Ⅱ.성화의 가능성
우리가 본받기 원하는 거룩함은 하나님 자신의 거룩하신 성품이다.(벧전1:15~16) 성서의 계시된 말씀을 통해서만 하나님의 거룩하신 성품을 알게 된다. 이런 의미에서 성화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루어진다. 요한복음17:17; 사도행전20:32; 벧전2:2을 보라. 하여튼 성경 말씀을 통해서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를 안다는 것이지 실제로 그렇게 할 수 있다는 것은 아니다. 영적으로 연약한 죄인의 상태를 고려해 볼 때, 지식만으로는 거룩하게 되기에 충분치 않다는 것을 알게 된다. 하나님의 말씀에 접하여 악을 버려야겠다는 동기를 갖게 된다 할지라도 우리 자신의 힘으로는 우리가 싫어하는 죄를 정복하고 선을 행할 가능성과 능력을 갖지 못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로마서7:14~24을 보라.
그러나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의 은덕으로 준비해 두신 것으로, 즉 성화된 삶을 살 수 있는 가능성과 그 능력을 준비해 두신 이유이다. 여기에서 하나님께서 성화를 가능하게 하시려고 행하신 일에 대해 의논코자 한다. 사람이 구원 받기 전에는, 외적으로든 내적으로든 선한 일, 정말 선한 일을 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죄인은 영적으로 죽었고(에베소서2:1), 그렇기에 하나님과는 분리되어 있다. 이런 불신의 상태에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을 할 수 없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하나니”(히브리11:6). 나쁜 나무는 그 나무 자체가 변할 때까지는 계속해서 나쁜 열매를 맺을 것이다.(마7:16~18, 12:33~35) 그러나 회심 때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변화 시키셔서 우리가 죄악의 권세로부터 자유케 되고 또 거룩함에 이를 수 있게 된다. 이런 변화를 일컬어서 중생 또는 거듭남(디도서3:5; 요3:5), 새로운 피조물(엡2:10; 고후5:17) 또는 죽음으로부터의 부활(엡2:5~6; 골2:12~13 ) 이라 한다. 이것은 성령께서 우리 마음에 역사 하심으로 일어나는 변화이다. 이 성화는 관계에 있어서의 변화인 칭의와 비교해서, 실제적인 상태의 변화이다. 중생과 초기 성화는 동시에 일어난다. 그러나 이 둘 사이에 구분이 있다는 것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
이 변화는 칼빈주의적 개념인 거역할 수 없는 은혜와 비교 될 수 없다. 칼빈주의에 의하면 죄인이 믿음을 가지거나 믿고자 하는 의욕이 있기 전에 성령께서 그의 마음을 변화 시킨다는 점이다. 그러나 성서적인-중생의 가르치심은, 죄인이 하나님의 성령이 변화 시키는 능력에 자신을 굴복한 후에,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믿음을 갖게 되고 변화하고자 하는 의욕을 가지게 된다. 이 “하나님의 역사하심”은 그리스도교의 세례 때에 일어 난다. 이때 성령께서 임하시고 그 죄인은 새 생명으로 부활된다. 사도행전2:38; 골로새서2:12; 요한복음3:5; 디도서3:5을 보라.
성령께서 정확하게 어떻게 역사하시는지 또는 그 변화의 정확한 본성이 무엇인지는 성서가 설명하지 않고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중생의 성질이 아니라 중생의 결과이다. 그 내적 변화의 목적은 우리가 거룩하게 되어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수 있게 하는 것이다. 에스겔36:26~27은 “또 새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또 내 신(神)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라고 예언한다. 에베소서2:10은 아주 특이하다.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성령의 내적, 재창조 사역의 분명한 목적은 선한 일을 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이것이 성화의 가능성을 지지해 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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