~36에 나타난 대로 비록 그리스도께서 자신 뒤에 오시지만 앞선 것은 그가 먼저 계신 분이기 때문이라는 것과 그에게 침례를 베풀 때 성령이 임하시는 것을 보고 비로소 그분을 알아 볼 수 있었다는 것과 함께 가장 중요한 선언은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v29, 36)라는 고백이었다.

이러한 침례 요한의 증거는 많은 사람들도 인정하는 것이었음을 사도 요한도 10:41에서 다시 기록하고 있다. “많은 사람이 왔다가 말하되 요한은 아무 표적도 행하지 아니하였으나 요한이 이 사람을 가리켜 말한 것은 다 참이라 하더라” 이러한 표현은 침례자 요한의 증거에 대한 객관성이다.

“너희가 요한에게 사람을 보내매 요한이 진리에 대하여 증언하였느니라”(33)하였는데 이 말씀 역시 1:19에서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에서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을 요한에게 보내어 네가 누구냐 물을 때에 요한의 증언이 이러하니라”는 말씀의 확인이다.

“그러나 나는 사람에게서 증언을 취하지 아니하노라 …”(34f) 말씀하신다. 다음 주 첫 절 말씀인 v39이 성경의 예언을 말씀하시는 것이지만 메시야의 예언은 OT성경에서 수없이 많았음에도 그 세상으로부터의 예언은 언제나 한계가 있었다는 말씀이다.

그럼에도 “… 다만 이 말을 하는 것은 너희로 구원을 받게 하려 함이니라”(34b) 하여 요한의 증언 자체도 한계를 가진 것이지만 예수 그리스도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바로 육신으로 나서 하늘의 신령한 것을 바로 이해하지 못하는 불신하는 유대인들을 위한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즉, 요한의 증거는 예수님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고 유대인들의 회개를 위한 것뿐이라는 것이다.

그럼으로 예수께서 침례자 요한의 증거에 대하여 말씀하신 것은 자신의 메시야 됨을 확증하려는 것보다, 그의 증거 목적이 사람의 구원을 위한 것을 그들에게 이해시켜 그들로 하여금 믿어 구원을 얻게 하시려는 것이었다.

“요한은 켜서 비추이는 등불이라 너희가 한때 그 빛에 즐거이 있기를 원하였거니와”(35) 이것은 사람으로서의 증거가 한계를 가지고 있음을 말씀하심이다. “켜서 비추이는 등불” 즉 시간적이고 공간적인 한정적 빛을 의미하고 예수 그리스도는 영원히 꺼지지 않는 빛 이심의 비교이다.

즉, 시공간을 비추는 등불[오늘의 LED 전등 불과도 다른 1세기의 기름을 채워서 밝히는 등-호야등]로 영원한 빛을 나타내거나 설명하는 것은 한계가 있다는 말씀이다.

오늘 우리의 그리스도 증거도 한계는 있다. 그러나 이런 역할로 한 사람이라도 참 생명의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된다면 가장 귀중한 역할이 될 것이다.



Ⅲ. 주님께서 행하시는 역사(役事)의 증언,(36~38)

“내게는 요한의 증거보다 더 큰 증거가 있으니 아버지께서 내게 주사 이루게 하시는 역사 곧 내가 하는 그 역사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나를 위하여 증언하는 것이요, 또한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친히 나를 위하여 증언하셨느니라 너희는 아무 때에도 그 음성을 듣지 못하였고 그 형상을 보지 못하였으며, 그 말씀이 너희 속에 거하지 아니하니 이는 그가 보내신 이를 믿지 아니함이라”

이 마지막 부분에서는 사람으로서는 불가능한 예수 그리스도께서 행하시는 표적과 이적들이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증거하는 것이고, 무엇보다도 하나님 아버지께서 자신을 증거하시기 때문에 사람의 증거가 아니라고 해도 자신의 하나님 되심을 증거하지만 이러한 증거가 유대인들에게 받아들여지지 않는 것은 메시야 이신 자신을 믿지 않기 때문이라는 안타까움을 말씀하신다.

“내게는 요한의 증거보다 더 큰 증거가 있으니 …”(36) 바로 앞 v35에서 말씀하신 침례자 요한의 증거와 비교되는 자신을 통해서 나타나는 증거인 이적들을 말씀하신다. 실제로 이 세상의 판결에서도 ‘소리’보다 더 큰 증거들은 있다. 많은 사람들이 거짓으로 자신의 깨끗함을 증거하다가 ‘증거물’을 제시하면 승복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볼 수 있다.

“… 아버지께서 내게 주사 이루게 하시는 역사 곧 내가 하는 그 역사 …”(36m) 서론에서 간략하게 언급한 바 있지만 주님께서 행하신 “역사, 일[ἔργον, v36 표적의 대명사, 21:25에서는 목적격 관계 대명사 ὅσος, hosos가 쓰였지만]”들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되심의 표징이라는 것을 적극적으로 증거하는 것이 이 요한복음의 기록 목적이라고 하였다.

그러한 이적들이 땅의 사람들이 교묘히 눈 속임을 하는 마술과는 분명히 다르고 그런 하늘로부터 주어진 표적을 보면서도 믿지 못하는 유대인들이 참으로 불쌍한 사람들이다. 그렇다면 오늘의 나의 차이점은 무엇인가를 생각할 필요가 있다.

“…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나를 위하여 증언하는 것이요”(36b) 다른 표현으로 하나님께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신 모든 증거들은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는 말씀이다. 당연히 죄에 빠진 인류 구원을 위한 것들임을 증거하시는 것이다.

“또한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친히 나를 위하여 증언하셨느니라 …”(37f) 앞에서도 여러 번 언급하였던 것처럼 주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심부터 십자가에서 세상 죄를 담당하시기 까지 하나님께서 친히 증거하신 일들은 상당히 여러 번 있었지만 사람들은 그 증거를 듣지 못했고 깨닫지 못하였다.

이러한 실제적인 예를 하나만 보면 주님께서 자신이 유월절에 십자가를 지셔야 할 일을 앞두시고 “아버지여,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옵소서!”(12:28f) 하셨을 때 하늘에서 소리가 나서 이르시기를 “내가 이미 영광스럽게 하였고 또 다시 영광스럽게 하리라”(28b) 하셨지만 곁에 서서 들은 사람들은 “천둥이 울었다고도 하며 또 어떤 이들은 천사가 그에게 말하였다”(29)고 하였다는 기록이다.

그 사건에서도 주님께서는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이 소리가 난 것은 나를 위한 것이 아니요 너희를 위한 것이니라”(30) 말씀하신 바 있다. 결국 사람을 통한 말씀을 듣지 않으려 하는 사람에게는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눅16:31)는 말씀이 적절한 표현이다. 이런 사람에게는 천사나 하나님께서 직접 말씀하셔도 듣지 못한다는 비극이다.

이스라엘에게 주신 그 흔한 하나님의 표적과 이적에도 불구하고 “… 너희는 아무 때에도 그 음성을 듣지 못하였고 그 형상을 보지 못하였으며”(37b)라고 주님께서 탄식 하시는데 그 이유가 오늘의 마지막 38절의 말씀이다. “그 말씀이 너희 속에 거하지 아니하니 이는 그가 보내신 이를 믿지 아니함이라”(38)

그럼에도 여기 또 하나의 부정적인 모습이 남아있음을 지적하신다. “그 말씀이 너희 속에 거하지 아니하니 …”(38f) 말씀을 믿지 못하는 불신하는 마음에 말씀이 거할 수 없는 즉, 말씀이신 그리스도께서 성령께서 계실 수 없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이다. “나도 너희가 아브라함의 자손인 줄 아노라 그러나 내 말이 너희 안에 있을 곳이 없으므로 나를 죽이려 하는도다”(요8:37)

또 이것은 사랑과도 나눠질 수 없는 관계를 나타내고 있음을 지적하신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그에게 가서 거처를 그와 함께 하리라”(요14:23)

이런 안타깝고 비극적인 결과를 지적하고 계신다. “… 이는 그가 보내신 이를 믿지 아니함이라”(38b) 즉, 불신의 결과라는 말씀을 하시는 것이다. 바울 사도는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롬1:17; 합2:4)는 말씀이 같은 답변이다.

주님의 심판이 의로우신 증거는 철저하게 아버지의 뜻을 행하시려고 하는 이유 때문이었다. 오늘 우리의 판단도 나의 이해나 생각이나 입장보다도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행하려 한다면 옳을 것이다.

사람의 증거는 영적인 사실에 있어서는 한계가 있다. 예수 그리스도는 OT의 수많은 선지자들이나 마지막으로 예수님을 역사에 나타내려 보내신 요한의 증거도 필요치 않으신 하나님이시다.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되심의 가장 분명하고 흉내 낼 수 없는 증거는 바로 아버지께서 주셔서 행하게 하신 그의 표적들과 삶이었다. 오늘 내가 바른 그리스도인이라면 다르지 않을 것이다. 오늘 우리에게 있는 증거는 예수 그리스도와 같은 표적은 나타나지 않지만 세상사람들이 흉내 낼 수 없는 구별된 삶이고 그 근거는 주님의 성령께서 오셔서 함께 사시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